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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Feb 22. 2024

첫날엔 항상 여행온 걸 후회한다

2월 22일 우붓에서 방랑이 시작되었다.

2024년은 오랜만에 돌아온 22, 방랑의 해이다. 올해의 테마는 바보이다. 바보는 방랑자다. 내 안에는 방랑소녀가 산다. 역마살을 지닌 방랑 소녀. 간단히 그때그때 올리기 위해 방랑소녀 일지를 기록한다.




2월 22일 무작정 다른 곳에서 눈을 뜨고 싶었다. 여러 날 고민하다가 결국, 발리의 우붓을 선택했다. 우붓에는 장인이나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가면 내가 찾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2일 새벽 진짜 우붓에 도착했다.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던, 초보자라서 헤매느라 겪은 기다림의 시간) 



여행에 와서 새롭게 발견한 것 하나, 첫날엔 항상 여행온 걸 적잖이 후회한다. 이건 홀로 방랑하는 여행에 한해 해당한다. 여행지와 낯가림이 심하다. 그러고 보니 미국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울었고, 네팔 카트만두 첫날엔 무서웠고 다음날 못 나갈 것만큼 두려웠다. 멕시코에서는 의외로 너무 멍하고 익숙해서 실감이 안 났다(예외네. 나의 소울컨츄리였나?) 


그러니까 난 전혀 여행지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얼마간은 고장 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꽤 스스로랑 친해지고 여러 방편으로 달래주고 위로해 주는 법을 알게 되었는데도 이 과정을 생략할 순 없었다. 최대한 아무런 압박 없이 편안하게 해 줬는데도 전체적으로 나는 꽤나 불편해하며 긴장된 채 뚝딱거렸다. 


내 안에 회의주의자가 몇 번 고개를 내밀었는데 별로 귀담아듣진 않았다.




둘째 그럼에도 혼자 있으려고 여행을 왔구나 싶었다. 집에서도 많은 시간 혼자 보냈는데 뭘 또 혼자 있겠다고 발리까지 왔나? 아예 일상의 윤곽을 혼자만의 리듬으로 꽉 채울 수 있는 시간을 내가 그리워하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이젠 거의 부딪칠 일이 없는 Astin과의 일상은 균형이 맞아 들어갔지만 아예 혼자 하는 시간과는 같을 수 없었다. 이 낯설고 불편하고 완전한 고독과 자유가 그리웠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뭘 하고 싶을 때 한다. 온전히 나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서 말이다. 다음 스케줄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 식당을 잘못 골라도 무언가를 잘못 선택해도 괜찮다. 나는 혼자니까. 


맛있는 걸 좋아하고, 가끔은 명확하게 무언가가 먹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여행에 온 나는 식욕이 사라진다. 진짜 배고프지 않으면 많이 먹지 않는다. 나는 많이 걷는다. 우붓이 생각보다 걷기에 좋지 않은 지역인 걸 확인했음에도 나는 아마 오래오래 걸어 다닐 거다. 




셋째 마법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을 때 우연히 찾아온다. 숙소에서 지쳐 낮잠을 잤다. 그냥 쉴까 고민하다가 문득 융님의 우붓 유튜브 영상에 나온 거 하나만 하잔 생각이 들었다. 술 없이 춤추는 의식이 되게 좋아 보였는데 그게 우붓에서 유명한 요가원인 yoga barn 프로그램이었구나. 거기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보는데 1시간 30분 후에 미래의 나를 만나는 명상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 이거다! 이거 일단 들어보자.


음 그곳은 완전 다른 공간처럼 아름답고 신비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선생님 바로 앞 명당자리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명상을 시작했다.(비주얼 명상인 것 같은데 영어이다 보니 한국말만큼 그려지진 않았다) 교실 안 앞 통창 전경은... 와... 그러고 보니 멕시코 실라트라랑 우붓이랑 많이 닮았다. 거기서도 기쁜 일이 많았지.  시작 순간 미친 듯이 비가 쏟아졌다. 번개도 치고. 


미래의 나를 만났는데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녀는 내게 아무 미래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거기 있었고 날 보고 웃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날 안아줬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런데 그럴 줄 알았어. 왜냐하면 20년 전에 내게 나 역시 그 애가 궁금해하는 건 하나도 대답해 줄 수 없다. 말해줄 수 없어. 네가 직접 살아봐야 해. 한 가지 확실한 건 넌 잘할 수 있어. 넌 내가 된다는 거야. 용기를 내. 두려워하지 마. 사랑해. 그게 그녀가 또 내가 방랑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고 아무것도 못 봤는데 이런 생각에 도달했다. 여행은 잊어. 여길 다 느끼려는, 여행자가 되겠다는 욕심도 잊어.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책 읽고 싶다면 읽고, 글 쓰고 싶다면 써. 하고 싶으면 지금 해. 그냥 너 해. 지금 여기라서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아 그러게. 이 제약은 누가 만든 거지? 


피곤하다. 집에 가서 얼른 씻고 푹 쉬자. 지금 몸이 지쳐있는 것 같아. 그래- 


수업이 끝나고 여전히 비가 내려 우산을 한국에서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좀 고민하다가 점퍼를 입고 길을 나섰는데 세 발자국쯤 가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살짝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되돌아가다가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작은 커피숍에 들어갔다. 'Fortune Espresso' 세 잎클로버가 그려진 카페, fortune이면 네 잎클로버야 하는 거 아닌가? 



희미한 담배냄새, 에어컨도 대신 천장 팬, 살짝 높은 습도, 작은 탁자와 소파, 인도네시아풍 노래, 아마 이성적이라면 절대로 들어오지 않았을 곳.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따뜻한 라테와 맛있어 보이는 아몬드 크로와상을 저녁으로 주문했다. 천천히 지나가는 사람들과 오토바이를 구경하며 커피를 마셨다. 다소 시크해 보이고 왠지 말 걸면 안 될 것 같던 자연스럽고 헐렁해 보이는 소년의 라테 아트 솜씨는 꽤 훌륭했다. 빵도 맛있었고 커피도 맛있었다. 힝- 행복 충전. 소년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더 크게 불러줬으면 좋겠다. 속으로 생각했다.


카페가 귀엽다. 계산을 하며 혹시 사장님이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대답했다. 소년은 웃으며 클로버 모양의 스탬프를 쿠폰에 찍어줬다. 10번 찍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공짜.



그리고 나온 거리는 모든 게 달라졌다. 하루 만에 나는 내가 그리워했던, 일상이 적응되어야 작동하는 내가 됐다.(소울 필터 온!) 커피를 먹은 덕에 노을을 봤다. 하늘에 감탄해서 천천히 내 속도로 사진과 영상을 찍었다. 걷는 내내 신기하고 아름다운 게 잔뜩 있었다. 아침부터 아름다운 건 잔뜩 있었다. 


아, 낯가린 시간이 많이 줄었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적응 시간이 세 잎클로버의 힘인지 명상의 힘인지 마법의 힘인지 우붓의 힘인지 엄청 줄어들었다.


과거 방랑소녀는 아주 잠깐 자신을 잊고 내내 자신을 찾고 발견하는 여행을 즐겼다. 현재 방랑소녀는 자신을 찾고 발견하는 동시에 누군가와 시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엔 자신을 잊는다. 그 시간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더 아름답고 멋진 방랑을 하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우붓에서 만난 모든 것들, 모든 사람들, 세 잎 클로버 커피도! 

이제 진짜 제대로 방랑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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