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씨네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Nov 07. 2023

내 친구 ‘마히토’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2023)

마히토는 내성적인 소년이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쯤 되어 보이는 나이에 화재 사고로 엄마를 잃는다. 엄마를 구하러 뛰어가는 장면에서 주변에 어른들이 외친다. "마히토는 갈 필요 없어." 마히토는 엄마가 불길에 휩싸인 채 구해달라고 속삭이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마히토는 엄마를 잃은 소년이다.


어느 날 마히토의 아버지가 새로운 엄마를 소개해준다. '이 여자 엄마와 닮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소개에 마히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 여자는 엄마의 여동생, 그러니까 마히토의 이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뒤 어머니의 여동생과 새 살림을 차렸다. 마히토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집에 보내져 함께 살게 된다. 새 엄마, 그러니까 마히토의 이모는 아바지의 아이도 뱄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퇴근 후 집에 와 새 엄마와 와 스킨십을 하는 장면을 보고 화들짝 놀라 방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 마히토는 또 죽은 엄마가 구해달라고 속삭이는 꿈을 꾼다. 하얀 베갯잇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마히토는 새 학교에 갔다. 학교 친구들은 도시에서 전학온 부잣집 도련님을 탐탁찮아 한다. 마히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소년들의 세계는 거칠기만 하다. 마히토는 하교길 논두렁에서 친구들에게 구타를 당한다. 그리고 멍이 든 얼굴로 혼자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는 길, 큰 돌을 주워 머리에 찧는다. 마히토의 오른편 관자놀이에 피가 흐른다. 집의 도우미 할머니들은 마히토의 상처를 보고 소란을 핀다. 새엄마 나츠코도 놀라 마히토에게 안정을 취하라고 한다. 그후 마히토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와서 "누가 널 괴롭혔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선생님에게 바로 말하겠다"고 몇번을 얼러도 "그냥 넘어져서 다친 것"이라고 말한다. 마히토의 아버지 소타로는 마히토를 아끼지만 그 방식이 어딘가 많이 무디고 거칠다. 그 시대 호탕한 아버지의 전형 같다. 그런 호탕한 아버지는 내성적인 아들의 상처를 섬세하게 읽어내지 못한다. 마히토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자기 손으로 상처를 더 낸다. 그리고 그 상처에 붕대를 붙인다. 그것이 나중에 마히토가 말하는 자신의 '악의'다.



마히토는 세상에 마음을 닫는다. 아버지도 새엄마도 친구들도 누구 하나 마히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히토를 아버지는 헤아리지 못한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 여자가 아버지의 아이를 뱄다는 사실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대궐같은 집에 자기 수발을 드는 시중이 몇명씩이나 있지만, 그들 사이에 끼지도 못하고 넓은 집은 늘 어색하기만 하다. 마히토는 세상에 나가지 않기 위해 자기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낸다. 그리고 그 상처가 곪아 앓아 눕는다. 어느 날 방 안에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왜가리가 날아들 때까지.


왜가리는 무엇일까? 마히토의 욕망이다. 왜가리는 끊임없이 마히토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깃을 활짝 펴고 마히토를 공격할듯 스치며 계속 마히토의 관심을 끈다. 마히토가 활을 만들어 연못에서 왜가리를 대면했을 때, 갑자기 마히토의 온 몸을 두꺼비 떼가 둘러싼다. 나는 그것이 마히토의 욕망처럼 보였다. 내성적인 소년의 마음에 생긴 들끓는 욕망. 왜가리는 마히토를 더욱 유혹한다. 마히토에게 죽은 엄마를 보러가자고 한다. 마히토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힘들게 숲을 지나 탑에 들어가 왜가리가 이끈 대로 가서 소파에 누워있는 엄마를 만난다. 하지만 마히토가 엄마에게 손을 대자마자 엄마는 녹아내린다. 그것은 왜가리가 마히토를 꼬드기기 위해 물로 엄마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흥분한 마히토는 왜가리에게 활을 쏴 왜가리의 부리를 관통시킨다. 그러자 불사조처럼 멋진 모습을 하고 있던 왜가리가 갑자기 쪼그라들더니 새 모양 옷을 입고 있는 볼품 없는 아저씨가 된다. 난 그 장면이 꼭 마히토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엄마를 되찾고 싶은 욕망. 소년은 그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드글거리는 욕망에 시달리게 되는가. 소년에게 그 아련한 욕망을 충족시켜주겠다는, 그러니까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유혹은 거대한 날개를 가진 새처럼 매혹적이기만 하다. 하지만 그 매혹은 "잃어버린 엄마는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삶의 진실을 마주했을 때 거품처럼 사라진다. 그 매혹의 거품의 깨진 자리에는 볼품 없는 아저씨의 모습을 한 욕망의 진짜 모습이 남는다. 이제 마히토는 어떻게 할 것인가?


