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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Jun 08. 2023

9. 함께 먹고 함께 잔다는 것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생각은 없다. 남편에게 상처는 내가 먼저 줬다. 3년 전쯤이었나. 상처 받은 남편은 집을 나갔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한번씩 집을 나간 셈이다. 나는 집을 나가려고 짐을 싸는 남편을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 사랑은 끝났으니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집을 나가고 나와 강아지 둘만 남았다. 그때까지도 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위’와 ‘현실’을 헷갈리던 사람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져야지. 사랑하지 않으면서 헤어지지 못하는 건 내 나약함 때문이잖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당위’였다. ‘당위’는 옳은 말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 하며 헤어지지 않을 때 가장 큰 불행이 발생한다. 자기의 나약한 모습에 대한 증오가 상대를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때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큰 원수가 된다.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당위’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몰랐던 것은 나의 ‘현실’이었다. 나는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정말 혼자의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 옳은 삶을 안다고 해서 내가 당장 그 옳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위'와 '현실'은 다르다. 그때는 나도 그걸 몰랐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불면증에 시달렸다. 혼자 그 큰 침대에 누우면 심장이 두근거렸고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강아지도 남편의 빈자리를 느꼈는지 내 배 위에 올라가서 자기 시작했다. 혹시 나마저도 어느 날 사라질까봐 불안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일주일을 불면증에 시달리니 일상이 전부다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백수라서 ‘출근시간-퇴근시간’이라는 인위적인 루틴마저 없었다.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고 아무 때나 먹기 시작하니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혼자서는 잠도 못자는 인간이구나.” 그때 알았다. 남편과 함께 하던 일상.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 같이 밥을 먹고 강아지를 산책 시키고 각자 일을 하다가 같이 잠드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사실은 내 삶의 토대였다는 걸. 남편과의 일상은 마치 ‘공기’ 같이 당연한 것이라 없어지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공기’가 사라지자 숨이 막혔다. 그때 스승이 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집필실에 출근만 하라고 말해줬다. 회사를 다니지 않는 나에게 어떻게라도 루틴을 만들어주려고. 그리고 그때 생긴 루틴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폭풍 같은 시기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루틴은 중요하다. 그 루틴이 ‘기쁨’의 루틴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아직도 혼자 잘 때 내 다리 사이에 붙어 자던 강아지의 온기가 생각난다. 7년을 이렇게 잤으니 몸이 기억할 수밖에 없나 보다.


난 혼자서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는 자각. 그 겸손한 자각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인간 별 거 없구나, 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무슨 인문주의의 전사인 냥 비장하게 ‘당위’를 쫒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의 ‘현실’은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 엉망이 된 일상이었다. 실존적 위기에 닥치니 가장 동물적인 본능부터 영향을 받더라. 그때 알았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내가 결혼을 안 하더라도 동거는 권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이제 나는 혼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상태는

되었다. 두 번째 별거를 하면서 사실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잠’이었다. 또 혼자 잠을 못 자서 일상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보다 탄탄하게 일상을 구축해놔서 그런지 밤에 잠을 못자서 삶이 무너지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생각을 한다. 사람은 혼자 자도록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구나. 개들은 무리 생활을 한다. 한 번은 강형욱 훈련사의 방송에서 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호자와 함께 잠을 자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꼭 개를 끌어안고 자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보호자가 침대에서 자면 개가 그 침대 밑에서 자는 걸로 충분하다고 한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개들은 그렇게 자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보호자와 한 공간에 있되 각자의 활동반경은 확보한 채 자는 것. 그걸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인간도 무리동물이니까 말이다.




몸은 얼마나 정직한지. 최근에 오랜만에 몸무게를 쟀다. 1.5키로가 늘어있었다. 왜지? 나는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니 살이 조금이라도 빠졌을 줄 알았다. 실제로 예전에 마음고생을 했을 때는 한 달에 무려 7키로가 빠졌다. 그때 나는 잠만 못 잔 게 아니라 밥도 못 먹었다. 말 그대로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서 한 달을 쥬스나 초콜렛만 먹고 살았다. 그랬더니 살이 7키로가 빠진 것이다. 그때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마음고생의 유일한 순기능은 다이어트”라고 말하곤 했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렇게 힘든데도 살이 빠지니까 기분이 좋구나. 세상에 완벽한 불행은 없나보다’ 라고.


그래서 이번에도 내심 살이 빠질까 생각했다. 그런데 1.5키로가 쪘다니. 그 애매하게 늘어난 체중을 보고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간 내가 먹은 고기들이 생각나서였다. 지난 몇 달간 스승이 그렇게 고기를 많이 사줬다. 이삼 주에 한 번씩은 사준 것 같다. 소고기, 양갈비, 양꼬치, 스테이크. 부잣집 딸내미라고 비싸고 좋은 고기만 골라서 사줬다. 스승은 ‘자발적 자난’이긴 해도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그런데 한 번에 십 몇 만원씩 나오는 고기를 몇 번이나 사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힘들었던 날, 친구가 해줬던 밥상도 생각난다. 소박한 밥상이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엄마 밥’에 별다른 감정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이는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가 해준 밥이 생각난다던데, 나에게는 그런 감성이 없다. 우리 집은 엄마가 맨날 밥을 해준 집이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그날 친구가 해준 밥에서 ‘엄마 밥’의 감성이 이런 거구나를 처음으로 느꼈다. 따뜻한 밥을 먹으면 마음도 따뜻해지더라. 그러고 보니 내가 집을 나온 날 스승이 집에 놀러와 떡볶이를 만들어준 날도 그랬다. 스승이 고춧가루 양 조절을 잘 못해서 엄청나게 매운 떡볶이였는데 그냥 모든 게 웃기고 맛있었다. 따뜻했다. 그날의 밥상들이.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도 아니고, 밥 먹으면서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그 날의 밥상들이 날 살린 느낌이 든다. 마음고생 때문에 못먹은 흔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폭식의 흔적도 아닌 애매한 1.5키로의 살. 그건 따뜻함이 찌운 살인가 보다.


그날의 매운 떡볶이




함께 자고 함께 먹는 것. 삶의 토대가 되는 것은 사실 이처럼 단순한 것 아닐까? 나는 누구와 함께 자고, 누구와 함께 먹고 싶은가? 같이 밥 먹으면 밥맛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같이 밥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잠이 잘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내 소중한 이들이다. 나는 소중한 이들을 소중히 대하며 살고 싶다. 늙어서도 함께 밥을 먹으면 밥맛이 좋고, 함께 잠을 자면 꿀잠자는 이들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이중섭, <춤추는 가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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