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내 생일이 있었다. 옛 어른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달갑지만 않다고 했는데 어느덧 그 언저리에 서 있다.
아내는 하루 전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주며 축하해 주었다. 정중히 날짜를 정정해 주었다. 다음 날 저녁 딸의 전화가 왔고 아들은 밤이 늦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작년에 결혼한 후 다가온 자기 아버지 생일이다. 그래 뭐, 품 안에 자식이라 하지 않던가. 결혼하고 나면 각자 가는 길이 다르고, 남 사위인 것을.. 떨쳐 버리려고 할수록 서운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렇게 6일이 지난 점심 나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생신이 지났어요?”
“양력으로 5월인 줄 알았는데, 벌써 지났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ㅋㅋ”
“○○(새아기)랑 조금 전 얘기 나누다가 알았어요.”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빠? 삐졌어요?”
“아니?”
“아빠? 뭐..뭐.. 필요한 거 빨리 얘기해요. 나 ○○에게 혼나요. ㅋㅋ”
“아빠? 계좌번호 보내요. ○○(여동생)하고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않을 터니, 비자금 마련해 드릴게요.”
뜻밖에 비자금이란다. 암튼 그렇게 생각하니 고마울 따름이지 아비가 자식을 더 탓하겠는가.
조금 후 카톡이 왔다.
‘ㅠㅠㅠ’
안 되겠다 싶어 계좌번호를 보냈다. 이삼십만 원 보내려고 하겠지.
‘엎드려 절 받기네 ㅎ’
‘보냈어요~’
‘사랑해요, 우리 아부지~~’
‘건강하셔용. 뽀뽀뽀’
띵동, 핸드폰 알림이 떴다. 계좌를 열어보니, 이게 뭐야? 10만 원도 아닌 100만 원이 찍혀 있었다.
허튼 말이 아니었다. 자식이 몰래 주는 툭툭한 용돈인데 ‘선한 비자금’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두릅 농사도 거의 끝나가니 예전처럼 테니스 개인 레슨을 받아봐? 아니면 벼르던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볼까? 한겨울 곶감 빼먹듯이 쏠쏠한 재미를 떠올리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만 아내에게는 비밀에 부쳐야 하는데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내가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시도해 볼 만한 사건임에 용기를 내봤다.
하루 이틀 아내와 대면할 때는 그런대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 그 무엇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사나흘 경과하자 굳건했던 결심이 움켜쥔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았다.
감내하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임계점에 도달한 어느 날 아내에게 이실직고했다. 화들짝 놀라는 아내보다 내가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방하착(放下著)이라 했던가, 마음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안한 것을.
아내가 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로 나가 설핏 엿들으니..
“ㅋㅋ 우리 아빠 입이 간질거려 어찌 견디려고? 6일이면 많이도 참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