허상이 걷힌 욕망의 본 모습은 볼품없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욕망이 때로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마히토는 탑의 주인인 할아버지에 이끌려 이세계로 간다. 그곳에서 키리코를 만난다. 키리코는 마히토의 상처를 보고 자신도 같은 곳에 상처가 있다며 두건을 벗어 보여준다. 반창고로 상처를 가리고 다니던 마히토는 그때부터 반창고를 뗀다. 마히토의 오른쪽 귀 위에 자기가 스스로 돌로 내려찍은 상처가 그대로 보인다.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소년 마히토는 키리코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생선의 배를 칼로 가르기도 하고, 이세계의 영혼 와라와라가 하늘로 올라가 현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마히토의 모험에서 소년의 성장이 느껴졌다. 마히토는 어떻게 이세계로 갈 수 있었을까? '죽은 엄마를 되찾고 싶다'는 어린 소년의 퇴행적인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 때문에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활을 챙기고 숲을 건너 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욕망은 생각보다 매혹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욕망이 정말 순수히 물거품만인 것도 아니었다. 그 욕망은 볼품없는 왜가리 아저씨의 모습으로 돌아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히토를 돕는 무기가 된다. 왜가리 아저씨는 멋진 불사조의 모습일 때처럼 압도적이진 않지만, 작은 날개로 파닥이며 마히토를 구하고, 마히토에게 이런저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해준다. 죽은 엄마를 되찾고 싶다는 소년의 헛된 마음은 소년을 새로운 세계로 내보내주는 첫번째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헛된 욕망이라는 걸 깨닫게 된 후에도 소년의 곁에 남아 소년이 세상을 모험할 때 필요한 무기가 되어준다.


마히토는 이세계에서 불의 소녀 히미를 만난다. 히미는 마히토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했던 마히토의 엄마다. 하지만 그녀는 마히토의 엄마이지만,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히미는 마히토가 자신의 미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히미가 마히토를 끌어안는 장면은 엄마가 아들을 안는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한 소녀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안는 느낌이다. 그녀는 마히토가 꿈에서 보던 죽은 엄마도 아니고, 왜가리가 물로 만든 가짜 엄마도 아니다. 마히토의 엄마는 불 속으로 사라졌지만, 히미는 불에서 나와 마히토에게 손을 내민다. 히미는 마히토의 엄마이지만 엄마가 아니고, 엄마가 아니지만 엄마인 존재다.


마히토의 엄마가 ‘퇴행’의 상징이라면, 히미는 ‘생성’의 상징이다.


