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하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우리 약혼할래?”
“약혼? 약혼식을 올리자고?”
사귄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그가 말했다. 아직 ‘약혼’이란 단어도 ‘결혼’이란 단어도 어색하기만 할 때였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결혼을 약속하자고.” 생각해보니 ‘약혼’이란 단어의 원래 뜻은 ‘결혼을 약속하다’였다. “그래, 좋아. 그런데 어떻게 약속해?” “글세, 같이 서약서라도 써볼까?” 어느 햇살 좋은 날 함께 자주 가던 카페에서 둘만의 약혼 서약서를 썼다. 원래는 10계명으로 하려다가 도저히 뺄 문장이 없다며 11계명이 되어버린,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 존중하자”로 시작하여 “늘 사랑하자”라고 끝나는 우리만의 ‘약혼 11계명’이었다. 우리는 그 ‘약혼 11계명’을 각자의 글씨로 써서 서로의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약속했다.
얼마 지나 그에게 왜 약혼을 하자고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널 붙들어놓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당시 그는 이런저런 일로 학업이 늦어져 미국에 돌아가 1년 정도 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기가 미국에 돌아가버리면 혹시라도 너에게 다른 남자가 생길까봐 너무나 불안했다고 했다. 그래서 약혼을 빌미로 다른 남자가 널 채가지 못하도록 단도리를 친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서약서를 쓸 때, 그는 나에게 반지를 주면서 이건 커플링이 아니라 약혼반지이니 누가 물어보면 꼭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에이, 누가 채가~”라고 말하면서도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로 붙들고, 붙들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는 결혼을 ‘약속’할 것이 아니라 결혼을 했어야 했다. 결혼이 무엇인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 아닌가? 그러니 약혼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약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왜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약속’했던 걸까? 비겁해서였다. 당시 우리는 분명 서로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약혼조차 하지 않았을 테다. 서로 함께 하고 싶었기에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 마치 이산가족이 된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서로 함께 하고 싶었기에 화면을 통해서라도 함께 하려고 하루종일 영상통화하는 시간만 기다렸다. 오죽 했으면 그 당시 나의 가장 큰 소원이 “제발 얼굴 보고 밥 한끼만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였다. 그를 배웅하러 공항에 간 날 두 눈이 퉁퉁 불도록 울었던 게 기억난다. 그를 보내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길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쓸쓸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와 함께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저 함께하자는 ‘약속’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였다면 미국에 따라갔을 것이다. 따라가는 데 결혼이 필요하다면 결혼하고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고려사항조차 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성인이었지만 부모의 자장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어린애 상태였다. 그러니 부모가 허락하지도 않은 남자친구와 함께하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도 못했다. 스물여섯 살은 아직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라 생각했으니까. 아니 더 정직히 말하면, 아직 이른 나이이기에 더 좋은 남자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그도 나와 함께하고 싶지만, 일단 학업은 마쳐야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 역시 스물여섯 살은 아직 결혼하기엔 이른 나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하자’는 약속만 약속한 채, 지금 당장 함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서로 함께 하고픈 마음이 거기까지였다는 걸 이미 알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서로 함께 하고픈 마음이 부모와 사회의 시선을 넘을 정도로 간절했다면,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할 필요도 없이 이미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함께 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때 내가 미국에 따라갔다면, 만일 그때 그가 한국에 돌아왔다면, 우리는 서로 떨어져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마음을 ‘약속’ 대신 따뜻한 눈물과 미소로 가득 채울 수 있었을 테다. 내가 그와 함께하기 위해 미국 공항에 내린 순간, 그리고 그가 나와 함께하기 위해 한국 공항에 내린 순간, 우리는 서로 함께 하고픈 마음이 이렇게나 간절하다는 걸 온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의 사랑은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삶으로 확증하지 못한 채 언젠가 함께 하자는 ‘약속’ 뒤로 숨어버렸다. 그때부터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약속’은 기묘한 기능을 한다.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약속을 하는데, 약속을 하는 순간 마음이 변하게 된다. 우리의 '약혼' 역시 그랬다. 1년 뒤 그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얼굴 보고 밥 먹는 게 소원이었던 나는 실컷 소원 성취를 했다. 그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못다한 정도 나눴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학업을 마쳤고, 그래서 내가 미국에 따라갈 일도 없는데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결혼을 할 것이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결혼할 사이이니 지금 결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우리는 약혼을 한 지 5년 뒤에 결혼을 했다. 서로 간절히 함께 하고 싶어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서른이 넘자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도 결혼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지금이 결혼 적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다른 남자가 생길까봐 황급히 약혼을 청했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급해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결혼 앞에서 조금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얘랑 결혼할 거긴 하지만 지금 당장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별로 관심도 없는 프로포즈 이벤트까지 그에게 무언의 압박을 넣어서 받아냈다. ‘이미 5년 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에 왠 프로포즈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나와 간절히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받아낸 마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 억지로 마음을 받아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많이 식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직면했어야 했다. 우리의 결혼 적령기는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스물여섯 살 때였으며, 그때 우리는 함께 하지 않고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해버렸기에 결혼 적령기를 놓쳐버렸다는 걸, 그때부터 우리의 사랑은 깊어지지 못하고 점점 식어갔다는 걸 있는 그대로 직면했어야 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다 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동사무소에 뛰어가서 혼인 신고를 했다. 