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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Nov 23. 2022

'안 돼'가 없는 놀이 세상

모험놀이터에 대한 단상 : 놀이는 허용이다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안 돼'를 외쳤던가.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찍소리 못하면서 어리고 약한 존재들을 향하여.


남의 아이에게는 그래도 조심한다. 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지만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 그래서 나의 무의식이 커피 여과지만큼도 걸러지지 않고 덩어리째 투과되고 만다.


일상에서 훈육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 때리거나 욕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훔치거나... 불교 계율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말 아닌 건 아니라고 가르쳐줘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을 넘어 '안 돼'를 남발하곤 했다.


만약 나보다 큰 사람이 내가 아이에게 한 만큼  '안 된다, 안 된다' 했더라면 우울해지고 짜증이 나고 화를 냈을 것이다. 밥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등등에서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는다면... 으... 어른인 나도 책잡힐 것 투성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부모님의 잔소리에 질려 그분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현실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조심한다고 조심하지만, '허용'의 태도는 후천적으로 길러야 할 덕목이었다.




"오늘 정말 신나겠다!"


모험놀이터에서 만난 아이들의 눈빛이 살아있었다. 자발적으로 상상하고 놀고 뛰고 집중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것!' 아이들과 먼저 이 약속을 하고 놀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모험놀이를 진행하며 아이들을 만나온 선생님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아이들을 지켜봐 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뿅 하고 도와주셨다. 너무 위험할 경우 아이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나누었다. 아이의 놀이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가, 그 모습을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플레이 워커'라고 불리는 어른들은 모험놀이터에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아이들 곁에 머물되, 지시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적절히 지원해준다.


성장을 위해서는 '동료'가 필요하고 '멘토'가 필요하다. 놀이터에서 온 부모님들이 놀이육아 동료였고, 빈둥 플레이 예술가 선생님들이 멘토였다.  



가르치는 업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을 자주 만난다. 교육기관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은 안전에 민감하다. 털끝 하나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그리고 털 끝 하나라도 다쳤을 때 돌아오는 쉽지 않은 절차에 대해 직, 간접적인 고충을 경험했기에, '안 된다'의 태도를 장착하셨다. 이 또한 이해가 된다.


누구라도 다치는 건 싫다. 하지만 다치는 것이 무서워 움직임을 제한한다면, 아이의 영혼이 다치게 된다. 사람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움직이는 존재이고, 아이들은 노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안 다치면서도 모험을 충분히 경험하며 놀기 위해 아래의 상황을 체크하면 좋겠다.


- 묶어놨다가 급하게 풀어놓으면 아이들은 흥분한다. 기분이 너무 'up' 되면 다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평상시 놀이 문화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일상 놀이가 펼쳐지면 좋겠다. 찔끔찔끔 20분씩 말고, 한 번에 2시간 이상은 몰입하면서.


- 약속을 하고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안 돼'라는 말을 가급적 하지 않을 거야, 대신 자기가 하는 행동이 위험한지 괜찮은지 스스로 판단하는 거지. 행동에 대한 결과도 스스로 책임지는 거야. 자, 약속해주겠니?


- 건강한 위험과 진짜 위험을 구별한다. 나무토막에 뾰족한 못이 튀어나와 있다면 이건 '진짜 위험'이다. 플레이 워커인 어른이 제거해줘야 한다. 적당히 오를 수 있고 뛰어내릴 수 있는 나무는 건강한 위험이다. 도전할 수 있도록 놔둔다. 물론 아래에 완충제 역할을 할 무언가를 놔둘 수도 있을 것이다.





모험놀이터를 다녀오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 놀 때 습관적으로 '안 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참았어요"

"정말? 나도 그랬는데..."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우게 되더라고요"

"맞아, 참 대단하시더라..."


나보다 '통제' 쪽으로 더 치우쳐진 남편이 저렇게 느낀다는 것이 놀라웠다. (애들 좀 덜 혼내라 백날천날 잔소리 하기보다 한번 보는 게 낫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 격언이 떠오른 순간^^) 그리고 나도 더더 허용해야겠다는 걸 배웠다.


일상의 모든 시간까지 '허용'을 적용하는 건 하수인 우리에게 어려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놀 때만큼은 '안 돼'가 아닌 '돼'를 말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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