마히토는 히미와 함께 나츠코를 구하러 간다. 마히토의 새엄마이자 히미의 여동생인 나츠코는 마히토를 구하려다가 마히토와 함께 이세계로 빨려들어와 버렸다. 이세계의 시민인 앵무새들은 나츠코가 탑에서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세계에서 산실에 들어가는 것은 금기다. 마히토는 그 금기를 깨고 탑 지하에 있는 나츠코의 산실에 들어간다. 탑의 돌과 나츠코 산실에 있는 종이들이 극심히 동요하며 마히토를 막는다. 마히토는 나츠코에게 함께 현세계에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자 나츠코가 처음 보여주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네가 싫다"고 한다. 마히토는 그런 나츠코에게 처음으로 "어머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돌과 종이들의 힘에 밀려 산실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나는 그 장면이 기괴하면서도 좋았다. 그 산실은 사실 마히토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을까?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금기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그래서 그 여자가 자신의 새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죽은 엄마를 아직 잊지 못한 마히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분열을 상징한다. 이세계 사람들이 마히토에게 나츠코가 누구냐고 물을 때마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나츠코'는 산실에 들어온 마히토에게 '난 네가 싫어!'라고 외친다. 사실 그건 마히토가 나츠코에게 하고 싶은 말 아니었을까? 현 세계에서 내성적인 소년 마히토는 나츠코에게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갑작스레 새 어머니를 들이고 함께 살게 한 아버지에게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상처를 내어 방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가리에 끌려 모험을 떠나기 전, 마히토는 어머니가 남기고 간 책 한 권을 펼친다. 그 책의 제목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다. 죽은 어머니는 마히토에게 묻고 싶었던 것 아닐까. 죽은 자신을 그리워 하며 평생 스스로를 상처내며 방에 틀어박혀 살지, 아니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세상에 나가 모험하고 친구를 만들며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지 말이다. 마히토는 엄마의 물음에 답한다. 소년은 왜가리의 매혹에 이끌려 이세계에 간다. 그곳에서 키리코를 만나 세상을 헤쳐나갈 씩씩함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 속으로 들어간다. 금기를 마주하러 가는 길, 온갖 마음의 요동이 그를 멈춰세우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가장 큰 어둠 앞에 직면한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 자기 감정과 욕망이 늘 우선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로 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앞에 주어진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대상 '나츠코'를 마주한다. '나츠코'가 말한다. "난 네가 싫어." 마히토는 그때 처음으로 나츠코에게 미소띤 얼굴로 "어머니"라 부른다. 마히토는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산실에서 튕겨져 나온 마히토를 히미가 끌어안는다.


늘 온화하고 예의바른 나츠코는 이때 처음 험한 표정으로 마히토에게 "네가 싫어!"라고 말한다. 그건 사실 마히토가 오랜 시간 마음속에 억눌러왔던 말이 아니었을까.


마히토는 이세계의 신인 큰할아버지를 조우한다.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상징으로 보인다. 이세계는 파괴되기 직전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이세계를 물려받을 것을 권한다. ‘악의’없는 13개의 순수한 돌을 찾았다며 이 돌로 탑을 쌓아 아름다운 새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한다. 자신이 스스로 돌을 찧어 머리에 낸 상처를 보여 주며 이 상처가 자신의 '악의'의 상징이기 때문에 자신은 순수한 돌을 만질 수 없다고 한다. 큰할아버지는 서로 속이고 상처주고 배신하는 현세계로 되돌아갈 것이냐고 다시 묻는다. 그러자 마히토는 자신은 그런 세계에서 왜가리와 키리코, 히미 같은 친구들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이세계는 무너지고 마히토와 히미는 현세계로 가는 문 앞에 선다. 함께 현세계로 돌아가려는 마히토에게 히미는 자신은 다른 시간으로 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너는 죽을 거라고 마히토가 말리자 히미는 너를 낳는 일에 비하면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마히토는 친구이자 엄마 히미의 마음을 받아안고 현세계로 돌아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바뀐 채로 소년은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 소년은 이제 안다. 죽은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잃어버린 엄마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보잘 것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상에 이끌려 세상을 모험하다 보면 소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가 꽁꽁 숨겨놓은 자신의 가장 큰 상처와 어둠을 마주하고, '나 사실 그때 아프고 싫었어'라고 말하는 것만큼 우리 삶에 필요한 용기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이 두려워 피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그 상처로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악의'라는 것을. 하지만 저마다의 '악의'로 스스로 상처낸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마히토의 상처는 키리코가 자신도 비슷한 곳에 상처가 있다고 보여준 순간 치유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상처받고 온 마음에 스스로 상처를 냈던 내 친구 '마히토'도 이제 그만 반창고를 떼어내고 곪아버린 상처에 바람을 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홍상수와 김민희, 사비오와 카실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