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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으로부터 Jun 15. 2022

네가 있으면 비가 없는 날에도 촉촉해져

아름답고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버리며 살고 싶다. 앞으로도.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게 해줄게. 대신, 딱 한 가지 일만 선택해야 해.”  


어느 날 신이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해온다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책 읽기’와 ‘노래 듣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고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무척이나 오래도록 고민할 것이다. 그러다 아쉽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듯 노래를 택하겠지.  






  노래 듣기를 좋아했던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 보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날보다, 방에서 책을 읽는 날보다 거실에 있는 날이 훨씬 많았다. 한쪽 벽면 낮은 선반에 놓인 오디오 앞에 불가사리처럼 납작 엎드린 아이는 처음에는 동요의 가사집을, 조금 더 커서는 가요의 가사집을 유심히 살펴보며 몇 시간이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비라도 내리면 구름 뒤에 숨어서 

네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만 하는 내게’ - 조성모, To Heaven  


사춘기가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누군가와 사랑을 해본 적도, 그것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가사만 나오면 지나치지 못하고 감정이입을 했다. 구름 뒤에 숨어 울고 있을지 모를 그 여자를, 그런 여자를 염려하는 남자의 심정을 내 일처럼 헤아려 보며 안타까워했다.  






  달리 하고 싶은 것도,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던 나는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을 듣고, 가사를 읽고, 가사 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일로 보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꽤나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가 똑똑한 것도, 미술이나 체육 실력이 특출난 것도 아니고, 관심사라고는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 가사에 파묻혀 노래 속 주인공들에게 과몰입하는 것뿐이라니. 이걸 도대체 어디에 쓰나. 


그땐 아직 어렸고 걱정도 많지 않은 성격이라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의 무용함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쓸모없고 소모적인 일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노래는 들어도 들어도 신기했다. 4 분짜리 음과 글만으로 나를 펑펑 눈 내리는 겨울로 데려가기도 하고, 하나 둘 별을 세어보는 여름밤 앞에 앉히기도 했다. 어제까지 더없이 사랑받던 나를 헤어진 다음날을 보내는 갈 곳 잃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남다른 감수성으로 시간을 버렸던 소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이제 밤이면 오디오 앞에 엎드리는 대신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앉았다. 그리고 적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A에서 B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오고 가는 계절과 각자 달랐을 서로의 입장을 내 일처럼 헤아려보던 마음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 안에 실은 착실히도 쌓여왔던 그것들을.  


그렇게 적힌 마음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는 그것으로 두 권의 책을 만들었다. 책 만들기나 글쓰기라는 목표를 두어서가 아니라 그저 오래도록 충실히 버려온 시간들 덕분이었다. ‘원한다’는 말의 민낯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 후에 올 결과를, 다음을 바라는 것 없이 그냥 하는 것. 좋아서 하는 것.   






  지금도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노래를 옆에 둔다. 이동할 때, 산책을 할 때, 샤워를 할 때,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 덕에 감성의 영역은 마를 날이 없어, '현실'이나 '사회' 같은 딱딱한 단어들을 거쳐오면서도 이만큼이나마 촉촉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너무 많이 삭막해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무엇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것. 무엇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은 것. 어떤 시집의 제목처럼 아름답고 쓸모없는 일로 마음껏 시간을 버리며 살고 싶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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