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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Sep 21. 2022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자격

   

   광복절을 낀 8월의 마지막 연휴 날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철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우리는 어머니와 당일치기 나들이를 하곤 하는데, 그런 계획의 9할은 내가 제안하는 것이다. 근처에 살아도 함께 자주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작은 죄책감이랄까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는 노력이기도 하고, 진주에 남편을 두고 혼자 외롭게 타지 생활을 하는 어머니에 대한 나의 연민과 애정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씩씩한 사람이고 그래서 다행히 나는 어머니, 남편과 함께 바깥공기를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충분히 즐겁다.


   그날 우리가 철원으로 가기로 한 것은, 그 주의 며칠이 여름답지 않게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 이렇게 여름이 다 가는 건가? 이 빌어먹을 습기는 다 날아가 버린 건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날씨면 철원에 있는 주상절리 둘레길을 걸을만하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20분 정도 주상절리 길을 걸었을 때 우리 셋의 윗도리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셋 중 제일 마지막 순서로 걸으며 혼잣말로 계속 아이고 죽겠다를 중얼거렸다. 들이쉬는 숨에도 내 땀 냄새가 내 코를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왜 여길 오자고 했나, 난 역시 경솔하기 짝이 없어라 생각하며 후회를 했는데 제일 앞장서서 걷는 어머니는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도 한 템포를 늦추지 않고 걸음을 앞으로 옮겨 나갔다.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150이 안 되는 작은 키로 종종 대며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걸 보니, 아 진짜 우리 어머니가 세상에서 체력이 제일 좋다, 내 체력이 제일 쓰레기다 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거의 2시간을 그렇게 걷고 나니 둘레길의 끝이 보였다. 그제야 내 발 저 밑에 흐르는 한탄강과 그 옆에 뻗어 있는 주상절리, 곳곳에 있는 신기한 동굴과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전까진 너무 힘들어서 그때까지 풍경이고 뭐고 제대로 감상할 마음의 여유 따위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AI처럼 좋네, 멋있네 라는 감정 제로 리액션만 해댈 뿐이었다.) 진짜 멋있네. 멋있어. 그래 이 많은 사람들이 이거 보러 여기까지 오는 거지. 단풍 들 때 오면 더 멋있겠다. 가을에는 엄마를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다. 아니다, 겨울이 더 좋으려나. 지환이 가족이랑 다 같이 와도 재밌겠다. 그렇게 계속 중얼댔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 나란 아이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어느 날부터는 어딜 가면 자꾸 "누구를" 데리고 올까, "누구랑" 또 같이 갈까 생각을 하게 되는 나였다.


   그때 우리 앞에 휠체어를 탄 사람 두 명이 다가왔다. 걷는 길이 조금 좁아 길 한편에 바짝 기대 비켜주니 지나가셨다. 더운 날씨에 휠체어 바퀴를 굴리시느라 힘을 쓰신 모양인지 반대편 시작점에서 멀지 않은 지점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다.

"아이고, 날이 이래 더운데, 불편하게 이런 데를 다 오노"

그들이 지나가고 나자 어머니가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게 말이에요, 경사가 좀 있어서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 이 길을 다 어떻게 가실지 걱정이네요. 중간에 계단 길은 어떻게 하시려나.."

"같이 온 사람들이 도와줘야 되지 않겠나. 이런데는 고마 오지 말지.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 아이가"

"아무래도 저기 저 정도까지만 보고 가시지 않을까요? 휠체어가 무거워서 도와줘도 계단 길은 못 가실 거예요."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다가 드디어 종착점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관광버스가 다시 시작점으로 데려다주었다. 관광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온몸을 감싸는 에어컨 바람이 세상 제일 반가웠다.


   버스 안에서 땀을 식히고, 물을 마시며 정신을 좀 차리고 나자 몇 분 전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와 휠체어를 탄 관광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젠장, 또 너무도 쉽게, 너무나 자동적으로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편견과 위선적 생각들을 내뱉어버렸구나. 회사에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성, 포용성, 소속감이라는 주제로 직원들을 가르치고 캠페인을 해왔던 게 대체 다 뭐란 말인가. 그걸 해야 한다고 그동안 읽었던 책과 논문은 다 똥구멍 밖으로 배설해 버린 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결국 다시 바닥으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휠체어를 탔다고 해서, 다리가 좀 불편하다고 해서 이렇게 좋은 풍경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 텐데. 이 길을 걷겠다고 2시간, 3시간을 운전해서 온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마음이 다른 것이 없을 텐데. 나는 왜 그 순간에 그들이 왜 불편하게 이런 둘레길까지 왔을까, 어떻게 그 길을 다 걸을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왜 이런 둘레길에 휠체어가 접근하지 못하는 계단들이 저렇게 많을까, 출렁다리 한 켠에는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길을 건널 수 있는 대안 길이 있어야 할 텐데 왜 그런 길은 없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쓰나미로 날 공격했다.


   함께 온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면 공격력 100의 아픈 말이었다. 이렇게 좋은 풍경을 다음엔 또 누구랑 감상할까 생각할 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을 늘 배제해야 한다면 너무도 슬프지 않은가.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에서 발을 접질려 걷지 못하는 엄마를 등에 업고 한라산 설산을 올라가는 이병헌만 봐도 그런 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아들의 등에 업혀서라도, 모두가 절경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는 설산의 풍경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엄마의 마음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좋은 풍경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조차 시작하기 전에 너무나 쉽게,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배제해 버렸다.


   그날 밤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에 "어머니 그 사람들도 그렇게 멋진 절경을 보고 좋아하셨겠죠", "날은 무덥고 길은 좀 어려웠어도 돌아가는 길에는 오늘 좋은 하루였다"라고 생각했을까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답이 중요한 것도, 어머니의 생각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내 마음 편하게 할 변명 하나가 필요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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