그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식었음을 직면하진 못했지만 직감하긴 했던 것 같다. 그와의 관계에서 결핍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더더욱 ‘약속’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혼인 신고가 무엇인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국가에 공증받는 일 아닌가? 정말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할 필요가 없듯이, 정말로 함께 하자는 약속이 굳건하면 그 약속을 타인에게 공증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때 나는 우리의 약속을 빨리 법적으로 공증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다. 혼인 신고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주민등록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다. 내 이름 옆에 ‘배우자’로 그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졸업을 하거나 취직을 했을 때처럼 성인의 통과의례 하나를 더 해냈다는 뿌듯함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는 이제 영원히 혼자 될 일은 없겠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그 서류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걸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날 그 뿌듯했던 마음이 전혀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알게 되었다. 8년 뒤 우리는 다시 동사무소에 가서 이혼 신고를 했다. 이제 나의 이름 옆에는 그의 이름이 줄이 쭉 쳐진 채 찍혀 있었다. 그 줄을 보며 난 우리의 약속이 얼마나 공허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할 게 아니라 함께 했어야 했다. 함께 하자는 약속을 공증받을 게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결코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점점 결혼의 ‘약속’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늘어났다. 스물여섯 살에 그의 친구가 만들어주었던 소박한 약혼 반지는, 다이아가 박힌 결혼 반지로 바뀌어 있었다. 카페에서 둘이 손글씨로 써서 지갑에 넣고 다녔던 ‘약혼 서약서’는, 언제 어디에서든 인터넷으로 발급받을 수 있는 혼인신고서와 가족관계증명서로 대체되었다. 핸드폰에 있던 자연스러운 커플 사진들은 무언가 웅장하고 비장한 결혼 사진들로 대체되어 거실과 안방, 카톡 프로필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었다. 내가 결혼을 준비할 때 가장 공들였던 것이 나무로 만든 원앙 조각 한 쌍이었다. 전통혼례를 할 때 필요하다고 해서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이상하게 집착이 생겨 결국 조각가에 의뢰해서 직접 만든 물건이었다. 나는 그 원앙 조각을 우리와 동일시했던 것 같다. 함께 살 때는 그 조각을 늘 거실 한 가운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놔뒀었다. 이사를 갈 때는 그 조각을 어디에 둘지 제일 먼저 생각했고, 그리 깔끔한 성격도 아니면서 그 조각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늘 마른 헝겊으로 닦곤 했다. 심지어 그 조각은 고개가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나는 우리의 관계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그 두 원앙의 고개를 움직이곤 했다. 지금은 이 각도로 서로를 쳐다보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면서. 이혼을 하고 짐을 싸러가던 날, 남편에게 그 원앙 조각은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서로 완벽한 각도로 쳐다보고 있는 그 원앙 조각이 그때는 그저 한스럽게만 느껴졌다. 그 원앙 조각을 이사박스 제일 위에 던져 놓았다. 다른 짐들과 섞여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두 원앙 조각을 그때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며 그 원앙 조각을 다시 꺼내보았다. 이혼을 할 때 그와 관련된 물건들은 모두 한 박스에 넣어 장롱 한 구석에 보관해놓았었다. 먼지가 묻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 왠지 생기 없어 보이는 그 원앙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조각으로 시작해서 이 조각이 남은 거구나.” 마치 우리의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내 이름 옆, 줄 쳐진 네 이름’으로 영원히 남는 것처럼. 나는 그걸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영원을 꿈꾸었던 나의 순진한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볼 때마다 시니컬해졌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넌 뭘 믿고 그리 순진하게 영원을 꿈꾸었던 것이냐고. 나의 지난 날의 어리석음이 귀엽고 애달파 보이지 않고 그저 멍청하고 한심해보였다. 관계를 지키지 못해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더 많은 약속과 상징에 기댔던 내가 그저 멍청하고 한심해보였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약속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너의 이름은 내 이름 옆에 영원히 줄 쳐진 채 새겨져 있을 테니까. 우리의 시간은 다시 시작될 수는 없어도 영원히 고이 접힌 채 마음 한 구석에 새겨져 있을 테니까. 박스에서 원앙 조각을 들어올리자 비장한 글씨로 쓰여진 ‘약혼 11계명’이 보였다. “이런 쓰나마나 한 이야기를 그렇게 소중히 지니고 다녔다니.” 그때의 내가 처음으로 귀여워 보였다. 이제 나는 영원을 꿈꾸던 한 순진한 소녀를 조금은 더 어여삐 보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약속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말한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일이다. 나는 약속을 하지 않고 스승을 보러 갔다.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조금 있다가 집에 오려고 했다. 스승은 있었다. 오늘 크리스마스인데 내가 올지 몰랐다고 하며.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함께하는 친구도 왔다. 그 친구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온 것이었다. 우리는 대체 크리스마스에 왜 이곳에 다 모인 거냐며 깔깔대며 웃었다. 그날 우리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고 만나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다. 그것은 약속을 하지 않고 만났기에 더욱 근사한 저녁 식사였다.
그날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를 만나러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고 일단 가는 사람. 네가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고, 네가 오지 않는다면 다음에 또 약속 없이 널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었다. 이혼을 한 뒤,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고만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정말로 없으니까.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약속하지 않은 채 약속하는 것’이다.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함께 하는 '순간'들이 모여 비로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을 할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함께 하는 순간에 함께 하면 되니까.
더 이상 '영원'을 보느라 '순간'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싶진 않다. 우리의 '조각상'을 아끼느라 ‘우리'를 아끼지 못하는 삶도 살고 싶지 않다. 함께 하자는 '약속'을 보느라 지금 함께 하지 않는 삶도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순간'을 쌓아가고 싶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바랬던 '영원'에 가닿는 유일한 길이라는 걸 이제 알았으니까. 언젠가 뜨거웠던 '순간'을 함께했던 그에게 말하고 싶다. "함께해야 할 때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 뜨거운 '순간'을 함께할 '그'에게 말하고 싶다. "함께해야 할 때 함께할께." 나는 이제 소중한 순간을 소중히 지키고 싶다. 그렇게 이번엔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켜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