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후기
이것은 연습 초창기 때의 일. 그때 나는 연습실 난가에 기대어서 쉬고 있었다. 내 옆에는 츤데레 베지터님이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전장의 워리어님과 침묵의 인자강님이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가
그 A배우님 말이에요. 이름이 진짜 멋진 거 같아요. 처음 이름을 듣자마자 무협영화가 생각나더라고요.
어쩐지 무협 소설에도 나올 거 같고... 되게 강한 고수의 이름 같지 않아요?
그러자, 츤츤님이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츤츤
... 맞아요. 그 친구 이름은 일단 사파邪派 쪽은 아니에요. 정파正派 쪽이죠.
왜, 무협 영화 보면 그런 거 있잖아요.
정파의 고수이면서 얼굴도 예쁘고 곱상하게 생긴 꽃미남.
작가
아아, 맞네, 맞네. 정파의 무림 고수 이름이네.
가끔씩 하는 실없는 소리. 그때마다 맞장구치는 이는 츤츤님 뿐이다. 전장의 워리어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아아, 네에, 라고 한다. 그러다가 저어, 근데~ 라고 말하며 화제를 돌린다. 기왕이면 쉬는 시간이라도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워리어
근데 출동을 나가면요... 블라블라... 현장에서 구조대는... 블라블라 (작가한테 질문 중)
정말이지, 열정이 넘치는 사나이다.
반면, 침묵의 인자강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때 시선은 나와 츤츤님을 향해 있지 않다. 15도 정도 얼굴을 숙이고 약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눈을 마주치면 나와 츤츤님의 실없는 소리에 빠져나올 수 없다는 듯이... 그냥 미소만 짓는다. 역시 스마트한 배우다. 참고로 소년 이준과 모찌 이준은 꼭 없더라;;;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ㅋㅋ
지난번 '라면' 에피소드 때도 이야기했지만, 난 귀하다는 생각이 들면 맨 마지막에 쓰는 버릇이 있다.
근데 이건 아까워서 못 쓰겠더라. 단 한 번이라도 쓰는 순간 '귀함'과 '희소성'이 동시에 사라질 거 같아서. 그래서 귀함을 유지하고자 현재도 저렇게 보관되어 있다.
이건 귀하고 소중한 것의 여부를 떠나서 절대 쓸 일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역시 보관. 하지만 언제든 손에 닿을 만한 혹은 눈에 자주 보이는 곳에 있다. 여차하면 써야 하니까. 근데 그 '여차하면'이 생기지 않도록 콘센트 확인도 하고 발화성 물질들은 방에 두지 않으며, 나름 예방을 잘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사칠 공연이 한창인 9월 하반기. 츤츤 정원님한테 연락이 왔다. 서울 언제 오시냐고. 공연 보러 와라 등등. ㅎㅎ 작가님 생각나서 연락했다는 말이 정말 고마웠다. 여러 번 말했지만, 배우분들도 모두 따뜻하고 팀 분위기가 정말 좋다. 나중에 츤츤님 페어로 보려고 서울에 갔는데, 결국 츤츤님은 만나지 못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한동안 아프셔서. 다행히 괜찮다는 연락을 받았고 조만간 다시 보러 갈 예정이다. 여하튼, 이런 공연팀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칠을 늘 기억하기 위해서 신작 유키 선생님 대사에 사칠 이스터에그를 넣어 놓았다.
여하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는 소년 이준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조만간 워리어 정원님과 인자강 이준님하고 사칠 관련 팟 캐스트를 나간다고 한다. 질문들 중에 몇 개는 작가님한테 물어봐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응? 나한테? 뭐지? 배우님들도 다 충분히 답변할 수 있을 텐데.
그래요. 제가 답변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말씀드릴게요. ^^
Q. 이준이의 사고 당시 계급이 궁금해요. 2016년 소방사 임용이라고 인사하는데, 소방사에서 추서 되었으면 마지막에 견장을 소방교를 달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시보 때라면 소방사 견장이 딱 맞긴 한데 국가공무원 시보 순직 시 승진 규정 관련 규정이 2018년이길래 조금 헷갈려요.
