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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Sooha Oct 23. 2020

0. 기록의 이유

다소 힘든 시절의 기억은 그 시기가 한참 지난 뒤에야 제대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제아무리 똑똑할지라도 고통으로 정의되는 시간 속에 거주하는 한 거듭되는 상황과 되풀이되는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고 뿌연 안개 한가운데를 걷는 기분이 들면 얼른 이 시기를 종결하고 싶은 마음에 자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가늠해본다.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연장선을 긋고 있는지 판단을 내릴 때마다 답은 달라진다. 인생은 나선이라는 영화의 대사처럼 나의 삶도 나선형으로 흐르는 탓이다.


언제고 같은 지점에 선 듯 보여도 같은 위치, 제자리, 도로 원점으로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고 한 바퀴를 걸어 다른 높이에 서서 조금 다른 풍경을 보고 미묘한 차이를 느끼며 순간에 부합하는 대답을 해왔다. 매일 오늘을 살지만 또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여 여느 때처럼 던진 질문에 다시 가장 낮고 어두운 곳으로 돌아왔다는 답을 했다. 그리고 같은 대답을 했던 수많은 날을 기억하며 다음의 절망을 위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생의 주기, 인생의 기복, 삶의 리듬, 나선. 사람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감정과 한 인간의 생애와 자연의 섭리까지 명암의 순환을 따른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울증도 나선을 걷는다. 그 나선을 따르며 바라본 풍경과 걸음을 기록해둔다면 원점의 날이 돌아와도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 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영화「리틀 포레스트: 봄」_엄마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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