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
초등학교 시절, 두세 번 그곳에 갔었다. 추석날 선산에 들렀다가 형제들과 뜻이 맞는 날이면 시내를 건너 우뚝 솟은 산을 올랐다. 각자 한 손에는 큰집에서 받은 떡과 과일들을 싼 조그만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해발 371m인 그 산은 나이에 만만찮았다. 9부 능선쯤 가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몇 번을 뒤돌아보며 쉬었다. 그러나 정상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 둘 봉우리를 오르자 해가 떠오르는 쪽 멀찌감치 가물거렸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뜀박질을 시작했다. 얼마 후, 산 정상에서 우뚝 솟은 성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만화책이나 가설극장에서 가끔 보던 오래된 황성(荒城)이었다.
이끼와 검버섯이 잔뜩 핀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큰 돌들이 곳간에 쌀가마처럼 쌓여 있었고, 옛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셌는지 어린 나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성벽을 따라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군데군데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이 많아, 피해서 걷기조차 불편했다. 조금 더 걸으니 성 안쪽으로 오를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언덕과 나무들을 보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산봉우리를 둘러싼 성벽이 할아버지가 갓 쓸 때 머리에 두르던 망건과 어쩌면 똑같을까!
성벽 가까이 다가가도 밑을 내려다보기가 겁났고, 바닥은 잡석과 흙, 잡초로 무성했다. 성안에 유물이라도 있나 돌아다녀 봐도, 흔히 보는 동네 언덕 같을 뿐이었다. 키 큰 나무들도 별로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 입대 직전 무렵에 한 번씩 더 찾았다.
귀향한 그 이듬해, 팔순의 아버님을 모시고 다시 성을 찾았다. 산 너머 해안 쪽 동네에서 오르는 도로가 있어 승용차를 이용했다.
주차하고 언덕길을 조금 오르니 전경이 펼쳐졌다. 정문이 아닌 올라온 언덕을 연장하여 편하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벽 보존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낸 것 같아 참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대대적인 복원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내 눈을 의심했다. 성 한가운데 조성된 녹지는 그렇다고 하자. 가장자리를 따라 도는 바닥은 익숙한 판석으로 깔려있고, 넓고 일정한 폭으로 끝까지 이어졌다. 고개를 내밀어 보이는 석벽은 촘촘히 쌓아 올렸는데,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옛 추억을 반추할수록 이질감은 더했다. 최근에 새롭게 축성된 성이 내가 간직한 성을 송두리째 덮어씌운 것 같았다. 도(道) 기념물, 한정된 예산 등 복원 과정에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지역 관광자원 개발과 확충이라는 시급성과 탐방객의 안전한 보행도 담보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안타깝고 서운함이 남는다.
그 이듬해, 어느 TV에서 방영한 리얼리티 예능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뮤지션 세 사람이 마추픽추를 찾아가는 페루 편이었다. 날씨와 교통편 등 힘든 여정을 극복하고 마침내 유적을 한눈에 조망하는데,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클로즈업된 그들의 눈엔 눈물이 흥건히 담겨 있었다.
고증은 거쳤다는 미명 아래 완전 복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주거지도 그럴싸하게 조성하고 유실된 석조물은 대체 자재로 마무리했더라면 탐방객들의 반응은 별반 차이가 없을까? 오래된 유적일수록 현 상태 그대로 보존 처리하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한 국제 헌장(베니스 헌장)에서도 말한다. ‘추측(conjecture)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복원은 중단되어야 하며, 이 경우 어떠한 필수적인 추가 작업도 건축 요소와 구분되어 당대의 표식(contemporary stamp)을 가져야 한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다. 기념물, 사적지 보존과 복원을 위한 노력은 탐방객 각자의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도 남겨두자는 데 있지 않을까.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과 고향에 있는 성, 어찌 눈높이를 맞출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아 주말이면 다시 찾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