허걱!!!
뭔 질문이 이렇게 디테일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질문 보자마자 빵, 터짐.ㅎㅎㅎ
와, 역시 심플한 질문들이 아니라 디테일하고 핵?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들을 하시는구나.
사실, 놀라기도 했지만 감동했다. T^T (울컥)
정말 관객분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극을 보고 계셨구나, 싶어서.
이제부터 '존댓말'로 쓰겠습니다. 아무래도 대답하는 형식이다 보니까;;;;
그날 팟캐스트에 배우님들이 답변을 잘해주셨어요. 소년 이준님에게도 답을 전달했지만, 원래는 소방교가 맞습니다. 순직했으니까요. 하지만 정원이는 이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강이준이란 나의 동생, 나와 함께한 소중한 추억을 공유한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애써 모른 척하고 있어요... 그래서 강이준은 소방사입니다. 이 작품은 정원이의 시선을 따라가니까요. 정원이의 눈에 이준이는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소방사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정원이의 시선에 이준이가 이제 그만 소방교로 보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이 고통과 무한의 반복을 멈출 수 있을 테니까요...
아아,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구나!!!
일반적으로 첫 출동을 나가면 신병 의무소방원이 하는 일이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일이지요. 관객 분들도 사회생활 및 직장 일들을 하셔서 아시겠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요. 경험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하 직원이 들어오고 누군가의 '사수'가 되기 마련입니다. 처음부터 업무를 맡기진 않죠. 사실 군대 생활이란 것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여하튼, 의무소방원 첫 출동은, 나가면 그냥 가만히 서 있어요;;;; 의무소방들 선임, 반장님들은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데 신병은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바쁜 현장에서 혼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살짝, 현타가 오고요. 민망함과 무력함이 동시에 밀려옵니다.
그날 이준이는 평화공장 B동 엘리베이터 들어갔습니다. 화재는 A동에서 났고요. 그 당시 공장 건물이, 그러니까 모티브였던 공장이 약간... 아파트 단지 같은 느낌이었어요. 근데 아쉽게도 작품 안에서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화재가 나면 상황실에서 핫라인을 통해 한전 상황실에 연락을 합니다. 그러면 한전 상황실에서는 화재지역일대 전력을 차단해요. 감전 우려 등 위험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당시, 모티브가 된 공장의 경우 A동 차단, B동 해제. 이런 식이 아니라 그 지역 일대가 다 물려? 있어서요. 전체 전력이 차단 됐습니다. 그래서 비상전력이 가동이 되어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닫혔다 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비상전력이 '상시'는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일단 기본 배경은 이랬고요.
보다 자세한 내용은 그날 팟 캐스트를 본 분들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워낙 배우님들이 답변을 잘해주셔서요. ^^ 저는 다른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안정원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전을 하는데, 구조대 반장님들이 다소 한심하다는 톤으로 대답을 하잖아요. 그게 왜 그런 거냐 하면, 의무소방원들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서 한심한 이유도 있지만...
사실, 안정원은 일방 시절에 산악구조를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실종된 적이 있어요. (네, 이 부분도 실화입니다ㅠㅠ) 그래서 구조대에서 저를, 아니지, 안정원을 구하러 온 적이 있거든요. 근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구조대 반장님들하고 산에서 그냥 비박을 한 적이 있어요. 다 같이 함께ㅋㅋㅋ 그래서 반장님들 입장에서 보면 이게 두 번째잖아요;;;;; 물상방 안정원이... (안정원 별명은 물상방입니다. 상방 때까지 후임이 없는, 권력도 없는 상방이니까요) 후임도 들어왔는데 쟤가 또 저러네;;;; 얼마나 한심해 보이겠어요^^ 그래서 구조대 직원의 목소리 톤이 그런 겁니다.
