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에 붙었다. 시험준비를 시작한지 2년차, 휴학 1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큰 시험에서는 번번이 운이 좋은 편이었고,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수험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시험합격의 기쁨보다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곧이어 얼떨떨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그 한번의 시험으로 향후 수십년의 진로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합격자 인적사항을 등록하면서 시험에 붙었다는 것이 조금 실감이 났다. 학부 졸업을 하지 못했던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연수원을 다니면서 학교 수업을 듣고 연수기간 중 졸업하기, (2)임용유예를 신청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 연수를 받기.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입직하는 것이 유리하다며 첫번째 선택지를 추천하셨지만, 번아웃 상태였던 나는 더이상 치열하게 살 마음 자체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임용유예를 신청했다.
임용유예제도는 말그대로 공무원 임용을 유예하는 제도로, 특정한 사유를 가진 경우에만 허용이 된다. 학부졸업, 군입대 등 여러가지 사유가 있는데 행정고시에 합격한 채용후보자들은 일반적으로는 대학교 학부 졸업을 하지 않은 경우에 신청한다. 이때 대학원 등 석박사과정은 인정이 안되고, 학점이 조금 남아있는 경우에도 종종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국가 입장에서는 매년 신규로 충원해야하는 인력 규모가 있어서 유예생 수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내가 유예신청을 했을 때도 15학점 즈음 남은 채용후보자들은 신청이 반려되었다고 하니, 최소 20학점 정도는 남아있어야 안전하게 임용유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 부전공 덕분(?)에 채워야 할 학점이 꽤 남았어서 나는 유예생이 될 수 있었다.
인생의 공허한 황금기
이 시기의 나는 한 마디로 날백수였다. 내 평생 중 '부럽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시기였다. 학교 수업 들으러 가는데도 그렇게 맘이 편할 수가 없었다. F만 안 맞으면 됐고, 수업도 졸업에 꼭 필요한 필수 강의만 남기고 듣고 싶었던 강의를 맘껏 골라 들었다. 주4일로 시간표를 몰아놓고 쉬는 날엔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직장이 정해지고 나니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시는 부모님도 '그간 공부하느라 고생했는데 놀만하지...'하는 생각에 내 게으른 삶을 터치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편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참 좋았지만, 그만큼 또 텅 비어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고시생들은 저마다 품고 다니는 버킷리스트가 있다. 시험 붙고 나면 할 일 리스트. 나도 그런게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뭐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막상 합격하고 나니 그런거 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게으름만 피웠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의 나는 여기저기 아팠다. 생리통도 심했고, 재발한 아토피도 한참동안 남아있었다. 고시의 후유증이기도 했지만 게으르고 불규칙한 삶을 영위한 대가이기도 했다. 연수원에 들어가서 단체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아픈곳이 싹 없어진게 그 증거다. 실컷 쉰 것에 후회는 없지만 기왕 쉬는거 운동도 제대로 하고 건강도 챙길걸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 잃어버린 버킷리스트가 조금 그리워진다.
굳이 한 일을 꼽자면
1. 돈벌이
그래도 1년의 유예기간은 길어서 그 와중에 뭘 좀 하기는 했다. 일단 놀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놀 수 있기 때문에 가용자금 마련 차원에서 깔짝이는 수준이었다. 합격생 중에는 고시학원에서 2차답안지 채점 알바, 강사 알바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수험기간이 긴 편이 아니라서 내 실력에 자신도 없었고 2차 시험과목은 쳐다보기도 싫어서 오히려 고시 계열 아르바이트는 피했다. 행정고시 합격한 임용유예생 신분이 가장 유용하게 먹히는 알바자리는 의외로 대학입시 학원가였다. 나는 지인을 통해 대입 논구술 채점 단기 알바자리를 얻어서 입시철에 잠깐 돈 버는 시늉을 했었다. 개중 특별히 기억나는 학생이 있었는데 모의구술 면접에서 재경직 사무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던 남학생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기재부에서 국가예산을 운영하고 싶다고 답했었다. 눈을 반짝이던 그 친구가 지금도 그 꿈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한 가장 큰 일은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한 것이다. 돈을 벌려고 일한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일하게 된 것에 가깝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놀고먹고 있는 내 상황을 간파하고 일을 조금 도와달라고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덜컥 입사 아닌 입사를 해버렸다. 내 신분은 계약직 마케터 6개월. 나는 개인적으로 정식 마케터라기보다는 인턴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당시 회사에서 마케팅만 담당하는 직원은 나 하나였어서 명함 상 직책은 마케터였다. 그건 내 생애 첫 명함이었다. 내 이름과 소속된 회사, 직책이 적혀 있는 정갈한 네모판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공무원 명함보다 스타트업 명함을 먼저 갖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때 들었던 기분좋은 소속감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과 업무 스타일은 나랑 제법 잘 맞았어서 퇴사할 때도 아쉬움과 미련이 많이 남았었다. 이제는 신생 스타트업이라고 부르기엔 제법 연차가 된 전 회사는 지금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덕분에 퇴사한 후에도 선배에서 상사가 되었던 전 사장님을 가끔 만나곤 하는데 회사 성과 이야기를 듣다 보면 괜히 내가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만약 고시에 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계속 그 스타트업이나 관련 업계에서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종종 한다. 그러고 보면 직업을 갖는다는 건 내 의지보다는 운과 타이밍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다.
