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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하 Sooha Dec 25. 2020

9. 내 안의 빛을 모아

달력이 넘어가고 감정은 희석된다. 격렬했던 절망과 극적인 무기력 또한 옅어진다. 어느 날이든 무덤덤하다. 다소 가벼운 일상을 보내면서도 무겁게 드리운 그림자의 무게를 느낀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세상이 구성될 텐데,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흐른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세월은 나로 하여금 몹시 지치게 만든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성취란 무엇인가 고심해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옛 성취는 빛을 잃었다. 허탈한 현실을 직시하면 그제야 돌이킬 수 없을 거란 공포가 엄습한다. 짧지 않은 삶에 일궈온 성취가 없음만 실감한다.

생산성의 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 사회의 가치에 포함되지 못한, 위배되고, 뒤떨어진, 소외된.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어디에 속할 수 있냐고 자문했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지나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예기치 않는 질문이 등을 치면 소름이 돋는다. 답할 말이 마땅치 않다. 혼탁한 머릿속을 휘젓고 있노라면 결국 생명이 끊어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좁은 머리통이 잡생각으로 들어차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몸 구석까지 퍼진다. 폭풍 속에 휩쓸려 나를 놓치고 자아의 주체성을 잃게 되면 혼란은 일제히 달아나 공백만 남는다. 뒤죽박죽인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본능적인 갈망만 남게 되면 미궁에 빠지고, 공허해진 육체만 남는다. 영혼이 빠져나간 송장만 덩그러니 쌕쌕 숨을 쉰다.


‘어떤’ 순간에 멈춰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내 인생은 어딘가에 걸려 최소한의 호흡만 이어지는 날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비관에 능숙해졌고 불행에 익숙해졌다. 하루는 당연하리만치 단조롭다. 생활의 리듬은 깨진 지 오래다. 숨을 반복해도 삶은 흐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고립된 사람은 시야기 좁아져 자신이 보고 듣고 아는 것만이 유일하다고 믿게 된다. 한정적인 장면만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작은 것도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4면의 벽에 딱 하나 뚫린 실낱같은 구멍으로 나의 삶을 관찰하면 그렇게 불행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가장 불행한 인생인 양 평가하고 만다. 그리고는 이 불행을 거부하면서도 멈추는 법을 몰라 쩔쩔맨다. 괜찮은 하루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인생을 보내고선.

나를 향한 힐책을 타인에게로 돌린다. 감정받이로 전락한 가족들은 영문을 모르고 폭격을 당한다.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한 감정을 쏟아붓는다. 모진 말을 너무 오래 삼켜왔던지 내 안의 고운 말을 다 잡아먹었나 보다. 험한 채찍이 휘두르며 나도, 그들도 상처 입힌다. 알면서도 멈춰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는 변명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불행에 유효기간이 있긴 할까.

모든 것이 허울 좋은 핑계로 전락한다. 절망과 독대하는 순간, 그곳에 묻혀버리고 싶다. 최저의 순간, 최후의 밑바닥에 안착하고 싶다. 나로 존재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전부 나의 탓으로 귀결할 때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나의 안전지대는 서서히 금이 가다 무서운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보수를 해도 따라가질 못한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 긴 시간을 의지했던 피난처는 목전에 잠시간의 안녕을 선사했지만 이후 거머쥐어야 했을 미래를 희생시켰다.


현실은 거북해질수록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시간은 갈수록 빨리 흐른다. 부쩍 때 묻지 않았던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나곤 한다. 꿈에서라도 한 번만 돌아갈 수 있다면.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고 나를 믿어줄 딱 하나의 근거조차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날의 나는 자신의 지지자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줄곧 우울증이 발목을 잡는 줄 알았건만 내 삶의 장해물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부모님을 잃어버린 꼬마처럼, 모두가 앞을 보고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고 어쩔 줄 모른다. 아이는 부모님이 찾으러 오겠지만 나는 누가 찾으러 와주겠어.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오면 좋으련만. 이 인생을 타개할 계책이 필요하다.

