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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Sep 14. 2021

누구든 가르칠 수 있는 게 하나는 있다

아, 근데 나는 아직 없다...

회사에는 전 세계 오피스에서 운영되는 다양한 사내 교육 프로그램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성장 플랫폼'이라는 게 있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세 달을 보내고 마음의 여유를 조금 되찾았을 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보다 잘하기 위해서 내 업무 영역 밖의 회사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성장 플랫폼에 있난 교육 세션을 뒤져보았다. 5분 정도 서치를 해보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무수히 많은 교육 프로그램 중, 한국의 직원들이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의 수가 너무 적은 것이었다. 대면 방식의 교육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화상 채팅을 통해 진행되는 온라인 교육들은 대부분 해외 오피스의 직원들이 진행하는 것이라 시간이 맞지 않아 참여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 주, 팀장과의 미팅에서 이런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지 물었다. 그 한 번의 대화로 나는 한국 오피스의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업무를 사이드잡으로 맡게 되었다. 


사내 교육은 어느 회사에나 있는 건데 뭐 그렇게 특별할 게 있을까 싶지만, 가장 큰 차이는 ‘이 회사의 모든 직원은 다른 직원을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전재다. 다른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대부분 본인의 직무에 연관된 내용을 새로운 직원에게 교육하거나, 혹은 사내 프로그램이나 서비스가 개발되었을 때 그것을 사용하는 다른 직원들을 위해 교육 세션을 제공한다. 외국어 교육이나 리더십 교육은 대개 회사 밖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이루어진다. 그 이상의 무엇을 배우려면 회사 밖에서 자비를 들여 교육을 듣거나, 회사에서 알음알음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곳의 교육 프로그램은 모든 직원이 맡는다. 어쩐지 교육이라는 단어도 무척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그냥 시간을 할애해 내가 아는 지식이나 노하우, 경험을 다른 동료들에게 공유한다는 말이 더 명확하다. 교육의 주제는 회사의 비즈니스나 자신의 업무, 전문 분야일 수도 있고 비즈니스와 전혀 관계없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예컨대 취미 활동(낚시 잘하는 법, 와인 소믈리에 기초)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자녀 교육, 이전 회사에서 했던 일, 재테크, 명상, 운동 등도 모두 포함된다. 본인이 즐겨하고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부담 없이 다른 직원들에게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세션을 진행하는 직원도 부담 갖지 않고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다. 교육 장소, 시간, 교육 대상이나 인원 제한도 모두 강사 마음이다. 많은 인원을 앞에 두고 대강당에서 진행하는 세션이 부담스럽다면 5-6명의 동료들과 카페에서 수다 떨듯 30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다. 


직원이나 플랫폼만으로는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지 않는다. 그 중간에서 교육자와 학생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한국 오피스가 다른 오피스와 비교하여 프로그램이 현저히 적었던 것이 바로 '연결 고리의 부재'였다. 오피스 프로그램 리드는 무언가 가르쳐줄 수 있는 직원들을 발굴하거나 설득하여 교육 세션을 열게끔 도와주고, 그런 기회를 통해 교육을 받는 직원들도 새롭게 무언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돕는다. 관종이나 천사가 아닌 이상 어느 날 갑자기 '아, 다음 주에 직원들에게 브런치 글쓰기에 대해서 가르쳐줘 볼까?' 하는 마음을 먹고 혼자 세션을 기획, 홍보하는 것이 상당히 쑥스럽고 번거로운 일이 아니던가. 이런 심리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프로그램 리드의 핵심 역할이다. 물론 직원들이 요즘은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고민하고, 세션의 어젠다나 장소, 시간 등을 최적화하며 마지막으로 세션에 대한 피드백을 교육자와 나누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팀장이 시켜서 하는 것도, 그게 본인의 업무 평가에 도움이 되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두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내에서 강의를 하다 본인의 적성을 깨닫고, 아예 '강사'를 전업으로 선택한 사람들도 있다. 


오피스 리드의 모자를 쓴 순간부터 열심히 직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떤 동료들은 이미 주요 업무로 충분히 바쁜데 왜 이런 봉사활동까지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이 리드를 하면서 얻은 게 훨씬 많았다고 자신한다. 이 미션을 마음에 품게 된 이후로는 다른 직원들을 만나 네트워크를 쌓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고, 그들이 뭘 잘하고 관심 있어하는지 두 귀를 크게 열고 듣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본래 내 업무만 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직원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 다른 팀의 직원과 함께 일한 이야기를 해주면 흘려듣지 않고 메모를 해 놓았다가 그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친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그 사람의 눈이 반짝이는 주제가 보이면 '오, 창주님! 프레젠테이션 너무 잘하시는 것 같아요. 저 혼자만 알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다른 직원들에게도 이런 능력 공유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며 직업병처럼 섭외를 해댄다. 


회계팀에 있는 직원에게는 우리 회사 분기별 영업 실적 제대로 해석하는 법좀 알려달라고 졸랐고, 테크를 잘하기로 소문난 직원에게는 재테크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꼬셨다. 성악을 배운 적이 있다던 직원에게는 목을 상하지 않고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발성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기자를 오래 하다가 우리 회사로 이직한 직원은 기자 생활이 어떤 건지 좋은 기사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고 무수히 많은 엔지니어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개발 프로그램이나 개발 언어 등을 쉼 없이 다른 직원들에게 교육했다. 탈잉이나 프립같은 앱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굳이 찾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냥 누구를 만나도 즐거웠던 것 같다. 역시 사람들을 많이 안다는 것만큼 회사 생활에 힘이 되는 것은 없다.  


한 직원은 광고 카피라이트를 만드는데 정말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직원을 섭외해 내가 교육자를 섭외하여 세션을 기획하면, 정말 기가 막힌 솜씨로 그 세션을 다른 직원들에게 홍보하는 일을 맡겼다. 처음 함께 일할 때는 익월에 스케쥴링된 세션은 사내 뉴스레터를 통해 홍보했지만 그녀의 글 솜씨를 확인한 이후에는 그 둘도 없이 웃긴 홍보 문구가 너무 아까운 마음에 아얘 g2g 세션 홍보 이메일은 단독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덕에 프로그램에 자체에 대한 직원들의 관심뿐 아니라 세션에 등록하는 직원들 숫자도 굉장히 많이 늘었다. 


세션을 제공해 준 직원들의 노력을 알리고 보상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무리 간단한 세션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바쁜 시간을 쪼개 교육 콘텐츠를 만들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세션이라도 세션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그의 매니저와 세션을 들었던 직원들을 모두 수신자에 넣어 공식적으로 감사 이메일을 보내고, 동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하며, 그들을 위한 특별 스웨그를 제작하여 제공하기도 한다. 고백하자면 다른 사람만 열심히 섭외한 나는 여전히 한 번의 트레이닝 세션도 진행하지 않았다. 아직 내가 무슨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이런 세션을 흔쾌히 열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더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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