그날 저도 팟캐스트를 봤습니다. 사실, 배우님들 음료수라도 드시라고 슈퍼챗 쏠까도 했는데 제가 너무 나대는? 거 같아서요. 유키 선생님 대본 쓰면서, 작업하면서 보고 있었어요^^
다들, 군대부심들이 엄청나더라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 세상에, 신병 때부터 잘했다니.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해? ㅋㅋㅋㅋ 확인할 길이 없으니, 이거야 원... 근데 보고 있자니, 다른 한 편으로는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연습 초창기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워리어 정원님이 저한테 해 준 말이 생각났어요.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워리어님이 자기는 배우가 아니었으면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 쪽을 했을 거 같다고 해서요. 정말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던 게 기억이 나네요. 실제로 구조대 대원이 연상될 만큼, 무대 위에서 잘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119 구조대 아우라를 풍긴 삼인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근데 팟캐스트에서도 또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와, 진짜 제복을 입은 직업을 하고 싶으셨나 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호스 전개'는 모든 배우들이 처음부터 다 잘하셨어요. 사실, 이게 쉽지 않은 건데 배우들이라 그런지 운동신경들이 좋아요. 방화복 착용도 그렇고 정말 빨리 습득하셨어요. 물론, 개중에서도 호스 전개 순위를 꼽자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일자로 전개했던 건 '소년 이준'입니다. ㅎㅎㅎㅎ
... 근데 작가님보다 본인이 더 잘했다고 그러더군요.
핫,... 하하하!!!! 참 내...-_-+
ㅋㅋㅋ농담이고요. 진짜 저보다 전개를 더 잘했습니다.
저도 팟캐스트 보면서, 순간 떠오른 생각이 인자강 이준님 아니면 소년 이준님 같은데, 둘 중에 누가 더 빠른지 모르겠네, 였어요.ㅎㅎㅎ 근데 아니나 다를까, 그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침묵의 인자강님은 (운동 신경이 좋은) 배우들 중에서도 유달리, 더욱, 더더욱, 지이인짜로~ 운동신경이 좋습니다. 그리고 공과 함께한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운동선수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요. 한 마디로 진짜 체대생 같은? 게다가 내색은 안 하지만 엄청난 승부욕을 지니고 있고, 진정한 강자?의 느낌이 들어요. (내가 형인데 싸우면 질 거 같다, 뭐 이런 거?) 반면, 소년 이준님은 악바리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몸도 정말 잘 쓰고, 순발력이 정말 좋아요. 막 그런 거 있잖아요. 마르티즈는 참지 않아!!
그러게요, 진짜 둘 중에 누가 더 빠른지 모르겠네. 근데 제 개인적인 느낌만 말씀드리자면,
맨 처음에는 인자강님이 더 빠를 거 같아요.
그런데 소년 이준님이 악바리 기질을 발휘해서 어떻게든 그 후에는 이길 거 같은 느낌?
그러면 다시 인자강님이 연습해서 소년 이준님보다 더 빨리 환복 할 것 같은?
약간 슬램덩크의 서태웅이랑 윤대협 같은?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 드네요ㅎㅎ
... 변희상?
뭐야, 왜들 다들 고민해. 왜 모르는 척 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들 답변을 미루는 모습을 보며, 역시 배우님들이 팀워크가 좋구나,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인 거 아시죠?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츤츤님도 방화복을 빨리 입습니다. 근데 특유의 정원이 캐릭터, 츤데레 콘셉트 때문에, 늦게 입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근데 실제로는 '진짜' 빨리 입습니다.
전에 제가 언급했던 C타입 츤데레 베지터 이야기를 다시 한번 볼까요?
바로 이런 느낌을 풍기는, 츤데레 안정원 콘셉트의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늦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그날, 인자강님이 말하기도 했지만, 길쭉길쭉해서 오래 걸린다는 고정관념?도 있고요ㅋㅋㅋㅋㅋ
처음 사칠을 쓸 때부터 정원이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와 기획님, 그리고 연출님은 정원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요. 초창기 때부터 정하고 집필을 했거든요. 하지만 열린 결말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관객 분들에게는 해석의 여지를 두었습니다. 관객분들 취향, 각자 바라본 '서사의 흐름'에 따라 정원이는 순직했거나 아니면 산재가 인정되어 명예롭게 은퇴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관객분들 각자가 정한 결말을 저는 존중하고요.