방법을 알고 있는데 구체적인 실마리는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이 삶에 돌파구가 있는지 당최 확신이 서질 않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엉킨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자니 앞이 깜깜하다. 도대체 어쩌면 좋나. 어떻게 해야 하나.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런 나를, 이런 삶을 참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생활을 지속하는 건 지옥이다. 달라지고 싶고 변하고 싶다. 같은 아픔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고통과 절망을 오가며 방황하고 싶지 않다. 경험하진 못했지만 지극히 평범한 나를 되찾고 싶다.

다짐을 실천하고, 결실을 맺고 싶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내가 되고 싶다. 꿈만 꾸던 모습을 실제로 살아보고 싶다.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여 인생의 2막을 올리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실패하는 데 이골이 났다. 다신 재기하지 못할 것이고 영영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나를 가장 괴롭히는 절망의 정체다. 과거만 반추하며 후회하게 만들고, 악순환의 고리에 걸리게 하는 주범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절망을 지겹도록 경험해왔다. 이미 늦었다는 변명으로 행동을 가로막고 정체하는 고통을 맛봐왔다. 이제라도 꿈틀대기 마음먹은 건 지금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나의 두려움이 진짜 현실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멈춘 채 시간만 흐른다면 영원히 이 절망과 고통 속에 갇혀 살게 될 테니까.


만성적인 우울증은 환경을 바꾸지 않은 한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상담을 받으며 점차 핵심적인 문제가 두드러지고 내면에 뿌리까지 얽혀 굳건히 버티는 것 같은 감각은 그 탓일 것이다. 척박한 황무지인 마음을 토양부터 갈아엎기 위해선 기온이 안정되고 온화한 곳으로 떠나야 한다. 땅은 움직일 수 없지만 다행히 나는 움직일 수 있다.

환경은 가족, 소속된 집단, 거주하는 지역, 나아가 나라까지 해당하지만 그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한 환경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 탓만 하고 있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내가 바뀌어야 벗어날 수 있다. 바뀌기로 결심하고 행동해야만 나를 괴롭히는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다.


정말 바뀔 수 있다면 의심스럽더라도 순간마다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할 것이다. 부질없는 되새김과 실속 없는 생각과 진척 없는 하루를 내던지고 나를 괴롭게 만드는 환경에서 빠져나가 신기루 같던 간절한 바람을 거머쥘 것이다. 행복과 평안한 생활과 만족스러운 하루 같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절망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고통과 0.01%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인생일지라도.


포털 사이트에 화제로 떠들썩하던 꽃 테스트를 해보았다. 결과는 벚꽃. ‘살아있는 동안 빛내며, 포기하지 마세요.’ 포기하자는 체념이 빼곡히 차오를 즈음 꽃잎이 날아와 살포시 내려앉았다. 겨울은 봄을 데려온다던데 어쩌면 기나긴 겨울이 봄을 모셔왔나 보다.

분홍빛 봄을 환영하며 매일 뭐라도 한다. 매일 새로이 시작한다. 현재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낚시찌를 던지듯 가능성을 띄운다. 다짐하고 결심하고 행동한다. 지난 세월의 반동처럼 희망으로 기어간다. 매 순간 희망을 수집한다.


이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펼칠 수 있을까? 남은 선택지마저 사라지기 전에 도전해보는 방법 외엔 없다.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한다. 우선 제로를 향해. 인적이 드문 숲에 길을 내기 위해선 꾸준히 한 길로 다니며 꾸준히 다듬어야 한다. 드리우는 나뭇가지를 치고 풀을 뽑고 돌을 골라야 한다. 무의미하고 끝이 없어 보이지만 멈춰선 안 된다. 단 한 번의 시도로는 길을 내지 못한다. 살아가는 행위처럼 하루를 멈추지 않고, 멈추면 다시 걸어야 한다. 그렇게 나의 길을 닦아나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낫고, 내일 제대로 하는 것보다 오늘 대충이라도 하는 게 낫다. 변화는 지금, 내가 머문 현재에만 가능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누구나 시작 전이 가장 힘들고 시작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누워있으면 일어나는 것이, 외출 준비를 마치면 집을 나서는 게 가장 힘겹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면, 나가면 언제 어려웠냐는 듯 힘듦은 싹 사라진다. 언제나 행동하기 직전이 가장 낯설고 어렵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 행동해야만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주저앉아 가만히 고개 숙이지 말고 일어나 행동하자. 물을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고. 인생을 고해라지만 그곳에 나를 방치하지 말자. 괴롭지 말자.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지.

