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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Jan 08. 2024

만나분식

우리 엄마의 고향은 전주다. 엄마의 친구를 이모라고 부르는데 엄마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마치 고해소나 해우소처럼 엄마의 포근한 말을 들으면 치유가 되는 게 있고 지혜로운 식견과 예지력이 있어서 친구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건다. 엄마의 전화통은 성당 자매님들과 친구들의 전화로 언제나 불이 난다.


얼마 전 신문 기사를 읽다가 “만나 분식” 이 이제 그만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만나 분식과의 인연은 중학생 때부터이다. 중학교 때 친구와 학교 끝나고 가서 먹던 만나분식.

고등학교 때는 친구와 만화책을 빌려서 먹던 만나분식

대학교 때도 종종 추억에 젖어 갔었다.

그러다가 대학원 때는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이 되었으나, 생활비를 벌려고

했던 학원 아르바이트.

아이들 논술 수업이 끝나면 대치동의 헌책방에 가서 책들을 좀 고르다가,

배가 고파지면 만나분식에 갔다. 

뻥튀기 아이스크림, 뭉근한 국물의 밀가루 떡볶이와 순대를 섞어 세모난 오뎅이 들어간 국물까지

넉넉히 주시는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

오징어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걸 좋아했다. 계란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떡볶이 국물에

숟가락을 퍽퍽 찍어 찐계란까지 뽀사 먹어야 떡볶이를 먹은 것이었다.


“엄마, 만나 분식이 문 닫는대. 얼마 전에 이모랑 만나고 떡볶이를 가져왔잖아?”

“그집? 네가 맛있다던?”

“응, 추억의 집. 만나분식.”

“왜?”

“사장님이 아프시대.”

“……”

“이모한테 말해 줘.”


우리 엄마 친구 중에는 희극적인 유쾌한 벗님이 있다. 그 이모는 이름을 두 번 바꿨는데,

난 어릴 적불렀던 이모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모는 지금 무대에 오른다. 시니어 뮤지컬 배우이기도 하고 오페라 가수이기도 하고 연극 배우이기도 한데… 고희가 되어서 새로 찾은 인생, 꿈이다.

엄마는 이모가 부르면 꽃다발을 사가지고 동네 구민회관으로 가신다.


내 생일과 비슷한 이모는 내가 봐도 찰리채플린 같다.

이모를 생각하면 ㅋㅋㅋㅋ 웃음이 나온다. (사실 ㅋㅋㅋㅋ 가 아니고 푸핫. )


이모는 오랫동안 대안학교 선생님이었다가 학원 원장님을 하셨다.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서도 많이 끌려가셨다고 하셨다.

학원일을 하며 선생님들 간의 싸움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성공한 학생들이 자주 선생님을 찾는다고도 하고.


이모의 사연을 들으며… 세상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이모는 약간 손오공처럼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다니는데… 호호호 할매가 된 우리 엄마와는

에너지 적으로 다르다. 이모는 농담인듯 진담인듯 우리 남편 언제 죽나하고 긴 세월

애증을 풀어놓지만, 짝꿍을 잃은 엄마는 고생한 이모를 안쓰러워하지만, 남편에게 잘해라 라며

훈계한다. 인생은 떫은 맛, 그 떫은 맛도 사랑의 맛이 있다.


“문 닫기 전에 가 보면 좋을 텐데… 너무 아쉽다. 코끝이 매워지려고 해.” (나)

“갈래? (언니)”

“아니, 아쉽지만. 마음에 담을래.” (나 귀찮아서 긴 줄 예상)


엄마는 찰리채플린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모는 엄마에게 나오라고 했지만.

(엄마는 장롱면허, 이모는 운전을 잘 해서 엄마를 픽업한다고 했으나.)

엄마는 집에 있겠다고 해서.

결국 이모 혼자 만나 분식에 가셨고,

사람들의 길고 긴 줄을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했다고 했다.

“ㅇ ㄴ 아, 네 덕분에 나 인터뷰까지 했다. 사장님은 우리 애들 때부터 잘 알지.

학원에선 떡볶이 배달을 시켰고. 너무 아쉬워. 줄이 너무 길다. 마음이 그래.”


이모는 은마 아파트에 오랫동안 살았다. 우리 남편 언제 죽나의 애증의 깊은 원한에는

살기 힘들어져서 아파트를 내 놓아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모의 자식들은 이모를 닮아 아주 훌륭하게 잘 컸다.

가끔 이모의 손자 손녀들에게 우리집에 소포로 온 동화책과 동시집을 준다.

만나 분식.

맛있어서 만나인 줄 알았는데.

또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아무 생각없이 깔깔깔 웃으며 먹던 푸짐하고 달콤한 떡볶이와 오뎅이 그리워

만나 분식인가 보다.

사장님은 성인이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배불리 먹이시던 예수님,

건강해지시길 기도하며

그 시절 나와 함께 떡볶이를 먹어주던 친구가 보고 싶다.

복사를 제대로 안해서 파지를 많이 만들었다고

이거 누가 그랬냐고

범인을 잡아내던 그 괴짜 같던 원장님은 여전하실까?

원장님 욕을 하며 선생님과 함께 매운 맛을 음미하던 때도 그리웁고...


그 분 덕분에 다음 회사에 가서 복사를 칼 같이 잘 하게 되었다.


ㅎㅎㅎ


매운 맛이 떫은 맛이 나를 한 뼘 키우고


또 다른 곳의 달콤한 떡볶이가 슬픔을 기쁨으로 위로해 주었다.


만나 분식은 그런 곳이었다.



https://youtu.be/sw9uFA5rNPY?si=atsDyOizjx8mUzTZ


이곳의 원장님은 좋았다.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의 모습도 담아낼 수 있었다.



모자이크 글쓰기 - 낱말 수집가 신문 오리기 아홉살 인생들 (지금은 고등학생이겠구나)



아이들을 만났을 때가 행복했었다. ^^


이 시절 떡볶이를 많이 먹게 했던 원장님은 수업 준비를 타이트하게 해서


아이들 사진은 못찍고 아이들을 기다리며 내 셀카를 남겼던 사진이 한장 있었다.

참 밝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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