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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Jul 02. 2020

진짜 제발 고시하지 마세요

건강과 멘탈과 사회성을 모두 상실하는 등골브레이커: Lv.1 고시생

  처음 고시공부를 시작했을 때, 시험 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었다. 선배는 괜찮은 학원과 강사, 교재, 공부하는 방법 등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일어서니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 지금 너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야..."


  합격 여부를 불문하고 고시공부를 해봤던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고시하지 마세요." 처음엔 경쟁자를 줄이려고 그러나 했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 어느새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진짜, 웬만하면!! 제발!! 고시하지 마세요!!!!"


도서관 지박령이 보내는 경고


  내가 고시공부를 시작한 건 막 4학년이 되었던 연초였다. 행정고시 1차시험인 PSAT 기출문제를 풀어보았더니 얼추 점수가 나오길래 일단 당장 앞둔 당해 1차시험을 접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덜컥 시험에 붙어서 본격적으로 고시에 진입하게 되었다. 나는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어영부영 고시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수험생에게 고시공부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도 많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되는지도 모르고... 그때 처음 내가 고3때 한 공부는 고시공부에 비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대학생활 내내 술만 부어라마셔라 한 덕분에 그나마 있던 공부습관도 잊어버린지 오래라서 습관부터 다시 들여야 할 지경이었다.

  얼떨결에 2차시험을 준비하던 첫해,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했고 하루 6시간씩 인강을 들었다. 그런데도 내 공부량은 다른 고시생들에 비하면 평균 한참 아래였다. 대학도서관에 소위 고시생 지정석이 있다. 정말 지정석인건 아니고,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사실상 지정석과 다름없는 자리이다. 내가 몇시에 출근하든 고시생 지정석은 항상 차있었고, 몇시에 가든 그들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들도 몇년째 수험생신분을 유지하게하는 시험이 바로 고시였다. 지박령처럼 눈이오나 비가오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지들을 보면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때 그 쎄한 느낌을 무시하면 안됐었는데....


  그 해 시험은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나는 휴학을 결정했고 본격적인 고시생이 되었다.


고시하지 마세요


  지금도 가끔 고시생  시절을 추억(?)하곤 하는데,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결론은 항상 같다. "만약에 오늘 자고 일어났는데 고시 처음 시작하던 날로 되돌아간다면? 나 절대 고시공부 안한다..."


  고시를 준비하겠다고 선배를 찾아갔던 나처럼, 이제는 내게 고시공부를 시작하는 후배들이 종종 조언을 구한다. 나는 방법을 먼저 알려주었던 착한 선배와 달리, 다시 생각해보라는 못된 말부터 던진다. 고시를 하지말아야할 이유는 아주 많은데, 보통 이렇게  4가지정도만 얘기해주면 다 도망간다.



1. 진입장벽이 없다는 것은 경쟁자가 많다는 것

  내가 고시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사전준비가 필요없을 정도로 낮은 진입장벽이었다. 고등학교 때 주구장창 공부했던 한국사시험 2급이상 자격증과 영어점수만 있으면 학력무관 누구나 칠 수 있는 시험. 자격증 유무는 아무런 가산점을 주지 않고, 순수하게 점수로만 채점하니까 수능만큼이나 공정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은 내가 쉽게 진입한 만큼, 다른 경쟁자들도 쉽게 진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률은 30~40대 1 정도로, 몇백~몇만대 일을 찍는 취업경쟁률처럼 극악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해볼만한 시험이라고 받아들였는데, 실상은 허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고시를 진입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있다. 시험에 도가 튼 사람들이 가장 자신있는 무기인 '시험'으로 경쟁하는 것이니 자신있을 수밖에. 그런데 나말고 모두가 자신있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걸러주는 체 역할인 진입장벽도 없다. 경쟁은 피가 터질 수밖에 없다.



2. 소위 머리빨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력도 필요하고, 운빨도 필요하다...

