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는 일을 안 했다.
일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배경은 이렇다.
1. 내가 현재 맡고 있는 서비스 방향이 바뀌면서 담당하는 프로젝트 여럿이 드롭되며 갑자기 일이 없어졌다.
2. 새로운 TF로 발령이 났는데 신규 TF라 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일이 없었다.
3. 다른 파트에 계신 분들과 함께 일해야 했고, 그분들이 가진 히스토리가 많아 일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업무로 바쁘셔서 일을 계속 대기해야 했다.
4. '대기' 하는 시간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5. 사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리 큰 의미는 없었다.
리서치를 해도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고, 기존 업무를 일단 열심히 해보자니 기존 업무는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미 회사 안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팀에 주고 있는지, 나조차 잘 모르겠는 상태였으니까. 월루도 하루 이틀이지. 일을 안 하면 몸이 근질거리는 성미를 가진 내겐 이 시간이 꽤나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이번 상반기를 보내며 얻게 된 한 가지 수확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일을 할 때 동기 부여를 받는 사람인지 확실히 파악했던 것이다.
일하는 자아로서의 나는…
1. 서비스 오너십이 중요한 사람이다.
2. 작던 크던 영향력을 주고 싶다.
3. 그래서 업무상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없을 때 답답하다.
그러나 이런 내가 새로이 맡게 된 과제는 마냥 낯선 영역이었고, 관심 분야도 아니었고, 내가 영향을 끼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렇게 상반기는 게으른 삶이었다.
게으른 내 모습이 싫었지만, 반대로 “마냥 게을러버리는 일 말고 내가 뭘 더 할 수 있지?”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던 몇 개월을 보냈다.
그래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일종의 도피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 한창 성장해야 하고, 지금이 내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것 같은데 회사에서의 일은 없고, 조바심을 사이드 프로젝트에 몰입하며 해소했던 거다. 시킨 것도 아닌데 새벽까지 작업하고, 몇 주 내내 퇴근하면 어떻게 서비스 만들어 볼까 회의하고, 고민하고. PM이 넘 열심히 해서 팀원들이 안 할 수 없었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괜히 미안하네.
아무튼 그러던 중 때마침 업계 선배에게 고민 SOS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가 건네준 말들은 내게 꽤나 큰 망치가 되었다. 게을렀던 지난 태도는 정리하자고 다짐한 계기이자, 불안했던 내 마음을 깨 주는 망치 같은 말들.
일단 그가 내게 가장 많이 해준 말은 ‘장기적으로 봐라’는 거였다.
근데 솔직히 장기적으로 보고 싶어도 내 눈앞만 보는 게 사람이지 않은가? 나도 누가 경주마처럼 시야를 제한하는 안대 끼워주고 앞만 보고 달리게 해줬으면 싶었다. 그냥 내 상황에만 집중하고 좋지 않나? 하지만 회사에서 자기 나름의 롤을 맡고 열심히 일하는 주변 친구들 보면서 비교하지 말자고 다짐해놓고, 얼마 뒤 괜한 열등감이 들었던 게 나란 인간의 초상인 것을 어찌하리…
그럼에도 망치였던 이유는 대화에서 그가 해준 비유와 이유들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업무상 주니어를 생애주기에 비유해보라.
지금은 30개월과 34개월의 차이가 커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몇 년 후 보면 그 차이가 어떤가?
별 차이 없다.
결국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하니까 장기적인 관점에서 업무를 보라는 말이었다. 어렸을 땐 내가 30살이 된다면? 하고 두려워하지만 40살 넘으면 나중에 내가 몇 살 인지도 기억 안나지 않냐..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현명하게 처신하라면서 해줬던 두 번째 조언은 이랬다.
스트레스를 초월해서 네 무기로 가져가라
이런 대내외적인 변화와 불안감을 초월하는 것이 네 무기가 될 수 있다. 좋든 싫든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지 않나? 네가 처한 상황은 사실 길고 긴 조직생활에서 상처받을 일은 아니다. 비일비재할 거다. 불안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초월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조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뼈를 때린 말.
의욕 없는 모습이 반복되면 주어질 기회도 안 주어질 수 있다.
너는 답답하고 피해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단면으로 보면 네가 일에 몰입 못하고 있는 것만 사실이다. 회사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네 이유는 그냥 개인 사정밖에 안된다. 사실 시니어는 누가 눈빛에 생기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 없어 보여도 다 안다. - 이 말을 듣고 내가 피해자 코스프레해왔나 싶더라.
그와의 대화는 공격력 +10 물약 포션 먹은 느낌으로다가 각성한 시간이었다.
내가 차마 인정하기 싫어 회피하고 있는 점도 일깨워줬고, 미처 깨닫지 못한 민망스러운 내 모습도 발견했다. 물론 이후로도 회사 안에서는 동료 퇴사 등 내 멘털이 흔들리는 사건이 있었다. 일 없는 상황도 진척은 없고, 상사와 이야기해 업무를 받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 막연한 롤이라 마냥 걱정인 상태다.
그래도 요즘은 마음의 안정에 집중하고 있다. 어떻게?
1. 일이 없는 거 팩트, 그렇지만 게으른 나도 팩트. 불평 말고 받아들였다.
2. 사람은 원래 간사하다. 일 많으면 많은 대로 또 짜증 내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다.
1. 내가 오너십 가질 수 있는 과제를 최대한 받아내자. 도전적인 과제? 오히려 좋아(덜덜)
2. 결국 위에 적은 것처럼 주도적 롤로 임할 수 있는 과제를 받게 되었다. 굉장한 챌린지겠지만 잘하고 싶다. 그리고 무사히 오픈시키고 싶다. 이걸 위해 하반기를 보낼 것이다.
1. 최근 나름 의지하던 동료가 퇴사하며 해줬던 말들이 인상 깊었다.
2.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동기부여받는지 파악했으니, 이젠 내 나름의 업무 전략을 짜 보자.
3. 어떤 분야로 내가 나가고 싶은지 이런 거 적극적으로 말해서 어필하고, 회사 안에서 오너십 가질 수 있는 활동을 여럿 해보기로 했다.
4. 포폴 들어갈 내용도 한판 정리했고 내 커리어가 어떻게 비칠지도 살펴보며 내 커리어에 어떤 영역을 더 채워 놓을지 파악 중이다.
1. 일단 내년까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과제에게 몰입한다.
1. 내가 즐기며 기꺼이 할 수 있는 일
2. 내 자아실현을 위해 사이드 프로젝트도 올해 유지하며 쭉 발전시키고 있다.
내 안에서 말 많았고 탈 많았던 상반기가 지나갔다. 이미 시작한 나의 하반기는 ‘태도’에 집중하며 보내자고 한번 더 다짐해본다.
하반기 회고는 좀 더 간단명료한 상황과 스트레스에 초연한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안 받겠다고는 말 못 함ㅋㅋ)
망치 같은 말을 건네줬던 선배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낸다.
하반기에는 어디서든 잘 굴러가는 돌멩이 처럼 잘 살아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