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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Feb 03. 2024

새 발걸음

 책상 앞 유리창은 간유리(frosted glass). 부풀어 오른 햇빛이 얼굴 반면, 모니터 그리고 책상 위로 내려앉는다. 커피 향과 맛을 즐기는 나만의 시간에 까치처럼 날개를 접고서.     


 집 리모델링 공사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났다. 스트레스에 지치고 비용도 만만찮은 공사를 굳이 해야만 하는지, 업체들은 왜 이 시장에 우후죽순처럼 뛰어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의 가치 창출이 더할 나위 없이 크다는 것이다. 또 하나 베이비 붐 1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집을 사고파는 것보다 취향에 맞게 고쳐보려는 트렌드가 파이를 키운 것으로 짐작된다.       

      

 새집에 입주하며 환경호르몬을 유발하는 냄새에 덜 민감한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공사가 끝날 무렵 베이크 아웃한다며 1, 2층 보일러를 연일 틀었다. 이삿짐을 옮겨와서는 공기청정기까지 풀로 가동했다.

 이를 눈여겨본 업체 사장이 내게 말했다. 친환경 소재가 아니면 본사에서 자재를 내려보내지 않는다. 창호 새시는 말할 것도 없고, 목 자재, 석고 보드, 장판, 도배지 심지어 접착하는 풀까지 엄격히 규정을 지킨다고 했다. 그러니 비싼 가스나 전기료 아끼라고 충고(?)했다.      

    

 바깥일을 마치고 현관으로 들어서면 안온하고 아늑함이 먼저 날 맞이한다. 집 이곳저곳 돌아다녀도 부자연스럽게 와닿는 공간이 없다. 우리가 요구했던 구조와 배치, 기능적인 디테일까지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성 옷 대신 맞춤옷을 입었다는 느낌이다.


 시장 아랫길 특성상 갖은 소음들이 넘쳐 나지만 이중 창호로 차폐되고, 실내 보일러는 적정온도에서 조절 다이얼을 낮춰도 온기가 오래 지속됐다. 회색 톤 문선 몰딩, 침실과 현관 옆 화이트 루바는 화룡점정이다.    


    

 풍수 연구가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지난달 유명을 달리했다. 7~80년대 정치인들의 음 양택 관련하여 유명세를 누리던 지관 지창용, 손석우와 달리 자생 풍수 개념을 정립했던 교수가 아니던가. 문제가 있는 땅은 고쳐 쓰면 된다고 하여 당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우리 집 리모델링도 당돌하게 그 궤를 같이하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을 압축하자면 의· · 주라고 볼 수 있다. 입고, 먹고 마지막에 살 주()가 나온다. 서울 올림픽 이후 마이카 붐이 일 때도, 승용차가 주()의 영역까지는 범하지 못했다. 그래서 의(), (), (), ()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떠돌지 않았던가.  

   

 공사 기간 중 관련 서적들을 사보았다. 우리나라 주택의 평균 수명이 선진국보다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토부 자료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은 각각 128, 121년이고 프랑스도 80년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27년으로 지진이 잦은 일본의 54년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럽 선진국은 건물 수명이 오래되다 보니 그 히스토리를 새 주인에게 전하는 사례까지 있다고 한다. 건물의 철학과 정신을 이해함은 물론이고 유지보수에 보탬이 되려는 것이다. 주택을 잠재적 재테크 가치로 여기는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이다.     


 이 집은 1988년에 지어진 벽돌 조적조 이층 슬래브 구조다. 리모델링 공사와 관련하여 관공서를 방문해 보니 설계 도면이 보관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며칠 뒤 이삿짐을 정리하다 아버님 서재에서 누른 서류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35년 전 관내 모 건축사 사무소에서 만든 일체 서류(건축허가신청서, 허가서, 공사시방서, 청사진 16)와 등기필증까지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감격스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고 당신의 인품까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뒤를 이어 리모델링 공사 내역서도 같이 첨부하여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다. 김형석 교수가 말했듯 인생의 절정기 구간을, 새롭게 발걸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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