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진 Jul 22. 2021

미술사학 대학원생으로서의 삶

제2장, 아르바이트, 조교, 푼돈 벌이의 연속




비장하게 석사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내막은 처참했다. 적어도 내 경우는.


학부 때 미술사학을 복수 전공하고 익숙했던 교수님들이 계신 동대학원으로 석사 과정에 곧바로 입학했다. 때문에 나는 비교적 수월하게 자대의 입학 전형에 대해 알 수 있었고, 학교 분위기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익숙함이 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익숙했던 탓에,  깊이 조사하지 않았고 미술관 인턴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 갖고 앞으로 펼쳐질 길이 어떠한 모습일지도 모른  석사 과정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나은 길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때때로 지금까지도    신중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이따금씩  때가 있다. 그럼에도 전공을 살려 일을  , 뿌듯함과 벅차오르는 감정이 확실히 있는  보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나 싶다.


자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입학 당시 정해졌던 금액보다 줄어들어 반쪽짜리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학교 총장이 바뀌면서 공과대학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제도가 늘어났고 자연스레 인문계열과 예체능계열의 지원이 축소되었다. 따라서 내 장학금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예정되었던 것보다 적어졌고, 난 공격적으로(?) 조교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수료 전까지 1년 동안 학과 조교로 근무하며 타과 조교들, 행정실 담당 선생님들, 전공 교수님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고 행정 업무를 참 많이 배우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25살, 내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 시작한 학업과 업무의 병행


입학하자마자 교내 안내센터에서 외국인들과 고등학교 견학 단체를 응대하는 조교로 선발되었다. 2학기, 그러니까 1년 동안 안내센터에서 근무하며 학업을 병행했다. 당시 나는 경기도에서 통학을 했는데, 학부 때와 달리 한 수업을 3시간 내내 일주일에 한 번 진행했기 때문에 통학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이 주 1회였을 뿐이지 학업량은 절대적으로 몇 배에 달하여 매일 같이 도서관에 가야 했고 보아야 할 자료, 서적 등이 너무 많아 장거리 통학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공부에 전념하겠다는 원대한 의지를 갖고 학교 주변에 자취할 곳을 구하기 시작했다. 학부 때는 과외를 하고, 학생이라는 이유로 감사하게도 부모님께 지원을 많이 받았었다. 하지만 내 나이 스물다섯(?)에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없었고, 나 스스로의 힘으로 자취를 해보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고시원과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끝내 사람이 살만한 아파트의 하우스 쉐어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어쩌면 내 석사 시절 동안의 고생은 내가 사서 고생하기 위해 벌린 일들인가 싶다.)


학교 앞 1분 거리의 하숙집(이라 쓰고 고시원이라 읽는다.)

내용과 크게 상관은 없지만, 2015년 당시 학교 주변 학생들의 거주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내가 살았던 A 하숙집은 정말 가벽이라 부를 수도 없는 얇은 벽채로 간이 방들을 만들어 두었고, 덕분에(?) 마주한 방의 친구들의 통화소리, 기침소리, 코푸는 소리, 머리 말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돈독해질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화장실 바로 옆방일 경우에는 세탁기가 탈수를 하면서 기계가 진동을 하면 자연스레 그 방도 같이 울리는 입체적인 효과가 나기도 했다. 창문도 너무 작아서 약간 감옥 같이 느껴졌다.


B 하숙집의 경우에는 1970년대 지어졌을 법한 단단한 벽돌 건물이어서 소음 공해나 흔들림(?)은 없었지만,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아서 낡았던 내부구조와 창천동 하숙 타운의 정체성과 같은 무수히 많은 벌레들이 상주하여 나를 한층 더 성장시켜준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옥탑방의 화장실이 누수가 되어 곰팡이로 가득했던 방을 벽지만 덧발라 나에게 소개해주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던 난 소음이 없고 방이 넓다는 이유로 그곳을 선택했다가 살면서 볼 수 있는 ㅂㅋㅂㄹ는 다 보고 한 달 만에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ㅎ)


이 모든 건 2015년 7월-8월 여름 방학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난 조교를 병행하며 집을 구하러 다녔고, 고시원, 하숙 등을 전전하며 여러 번 발품을 판 끝에 학교 맞은편 아파트에서 졸업생 한 분이 하우스 쉐어링을 하는 곳에 입주하게 되었다! 극악무도한 전적들에 비하면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TV도, 주방용품도 없이 미니멀(?)했던 그곳이 내겐 나름 천국과 같았다.


그리고 이제 난,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목동에서 영어 학원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그리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교내 일일 아르바이트나 사례비를 주는 프로젝트에 여러 번 참여했다. 교내 행정 서비스 모니터링 아르바이트, K-MOOC 수업 한영 번역 아르바이트 등 이제는 얼마나 많이 했는지도 기억 조차 나지 않는 일들을 했었다.


어렵고 힘들게 채워간 나의 지적 허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지만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학부 시절 아무리 공부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공부, 연구, 학습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늘 하나를 공부하면 성적을 따기에만 급급했지, 내용 자체를 깊숙이 천착하여 들어간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멋지다 멋져.. 그림을 보며 분석하고 사회·정치적 상황을 함께 생각해본다는 것은 정말 다시 봐도 매력적이다.