  고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두번째 착각은 노력하면 붙는 시험이라는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1차 시험인 PSAT은 고시생들 사이 '지문'이라고도 불렸다. 한번 정해지면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PSAT은 언어논리, 자료해석, 상황판단 세 가지 영역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단기간에 점수를 끌어올리기 쉽지 않다. 유형이 정형화되어있지 않고, 수능과 달리 문제집도 변변찮은 탓이 크다. 그나마 계산문제를 많이 풀면 자료해석은 점수를 올릴 수 있지만, 속독능력과 직관적 이해력을 필요로 하는 언어논리나 아이큐테스트와 흡사한 퀴즈문제가 많이 나오는 상황판단은 처음 나온 점수가 끝까지 유지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이른바 PSAT형 인간(처음부터 합격권의 점수가 나오는 PSAT 특화형 수험생)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첫해 PSAT을 합격한 나는 다행히 전자에 가까웠지만, 후자인 경우 1차 시험의 장벽을 통과하는게 쉽지 않다. 5년 이상을 내리 공부했는데 논술시험인 2차에 가보지도 못하고 1차에서만 탈락의 고배를 연달아 마신 끝에 고시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고 2차 논술시험이 노력하면 붙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논술형 2차시험도 재능을 요한다. 글쓰기 능력, 도표로 깔끔하게 풀어내는 능력, 하다못해 예쁜 글씨체도 2차시험 점수에 영향을 미친다. 1차보다는 '머리빨'을 덜 타긴 하지만, 순수하게 노력으로 헤쳐나가려면 남들보다 2배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남들도 어지간한 수준 이상으로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이건 정말 굉장한 비용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운빨이다. 2차는 범위가 넓다보니 내가 공부한 문제가 나올 수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당일 컨디션, 전날 본 수험서 영역 등에 따라 점수는 5~10점 까지도 차이가 난다. 소수점 둘째자리 차이로 합불이 결정되는 시험인걸 생각하면 굉장한 점수차다. 2차시험은 논술형이다보니  채점하는 교수님 기분이나, 함께 채점되는 경쟁자 시험지의 수준에 따라서도 점수가 1, 2점은 차이날 것이라고 수험생들끼리는 지레짐작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고시가 어떻게 평등한 시험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 수험생들 사이 고시가 굉장히 공정하고 평등한 시험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모두에게 평등하게 상당한 수준의 재능, 노력, 운을 요한다는게 수험생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거지....


3. 공부하는 과정에서 잃는 게 너무 많다

  미리 언급해두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이야기다. 그렇잖아도 썩 훌륭하지 않은 고시생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는 것은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일반화해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고시생이 된 뒤로 내 삶은 굉장히 단조로웠다. 자취방-학원-도서관 사이클을 유지했고, 자취방에서 얼마 안되는 옷을 돌려 입다보니 겉모습도 단조로워졌다. 운동량은 더이상 줄어들 여력이 없는 수준이었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다보니 말수도 적어졌다. 집순이였던 나는 그런 일상이 그렇게 어려운 변환이 아닐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 머물기를 선택하는 것과 집밖에 갈곳이 없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고시생은 내게 있어 새로운 신분과도 같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체형의 변화였다. 움직이지 않으니 일단 살이 쪘다. 허벅지, 아랫배로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시생활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는 오히려 살이 빠졌다. 살이 아니라 근육이 빠진 것이다. 아랫배와 허벅지를 빼고는 다 살이 내려서 소위 ET형 체형이 됐다. 거울을 볼 때마다 속상해서 나중에는 가급적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치워놨던 기억이 난다.

