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말정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수 Jan 01. 2021

연말정산#3 : 친절하지 못한 나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는 없는데 곧 떠날 거라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마음으로는 도저히 친절해질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신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자꾸 받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오해일 수도 있을 테니.

허수경 시인 <가기 전에 쓰는 글들> 中


허수경 시인의 글을 읽은 것은 올 한 해 잘한 일들 중 하나이다. 특히나 시인의 글을 겨울에 접해서 기뻤다. 지난 시간 찾지 못한 어떤 답들을 대신해주는 문장들이 그녀의 글에 있었다. 그래서 좋은 작가의 글을 읽을 때면 마음으로 빚을 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에 모든 극과 극은 맞닿아 있기에 무관심은 곧 친절이 될 수 있었다. 아쉽지 않은 관계들에게 오히려 더 친절하게 대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몸 한편에 학습된 친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쓸 수 없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신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종교는 없기에 당연 종교적인 이유는 결코 아니다. 결국은 내가 믿을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친절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건 오해일 확률이 높다. 내가 믿지 못하는 객관적 이유가 아닌 내가 만든 믿을 수 없는 이유 때문이라면 이건 분명 확률의 문제다. 그것도 되게 낮은 확률. 나 혼자 감히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고 대체로 틀릴 테니까.


내가 오해한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아주 적은 확률이 맞아서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게 정말로 오해가 아니라면, 그들이 나에게 미안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편으로 내가 종종 보여준 친절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가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솔직하지 못해서다. 이런 못된 생각을 품고 사는 내가 보여준 친절이 진실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들에게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의미이다.


내가 애써 친절하지 않아도 나를 좋아해 주는 관계들에는 어떤 믿음이 있었다. 내가 연기하지 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이유는 내가 친절해서가 아니라 솔직해서일 수도 있다.




당신이 아는 세상이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바꿀 것인가요?


올 한 해 스스로에게도 많이 되묻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물어봤던 질문이다. 이 질문을 아주 오래전에 처음 들었을 때는 별생각 없이 흘렸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되게 많은 생각의 여지를 줬다. 단순히 매트릭스 속 세상에 대한 질문은 아닌 것 같다. 훨씬 더 복잡한 층위를 가지는 질문이라 느낀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어쩌면 진짜가 아니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믿었던 것들이 가짜라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영화가 다 가짜면 어쩌지라는 것이다.


꽤 오랫동안 영화에 대한 이상하리만큼 큰 믿음이 있었다. 영화가 가짜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타인을 파괴하면서 만든 영화가 정말 진짜일 수 있을까. 그게 진짜라고 믿는 게 이제는 너무 이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나아지려는 믿음과 시도들도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을 바라볼까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오는 것 같다. 가짜가 있다면 진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친절하지 못했던 이유, 신실하지 못하다고 했던 생각, 진짜가 아니라는 의심.

사람에게 속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다정이라고 감히 믿어본다.


나는 내가 아는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면 내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근데 나는 아직 내가 진짜라고 믿는 것이 있다. 그게 가짜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말 정산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정산#2 : 사람을 만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