아마, 7:3 혹은 8:2 정도 비율로 관객분들은 정원이는 순직을 했을 것이다, 라고 여기실 거 같습니다. 저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극을 보고 나면 아, 순직했구나, 라고 느껴지니까요. (어느 쪽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못하겠지만, 어찌 됐든 창작진이 정한 결말과는 무관하게요) 정원이가 순직을 했든, 아니면 여전히 살아있든 이제 극장을 나오시면 캐스트 보드는 바뀌어 있고, 관객 분들은 (사칠을 보기 전과는 달리) 그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정원이의 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쓰면서 되게 힘들더라고요. 팟캐스트에서 워리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배우님들은 (이준이 포함) 극이 끝나고 각 인물들, 특히 정원이를 털어내는 과정이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정원이가 되어 일기를 쓰는데 가슴도 답답하고, 아마, 관객분들이 공연을 보면서 느끼셨을 그런 감정들이 생겨났습니다. 원래 일기는 2018년도가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기를 기획팀에 넘겼고요.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칠'은 이제 끝났는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정원이의 숨통을 틔여 주면 안 되는 것인가? 지금껏 정원이와 이준이는 소방관으로서, 타인을 구하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그리고 그들을 구하지 못하면 죄책감에 허덕였는데...
소방관의 기도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언제나 집중하여
가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빠르고 효율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저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케 하시고
제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시어,
이웃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제 목숨이 다하게 되거든,
부디 은총의 손길로
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아주소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정원이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어요.
이제 소방관의 기도는 그만 외우고, 안정원 너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면 안 되겠니? 사칠을 본 사람들 중, 정원이 네가 이제 너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한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네 성격상 매일 하지도 않을 테고, 아주 가끔 하는 거뿐이잖아.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는 자신의 목표, 욕심, 혹은 이상, 꿈을 위해 '나만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많고 '나만의 행복'을 염원하는 사람들도 많아. 아무도 그런 기도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지만 선뜻,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일기는 2018년에서 끝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열린 결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관객분들의 각자의 판단에 맡기며... 그러다가 '겨울'이라는 어떤 관객 분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 의도를 알고 계셔서요. (혹시 겨울님, 블로그 주소 공개가 불편하시다면, 브런치로 연락 주셔요ㅠ 주소 지우겠습니당) 이 분 다른 글들도 되게 날카롭고 재미있는 후기가 많습니다. (라스트맨 관련해서도요)
겨울님 말씀 그대로였거든요. 저는 관객들을 절망에 빠트리는 게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작중 인물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를 바랐고, 살면서 어느 순간, 어떤 사회적인 부름이 온다면, 강이준과 안정원이 아닌, 이제 관객분들이 '사칠'이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 그런데 겨울님을 비롯해서 관객 분들 후기를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사칠이 끝났으니까요,
저와 관객님들과는 무관하게 정원이도 이 비극에서 조금은 해방되면 어떨까, 하고요...
그래서 기획님과 다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극 이후의 정원이가 '아직은 살아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물론, 마음의 병이 한 번에 치유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우울증이나 심적인 고통이 그렇지요. 저 또한 언젠가 심하게 앓아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괜찮아도 또 내일은 마음이 흔들리고 폭풍처럼 요동치더라고요. 정원이가 오늘은 조금 괜찮아져도 다시 내일은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7:3 혹은 8:2의 확률이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요.
정원이가 적어도 2022년까지는 살아 있으니까요.
소방관들이 1계급 특진하는 게 순직 말고 또 없는가? 아주 드물지만, 있습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지요. 산재가 인정되고 그 공로 또한 인정되어 1계급 특진, 명예롭게 은퇴를 하는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극소수입니다. 사실 저도 풍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말씀드렸지요? 안정원의 결말은 열려있지만, 창작진과 기획팀은 이미 정해놓고 시작을 했다고. 당시 관련 조례, 법령, 산재 시 인정된 소방 공무원들을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현실은 여전히 더 비참하다는 것과 순직률보다 자살률이 더 높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산재를 인정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작품 집필 초창기부터 안정원이 순직했을 확률 99퍼센트. 그렇다고 해서 단 1퍼센트의 확률로 희망을, 아주 작은 따뜻함의 여지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저와 기획님이 계속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나온 결론. 그래, 좋아. 대한민국에 그런 도시는 없나? 안정원이 살아있다는 확률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근거.
