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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Sooha Dec 25. 2020

8. 무감한 절망


해가 바뀐 뒤로 일기를 쓰지 않는다. 2018년부터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일기를 써왔는데 고작 하루 만에 그만두었다.


손가락 까딱하기 힘든 무기력한 날이 이어진다. 괜찮아질 듯 괜찮아지지 않는다. 거센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는다. 한 줌 쌓을라치면 쓸려 무너지고 다시 한 줌 쌓을라치면 다져놓은 흔적마저 훑어 사라진다.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조그마한 언덕이라도 만들어 보겠다고 흙을 줍는다.

한순간의 실수로, 짜증이 치밀어 어쩌면 고의로 도미노를 무너뜨린 현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 나를 이루는 부분이 연쇄적으로, 끝내 내가 무너진다. 우울이 우울을 부르고 절망으로 부풀며 불행으로 둔갑하여 번진다. 그리고 불행은 불행을 부른다.


그저 멍하다. 무감하고 무기력하다.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는 종이 인형처럼 늘어져 있다. 몸을 일으키는 게 힘들어 며칠째 집 밖을 나서지 못한다. 마음의 체력까지 바닥나 몸이고 마음이고 추를 매단 듯 둔하다. 공기가 무겁다. 이상하리만치 졸리다. 신생아 같다. 예전처럼 피곤해서 씻는 것조차 힘들다. 해가 떠 있을 때 바깥에 나가야 한다는 머릿속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한낮이 지나 깨어나서 저녁 무렵에야 침대를 벗어난다.

밥을 잘 먹지 못한다. 느릿느릿 씹어도 맛이 없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산책을 나가지 못해서 그런 걸까. 해가 진 후 가끔 군것질을 사러 가 질 나쁜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워보지만 어느 음식이든 똑같이 질겅거리게 된다. 식감만 다른 고무를 씹는 것 같다. 작년 12월부터 몸통 중앙에 꽉 막힌 듯한 체증이 사라지질 않는다. 뭘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얹힌 것처럼 불쾌한 통증이 느껴진다.


1월 초에 세운 결심은 2주가 지날 무렵 포기했다. 지금의 내겐 불가능하다. 계획적으로 생활하겠다는 망발을 12월 31일의 내가 했다니. 지금의 난 도저히 할 수 없다. 그야 1월 1일부터 장렬히 실패했으니까.


12시간씩 휴대폰을 본다. 보고 있다기보다 화면을 켜놓고 넋을 빼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다. 애당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자는 시간 외엔 누워서 빈 화면만 들여다본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었다고 말하기엔 고통과 절망 언저리에 붕 떠 있는 감각이 사실적이다.

내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모조리 버리고 있다. 시간은 나를 통과해서 쓱 지나쳐버린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시간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나를 허비하고 있다. 어제가 끝없이 연장된다. 매일 눈을 뜸과 동시에 다시 잘해보자는 작은 다짐이 무너진다. 내가 언제를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이 하루가 언제부터 이어져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 꿈을 꾸지만 현실은 똑같다. 수월하고 평탄하게 사는 나를 막연하게 그려보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도 나는 여기에 누워있을 뿐이다. 가끔 몸을 옆으로 뒤집으면서.


지난 세월처럼 새롭게 맞이한 1월도 시궁창에 박혔다. 시궁창의 쥐는 잘도 달려가던데 나는 왜 이러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나는 사람이라서 시궁창에선 살 수 없는가 보다.


나는 달라질 마음을 먹지 않고 달라질 노력을 하지 않아서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날 구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날 구하지 못한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수백 밤을 기도했지만 이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잘 살아내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포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포기하고 싶다. 잘못 써서 죄송하다고 신에게 사죄하고 고이 돌려주고 싶다. 고스란히 반납할 수만 있다면. 제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환불이 가능할까요? 물론 실제로 이 기회가 주어져도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다. 모든 선택을 유보하고 그저 숨만 쉬고 있다. 그저 숨만 쉬고 싶다. 제대로 포기하지 못하고 잡지도 못하고 양쪽에 어중간하게 걸터앉아, 이도 저도 못한 상태로 숨만 부지하고 있다.


내가 겨우 발굴해내 소중히 쥔 희망을 세상은 너무도 쉽게 앗아간다. 어떻게 찾았는데 독수리가 낚아채듯 순식간에 빼앗아 달아난다. 아니, 틀렸다. 뭐가 날 이렇게 만들었냐는 질문의 답은 나 자신.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희망을 앗아가고 방치했다. 나라는 인간이 밉다. 싫다. 나는 왜 이런 내가 되기를 선택했을까. 결과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런 결과라도 상관없으니 당장 편하길 바랐기 때문일까. 너무 안이했다. 눈앞의 쾌락만 좇아 살아온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하긴 나는 늘 내가 못마땅했으니 새삼스럽진 않다.


내가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 누구도 확신에 차 답하지 못하는 답을 나는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데. 정작 내가 가장 자신이 없다.


내겐 세상의 그 어떤 부정적인 수식어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지금의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조차 내 안에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 석 자 붙은 빈 껍데기만 현실에 놓여있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어버린 걸까.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가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힘에 겨웠다. 이제 평생 달팽이처럼 이 침대에 붙어살게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창을 닫고 에어컨도 켜지 않은 방에는 축축하고 어두운 공기가 묵직하게 고여 있는 듯해서, 미지근한 젤리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배가 고픈데도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다. 목도 마르지 않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죽고 싶었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부엌에 맛있는 음식이 차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침대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별을 잇는 손」 무라야마 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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