내 안의 빛을 모아 글로 엮어 징검다리를 놓는다. 여기에 변곡점을 찍는다. 이 글이 삶의 다음 스텝을 이어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우울할 때 하고 싶은 대로만 지내면 결국 우울한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니 뭐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의미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일단 시작해보세요. 우울할 때는 대부분의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하지만 그건 그냥 생각일 뿐이에요. 그 생각을 꼭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 놓인 길을 가기가 너무 어려워 보이고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내디딜 수 있는 한 걸음, 시도해볼 수 있는 작은 방법은 언제든 있으니까요.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더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보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이기만 하면 돼요.
당신의 뇌를 더 강하게 만들 작은 걸음을 한 발짝 내디뎌보세요. 그러면 다음 걸음을 떼기가 쉬워지고, 그다음 걸음은 더 쉬워질 거예요.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기회가 바로 당신 앞에 있습니다.

「우울할 땐 뇌과학, 실천할 땐 워크북」 앨럭스 코브


노인이 웃음 지었다.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마, 행복해지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포기하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썩어버릴 뿐이야."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았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것을. 그것을 원하고 있던 자신을.
"이봐, 형씨. 희망을 가져. 꿈과 동경을 잊어서는 안 돼. 일어서라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먹구름 속으로 걸어들어간들 어때. 경치가 달라지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달라져. 이리저리 헤맬지언정 환한 빛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언젠가 파도 너머로 육지가 보일 걸세."
나처럼은 되지 마, 끝마디에 울음이 섞인 듯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뭐랄까, 후회는 앞서 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나는 이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어. 지쳤어."
그러면서 노인은 아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희미하게 술 냄새가 났다. 방바닥에 무언가 탁 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여느 때처럼 컵 술을 따서 마시고 있는 걸까.
"젊을 때 움직이라고."
노인이 말했다. 옆집에 살 때 텔레비전을 보면서 편하게 주고받던 말투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어도 다시 돌아와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어. 젊을 때만 가능한 일이야. 난 이제 이래저래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버리고 말았지만."

「오후도 서점 이야기」 무라야마 사키


상담과 치료의 시작은 내담자의 '낫고 싶다'는 의지와 동기이다.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과 직면하는 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증세를 고치고 싶지 않고 낫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은 환자에게 흔하게 나타난다. 이때 정신질환은  타인과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도망칠 수 있는 합당한 변명거리가 된다. 질환 자체가 변명이란 말은 아니지만 이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고 부여잡아 현실을 회피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압박 속에서 자신의 증세를 핑계 삼아 현실의 무게에서 도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 질환 자체는 상당히 고통스럽겠지만 자신이 짊어져야 할 현실의 무게가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보다야 낫고 주변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일종의 무기로 쓰기도 한다. 
마음의 고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증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러한 증상을 껴안은 채 그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료를 하고 싶지 않다, 나아지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이 있는 한 나아질 수 없다. 그런 증세가 있는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니까. 새로운 고통과 마주하여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나아지느냐 익숙해진 고통에 침잠하며 점점 희미해지는 은신처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이냐.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선택이 고통일 경우에는 적어도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봉착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두렵더라도 자신을 직시하고 현실과 직면하여야 한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설령 문제를 인정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은 가끔 상처를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한다. 그것은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지만 그것밖에는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을 때,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을 사용한다. 자신은 나아지고 싶고 고치고 싶다고 말하면서,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하면서도 마음은 달리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심리적 생존을 위해서 그런 속임수가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해야만 할 때가 온다. 정말 내 마음이 그러길 원하는지 들어주어야 하고, 달래고 감싸 안고 발걸음을 돌려 앞으로 향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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