2. 여행
많은 유예생들은 이 시기 여행을 떠난다. 돈은 어디서 나냐고? 합격해서 놀고 싶지만 돈은 없는 채용후보자들을 위한 마이너스통장 금융상품도 있다. 그리고 이 때 탕진한 돈을 갚기 위해 평생 공직에 뼈를 묻게됐다는 도시전설도 전해진다... 나는 그래도 소득 없이 빚을 내는 것이 무서워서 대학생 때 과외로 모아둔 돈 조금이랑 알바비, 스타트업에서 근무하고 받은 월급을 꼬박 모아서 여행자금으로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잘한 결정이 아닌가 싶다. 막상 직장일을 시작해보니 돈 모으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에 마이너스통장 빚도 남아있었으면 꽤 골치아팠을 거다.
처음으로 친구와 단 둘이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겨울방학을 틈타 두 번, 두 주씩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전혀 다른 성격의 여행이었다. 하나는 2주간 3개국, 비행기만 10번 가까이 타는 초스피드 여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2주간 작은 동유럽 국가 하나만 느긋하게 돌아보는 힐링 여행이었다. 같이 여행한 친구의 여행스타일 차이와 내가 가진 '니가 좋으면 나도 다 좋아'식의 마인드 덕분이었다. 실제로 둘다 재밌었다. 더 기억이 또렷한 쪽은 후자인 걸로 봐서 취향은 힐링 여행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하다. 요새는 공무원들도 장기 여름 휴가를 권장하는 분위기라 마음먹으면 2주까지는 아니어도 1주 정도의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다(코로나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는 가서도 확인해야 할 급한 메일들과, 돌아왔을 때 밀린 업무 처리를 생각했을 때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맘 편할 때 여행은 더 자주, 오래 다녀올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3. 운동...?
학교에서 남는 시간에 끼워넣은 강좌 중에는 운동 수업이 꽤 됐었다. 우리 학교는 필수로 운동 수업을 2갠가 들어야 졸업을 시켜주는데 나는 그 전까지 운동을 하나도 듣지를 않았어서 막학기에 몰아 들었었다. 떨어진 체력을 어떻게든 보강해보겠다고 필라테스도 등록했고, 마침 아파트 엘레베이터가 고장 나서 19층까지 걸어다녔었다. 근데 그럼 뭐해... 남는 시간에는 다 누워있었는걸...
이 시기에 얻은 깨달음 하나는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운동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생활 습관이라는 것이다. 내 생애 운동에 이만큼 돈과 시간을 들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큰 효험을 보지 못했던 건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1시간씩 바짝 운동을 해도 나머지 시간에 누워있고, 기름진 음식을 절제없이 먹으면 무슨 소용일까. 지금은 사무실에서 종일 앉아있고, 회식날마다 원치않는 술을 마시는데다가 돈을 들여 운동하는 것도 없지만 그 때보다는 훨씬 건강한 것 같다. 인바디 상 근육량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고, 더 직접적으로는 생리통이 사라졌다. 일단 유예생 시절보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는데다가(생각해보니 야근 덕분에 취침시간은 그닥 규칙적이지 않다...^^) 사무실에서는 허리를 펴고 배에 힘을 주면서 앉아 있으려고 하고,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샐러드를 먹고 짧은 시간이라도 홈트를 하는 등 나름대로 습관에 변화를 준 덕분이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유예생 시절의 나는 움직일 기력 자체가 딸렸던 것 같다. 뭘해도 힘들고 나갔다오면 무조건 드러누워야 했던 저질체력이었기에 강제로 운동을 한다고 수업을 들었던 것 자체가 기특하다. 그 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휴식이었으니까 결국 나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래서 더 그리운
선배들, 동기들도 입을 모아서 유예생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참 많이 한다. 합격의 기쁨과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던 시기, 공직에 대한 환상을 품고 국가의 대들보가 된 자신을 그리며 설레는 마음을 간직했던 시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임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암묵적 허락을 부여받은 시기였기 때문에 가장 속편하고 행복했다고 말들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능과 입시가 모조리 끝난 고3의 상태로 1년을 보낸 셈이니까 정말 대책없이 속편한 날백수였다 싶다. 그런데 그 때는 그게 그렇게 좋은 건줄 잘 몰랐다.
일을 시작하고 나니 그 1년이 정말 꿈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에 그렇게 놀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사표를 내지 않는 이상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더 꿈같다. 그래도 나는 '돌아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아직은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하다거나 못버티게 힘들다고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다만 그 때 내가 품었던 설렘은 지금도 많이 그립다. 그 마음만큼은 정말 순수하고 깨끗해서 오래 간직하고 싶었는데 설렘은 정말 한순간만 다가오기 때문에 설렘인 듯 하다. 공직에 발을 붙이게 되는 순간 설렘이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질되었는데 내 경우에는 모종의 다짐, 의지로 변했던 것 같다. 그건 설렘보다는 훨씬 무거운 감정이라서 이전의 훌훌 날아갈 것 같은 행복감과는 영원히 멀어지게 되어버렸다.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알기에, 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순진한 유예생 시절이 더 그립다. 어쩌면 유예생 기간에 우리가 정말 행복했던 이유는 현실에 대한 직시 없이 눈부신 미래를 마음껏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