  체력도 훅 떨어졌다. 고시가 끝나자마자 사람이 너무 고팠던 나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전처럼 놀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하루에 점심, 저녁 약속을 잡아 한나절을 나가 놀아도 힘이 남아돌았는데, 이제는 하루에 한끼만 밖에서 먹어도 지쳐서 집으로 기어들어왔다. 본래의 체력을 되찾기까지 반년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고시생활은 돈이 많이 든다. 자취방 월세와 생활비도 그렇지만, 학원비도 비싸다. 강의 하나를 들으려면 이삼십만원을 내야 하고, 그것도 순환이다 뭐다 해서 과목별로 서너 강의는 수강해야 한다. 아무런 수입이 없는 고시생 입장에서는 부모님께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럼 시간이 갈수록 나는 불효자식이 되는 거고 눈치가 보이는 거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외로움이었다. 이 때 생긴 특이한 습관 중 하나가 혼잣말이다. 하도 말할 일이 없으니까 스스로에게밖에 말할 사람이 없어서 생긴 습관이었다. 사람들이랑 교류가 줄어들어서 사회성도 떨어졌다. 사람들이랑 어떻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마치 어느 순간 침 삼키는 걸 자각하게 된것처럼 의식해야만 대화할 수 있었고 어려워졌다. 시험 준비를 오래하다 보면 성격이 변하는 건 흔하다. 나도 훨씬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날카롭게 변한 나를 마주해야만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예민하기보다 우울한 고시생을 더 많이 봤다. 장기간의 수험기간동안 피로가 누적되고 실패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자신감을 잃고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민한 고시생은 차라리 괜찮다. 아직 기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시험이 끝나고 나는 털린 멘탈과 바닥난 사회성을 회복해야만 했는데, 이 '재사회화' 과정은 체력을 되찾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고시생이 이런건 아니다. 건강을 잘 챙기고 스스로를 가꾸면서 고시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고시생들은 시간이 정말 부족하기 때문에 나처럼 건강, 돈, 사회성 등등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고, 이것들을 되찾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4. 되고 난 다음 보상도 별거없다. 특히 공적 가치에 별생각이 없을 수록...

  고시에 합격하면 마을의 자랑이던 시절이 있었다. 장원급제에 비유되기도 했고, 붙고 나서의 금전적, 지위적 보상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현실은 5급 공채라고 하면 '그게 뭐야?'하는 세상이다. 공무원 연금까지 개편된 현 시점에서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행정고시에 도전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보통 고시에 도전하는 젊은 학생들이 고려하는 다른 선택지가 대기업/로스쿨 등인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금전적 보상은 소소하다.

  사회적 명예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도전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실 사무관은 말이 사무관이지 정부 부처에서는 실무자다. 계급제인 공무원 사회에서 5급부터 시작한다는 건 큰 혜택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고시 출신 사무관이 진출하는 대부분의 정부 부처에서는 발에 채이는 게 사무관이기 때문에 일반 기업의 신입사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처럼 어느 정도의 워라밸을 생각하고 고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부처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금, 다들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 사무관에게 칼퇴란 무엇일까... 그림의 떡...? 주52시간제가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공무원은 그 대상이 아니다. 시킨다고 하더라도 주요 부처 사무관들은 52시간제 실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워라밸이 내게 정말정말 중요한 요소였다면, 나는 아마 진실을 깨달은 연수원 때 도망갔을 것이다.

  만약 공익성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그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분명 사무관들은 정부 부처에서 필수적인 업무를 하고, 예산을 결정하고, 정책을 기획하거나 집행하면서 우리나라를 움직이는데 크게 기여하니까. 하지만 그만큼 사무관들이 포기해야 되는 것도 많다는 걸 꼭! 기억하고 다들 고시에 도전했으면 좋겠다.




후회하지는 않는데요, 그건 제가 운이 좋아서 그래요


  나는 고시를 얼떨결에 시작하긴 했지만, 2년 안에 합격 못하면 바로 다른 일에 도전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래서 짧고 굵은 고시생 시절이 유난히 혹독하게 느껴졌고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고시에 합격해 무사히 근무를 하고 있는 지금, 많은 사람들은 고시하지 말라고 열변을 토하는 내게 후회하냐고 묻는다. 그럼 나는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후회하지는 않는데요, 그건 제가 운이 좋아서 그래요..."


  수험기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운이 좋아 시험에 붙긴 했고, 잘 모르고 도전하긴 했지만 나는 내 직업에 백프로는 아니어도  만족하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면 고시 공부 안한다는 말도 진심이다. 다시 돌아가면 이 모든걸 알고, 생생하게 겪었으면서도 이 노릇을 반복해야한다는 뜻이지 않은가? 난 그걸 두번할 자신은 없다.... 어쨌든 고시생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해야 하는 신분변화이고,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얼마만큼의 희생을 할 수 있는지 모르면서 이 신분변화를 선택하곤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고, 이 끝을 모를 시험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끝에 포기하거나(또는 포기하지 못하거나), 합격해서도 미련이 남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여러분 고시하지 마세요... 할 거면 진짜 꼭 두번 세번 고민하고, 각오하시고 시작하세요.... 이미 많은 걸 각오하셨겠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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