... 없어?
없으면 그런 도시를 만들자. 원척시라고.
그 도시는 5:5의 확률로 소방관들의 산재 인정, 순직에 대한 대립과 의견이 팽배한 도시이다. 인구는 50만이 조금 안 되며 산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관광지로도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다. 도심은 재개발, 택지 개발이 붐을 이루고 있어 신도시와 구도시의 지역차 불균형이 심하다. 원척 소방서는 남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에 가면 봉산동이라고 있는데 그곳에는 사칠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원척 도서관'이 있다. 현재 안정원은 원척 소방서 내에서도 초유의 관심사이다. 동료들을 비롯한 이들은 안정원을 산재 인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때문에 그를 내근직에 배치하고 그가 사고?를 치지 못하게 일종의 감시? 중이다. 특히 상황실의 박X희 실장이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다. 의무소방원 시절, 안정원은 수방이 되고 나서 상황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박X희 실장과 상황실 직원들은 안정원과 좋은 추억이 많이 있다. 하긴, 이뿐 만일까? 원척 소방서 직원 상다수가 안정원과 강이준의 의무소방원 시절을 지켜보았고, 같이 출동을 나갔다... 이하 중략/원척시 도시 설정
이제 안정원이 순직할 확률 99퍼센트에서... 적어도 2프로나 3프로는 살아있을 여지가 남겨졌다.
물론, 우리들은 이미 정원이의 결말을 정했고, 그건 여전히 유효하며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정원이에게.
딱 2022년까지 만이야. 그 후론 나도 몰라.
지금은 2023년이고 네가 나쁜 생각을 해서 '지금' 세상에 없다고 해도 난 이제 관여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죽지 말고 잘 살아. 이제 정말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나 말고 관객들에게 감사해.
난 진짜 2018년이 일기의 끝이고, 열린 결말이었어.
너의 모습, 너의 이야기를 보며 같이 웃어주고 울어준 분들이야.
그분들이 희망을 줬어...
나도 처음으로 관객들의 반응과 후기를 보며...
내 나름대로 관객분들과 너에게 '사칠'이라고 대답한 거 같아.
그리고 나와 기획님은 초창기부터 대비했던...
가상의 도시 프로젝트를 이제 발동시킨 것뿐이야.
네가 살아있다면, 산재가 인정되고 명예롭게 은퇴했다면
나도 기획님도, 그리고 관객 분들도 납득할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물론... 감사한 마음이 있어.
그냥... 네가 2022년까지 잘 견뎌줘서 고마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창작진이 정한 결말은 바뀌지 않아.
다만 그 시간이 2022년으로 늘어난 것뿐이야.
나머지는 너한테 달린 거 같아.
마지막으로 정원아, 나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그리고 사칠을 본 모든 사람들이 2023년 '현재'를 잘 살고 있는 거 같아.
물론,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 세상에는 확신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정말 많아.
오늘과 현재의 일들은 이제 안정원 너한테 맡길게.
2023년에는 조금만이라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니 나쁜 생각 말고...
이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8년 이후부터 너의 일기를 쓸 때는.. 나도 울면서 썼어...
사실은, 더 많은 내용과 이야기들을 썼었는데요. 지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ㅠㅠ
아... 벌써 현기증이...ㅠㅠ
잘 피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글 쓰는 것과는 달리 말은 버벅거려서요.
아, 다들 '작가등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웃어넘겼는데...
...봤지? 정원아. ㅠㅠ
이렇게 확신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일들이 생긴다니까...
그러니까 우리 힘내자.
그리고 관객분들. 진짜 떨고 버벅거려도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그럼 18일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