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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Sooha Dec 25. 2020

6. 평범한 기분

기념할 일이 생겨 꼭 글로 남겨야 한다. 슈퍼 핑크문이 뜨는 밤이라서? 게다가 내일은 어머니 생신이기 때문에? 그런 건 삶의 단편적인 기쁨일 따름이다. 하지만 7일 밤이나 8일 새벽에 이 글을 보는 분이 계신다면 즉시 하늘을 올려다보길. 하얀 보름달이 떴다. 까만 하늘에 무척 환하고 아름다운 달이 떠 있으니 풍류를 즐기던 옛 선비처럼 한밤의 정취를 느끼기 좋은 날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달을 보려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항상 나의 글을 읽어주는 몇몇 분들과 혹시라도 우연히 이 글을 읽었을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떤 기분을 느꼈나요?" 아마 제각기 다른 답을 내어놓겠지. 누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기분이 없어요.'라고 대답할 것 같다. 기분이 없다니. 기분이 없다는 게 가능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비유적인 표현처럼 뜻을 숨기고 있다고 추측할지도 모른다.

구정인 작가의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는 책이 있다. 나처럼 우울증을 앓았다거나 그와 비슷한 시간을 걸어온 사람은 알겠지만 감정이 극한에 치달으면 모든 것이 고통으로 전환되거나 진공 상태에 빠진다. 후자가 기분이 없는 상태로 무감한, 무감각한 이라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의 한계를 넘어버려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번아웃, 몸살처럼 우리 몸이 아프면 작동을 멈추듯 마음도 아프면 멈춰버린다. 그럼 감정을 비롯하여 감각마저 무뎌진다. 커튼 뒤에서 사물을 보는 것처럼, 뿌연 막이 낀 듯 눈이 흐리고, 귀가 먹먹하거나 마취제를 맞은 듯 촉각과 미각마저 둔하다. 그럼 현실감이 떨어지고 비현실감, 이인증에 이르게 된다. 길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마음이 터져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내겐 이런 날이 참 많았다. 너무 길었다.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기분이 없는 기분이 소름 끼치도록 나에게 녹아있었다.

그렇지만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현실에 발을 붙이고 분리된 자아가 나에게 흡수되며 감당하기 어려웠던 비현실감과 이인증에서 벗어났다. 어떠한 벽이나 거름망 없이 진짜 현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잃었던 감각이 돌아왔다. 덕분에 무채색이었던 감정의 스펙트럼에 색이 생겨났고 지금은 그림판의 수십 가지 색을 넘어설 만큼 다양한 색들이 피어나고 있다. 매일같이 새로운 감정, 기분을 만난다. 미묘하게 다른 채도의, 미세하게 다른 색을 추가하는 즐거움에 빠져있다.

까만, 때론 회색의 세상에 불쑥 보통의 날이 생겼다. 그리고 차츰 많아졌다. 2019년 1월 1일부터 하루의 끝에 그날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감정 일기의 일환으로 하루 마음 기록표라 부르며 블로그에 공유해두었다. 작년의 절반 이상은 깊은 우울의 보라색으로 칠해졌는데 올해는 초에 2달을 힘겹게 견뎠더니 3월부터 보통의 초록색이나 안정과 평안의 연두색으로 덮이고 있다.

나에게 보통의 기분이란 우울한 가운데 조금이라도 안정의 기준선에 가까워졌을 때를 뜻했다. 하루 24시간, 심지어 자는 순간까지 온갖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던 탓에 무감한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당연히 기분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수십, 수백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감정 속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얼마큼 느끼는지 확인하고 수시로 어떤 기분인지 점검했다. 알고 싶지 않아도 감정을 점검하는 일을 오래 지속해온 탓에 저절로 알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의 기록을 마음에 모아 밤에 감정들의 합을 매겨보았다. 어떤 감정이 우세했지? 어떤 감정이 물러섰지? 그럼 오늘은 대체로 어떤 기분이었어? 오각형의 그래프처럼 점을 찍어 매일 체크했다.

그런 날들 중 모처럼 무탈하고 무던하게 하루를 보냈거나 드물게 좋은 감정을 유지하면 보통을 상징하는 초록색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마음을 이리저리 더하고 빼고 나누어야 겨우 평균을 찾지 않아도 평균의 일직선이 그어지는 날만 보통의 자격을 수여하였다. 이날을 하나라도 늘려보겠다고 외줄에서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리고 위태롭더라도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마저 힘들어 거의 해내질 못했다.

그랬는데. 어제부터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앞서 말한 기분이 없는 기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로 기분이 없었다. 앞서 말한 무감함은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게 된다. '아무런 기분이 느껴지지 않아. 무감해. 무감각해' 같은 생각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자신이 이질적인 곳에 있었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감각으로 느끼고 만다. 사실 우울증일 땐 항상 그렇다. 1초에 불과한 시간일지라도 생각이 침범하고 감정이 개입되고 기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화살촉과 경쟁하듯 빠른 속도로 변하고 각각은 길게 지속된다.

하지만 어젠 어떠한 감정도 인식되지 않았다. 기분을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았다. 하루 마음 기록표를 작성할 때가 되어서야 오늘이 어땠는지 돌아보았다. 감정의 끈을 붙잡고 살던 날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생각 없이, 감정 없이, 기분 없이 후루룩 지나갔다. 감정의 외줄을 타고 있던 내가 대지를, 그것도 남들이 다 걷는 현실의 땅을 그냥 걷고 있었다.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을 느낄 일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종일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했다.

이런 날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한 하루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평범한 기분을, 어쩌면 나에게 일찍 주어질 수 있었을 하루와 기분을 어제 처음 느꼈고, 오늘 깨달았다. 그리고 내일은 비로소 실감하게 되리라 짐작해본다. 그럼 진짜 건강해졌다고 자부해도 될까. 내일이 돼야 알게 될 테니 이르게 오늘을 배웅해야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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