다행히 석사 과정을 수료하면서 많은 국문/영문 글을 읽고 나의 것으로 소화해내며 다수의 글을 써낼 수 있었다. 독해력이 느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글쓰기도 괄목상대할 만큼 실력이 늘었다. 그리고 나의 생각, 나의 배움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 굉장히 즐거웠다. 이전까지는 깊이 있고 조리 있게 어떠한 현상을 기술하는 능력이 부족한 점이 나의 콤플렉스였다. 지적이고 냉철하면서도 논리적인 사람이고 싶었는데, 난 늘 감성적이고 틀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수년이 지난 지금, 내가 어마어마하게 논리적이거나 모든 걸 다 맞는 똑똑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바를 글로 풀어내어 세상에 전달할 수 있는 정도는 된 것 같다. 아마도 나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미술사학으로 석사 과정에 진학하는 누군가라면, 나보다 더 많은 배움을 얻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나처럼 어마어마한 지적 허영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공부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좋아한 건지, 공부 그 자체를 좋아한 건지 아직도 헷갈린다.



인문학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 = "오랜 누에고치 생활을 견뎌야 한다는 것"


지금이야 유튜브, 브런치, 인스타툰, 웹툰 등 무수히 많은 플랫폼이 생겨 능력만 있다면 언제든 자기 콘텐츠를 만들어 새로운 직종에서 종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전만 해도 고시나 전문대학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을 하는 것이 마치 정해진 수순과 같았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은행, 사기업, 공사 등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취업 뽀개기 카페를 이용한다던지, 일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PDF 취업 자료를 받기 위해 게시글을 공유하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취업 준비를 했고 결국에 다들 멋진 직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전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난 지독하게 인문학 뽕(?)에 취해있었고 대학 졸업은 인문학적 수련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여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외로운 학문의 길을 걸어갔다. 취업의 길과 학업의 길을 신중하고 차분하게 비교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다소 성급하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나는 30살이 되기까지 끝없이 주변 친구들의 상황과 내 처지를 비교하는 건강하지 못한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자립형(?) 석사생에게 가장 즐거운 낙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는 일이었다.


너무나 어려운 경쟁을 뚫고 회사에 들어간 친구들은 내가 대학원을 수료할 무렵 어느덧 2-3년 차의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27살의 나이에도 '학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고, 비록 안내센터 조교에서부터 학과 조교까지 다양한 일을 했음에도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주된 대화거리인 '업무', '직무', '회사' 등의 이야기에서는 늘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술사학은 내가 좋아해서 내가 선택한 굉장히 좁은 학문의 분야였기 때문에 대학원 동기들이 아니면 굳이 심도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친구들이 적지 않은 돈을 벌며 보통의 주제로 이야기를  때에도  이야기에 참여할  없었던 것을 물론이고, 회사를 다니지 않고 학생 신분이어서 '부럽다' 다소 불편한 이야기에도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직 생활은 분명 힘든 것이 맞지만, 그렇다 해서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의 삶이 더욱 편하거나 쉽다고 단정 지을  없다. 때문에 나의 어려움과 힘든 상황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던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불쾌하게 다가왔고, 적어도 나는 타인의 상황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노라  백번 다짐했다.


이처럼 인문학으로 석사과정을 걷는다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 택하는 평범하지 않은 길일뿐더러, 오늘날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보아도 가성비가 확실히 떨어지는 일이기에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외로이 이겨내야 한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공부를 하며 많이 졸곤 했다.


내가 학업을 이어가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에고치로 살아오다가 겨우 사람답게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수료 후 연구 용역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2017년부터이다. 그리고 2020년 7월 한 문화재단의 정규직이 되기까지 약 5-6년 정도의 아르바이트, 인턴, 계약직 시기를 보내왔다.


30살이면 대부분의 친구들은 직장에 자리를 잡고 대리 이상의 직급이 되어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생애주기별(?) 과정은 경제적, 시간적, 문화적으로 여유로운 경우에는 나처럼 취사선택을 해야 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단순히 가치관의 차이로 선택을 달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이라면, 내가 걸은 길이 수많은 옵션 중 하나라는 점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미술사학 대학원생으로서의 삶은 화려함과 비참함이 공존했고, 누에고치로서 지적 허영을 채우는 오랜 학업의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는 내가 재단, 외국 박물관, 국내 미술관, 상업 갤러리를 전전하며 느꼈던 바를 조심스럽게 풀어보고자 한다.





끝.




※ 본 글은 철저히 작성자의 경험과 상황에 입각하여 쓰인 글로, 주관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주어진 현상에 대한 절대적 정답이 아닙니다. 저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은 참고용으로만 봐주시고, 재미로 봐주시는 분들께서는 부족한 글이지만 어여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생산적이고 유용한 피드백에 열려있습니다!


※ 글에 실린 모든 사진은 저자가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2차 가공 및 무단 활용을 금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외 박물관 도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