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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Jun 23. 2020

대학생은 어쩌다 고시생이 되었나

진로선택에 관하여: Lv0  대학생

 굳이 말하자면, 나는 꿈많은 어린이는 아니어도 장래희망을 제법 또렷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비현실적인 꿈은 하나하나 지워가긴 했지만, 그래도 경영학과에 진학했던 건 현실적인 꿈 하나를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돈 잘벌고 폼나는 대기업이나 외국계회사에 취직해서 9to6 삶을 안정적 고용상태로 유지하는 것.


  이젠 나도 안다. 이게 현실적인 꿈이 전혀 아니라는걸...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대학가면 살빠진다는 소리를 철썩같이 믿고 있던 세상물정 모르는 학생이었어서 내 목표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취준생이 싫어서 고시생이 되었습니다


  대학교 새내기 때는 정말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선배들이 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했고, 졸업한 선배들도 2학년 때까지는 술만 마셨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는 취업이 굉장히 쉬워보였었고, 실제로 명문대 경영학과 졸업장을 들고 있으면 괜찮은 회사 사무직 서류는 쉽게 통과하던 시절이었었다. 나름 괜찮은 대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1학년 학점은 말아먹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헌내기가 되었을 즈음 n포세대, 문송합니다 같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몇년 째 취업에 실패하는 선배들이 등장했다. 만만하지 않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동아리도 했고, 학점 관리도 잘하고 있었으니까 졸업하면 그냥 취업이 될 줄 알았다. 철없던 시절이었다.

  3학년 때부터는 선배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취준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없었다. 이 때 처음 '늦었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작에 학술적인 동아리도 하고 인턴도 하고 외국어점수도 따놓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자 선배들은 괴담처럼 들리는 여성들의 대기업 분투기를 들려주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정신을 차리기에는 내가 너무 게을렀다.

  4학년. 졸업반이다. 수업은 야무지게 듣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표를 꽉꽉 채워서 들었고, 학점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더이상 취준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때 나는 경영학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고, 미술사학 복수전공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취업과는 하등 상관없는 과목이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없이 시작할 수 있는 진로를 선택하기로 했다.

  취준생은 생각보다 획득하기 굉장히 어려운 신분이었다. 빠른 정보력, 능수능란한 자소설 작성능력, 탄탄하게 준비된 스펙, 결정적으로 수많은 회사에 지원서를 제출하는 부지런함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실패를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했다. 나는 취준생이 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고시를 시작하게 된 건 그렇게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1학기를 마치고 나는 휴학을 했다.


진로 선택은 소거법으로


  준비없이 시작할 수 있고 공정한 경쟁이 보장된다는 점이 고시를 선택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는 했지만, 아주 무턱대고 고른 진로는 아니었다. 대학생활 4년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꿈꾸는 직업상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게 되었던 만큼 내가 원하는 직업이 뭔지 고민을 오랫동안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다시 언급하자면, 내가 원하는 직업은 "돈 잘벌고 폼나는 대기업이나 외국계회사에 취직해서 9to6 삶을 안정적 고용상태로 유지하는 직업"이었다. 이제 이 직업상을 하나씩 분해해보았다.


돈 잘벌고

  '돈을 잘 번다'의 기준은 애매하다. 물론 다다익선이지만, 돈을 잘 벌어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더 구체적인 액수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작성해본 리스트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월급>

생계에 쪼들리지 않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수 있는 월급

비싼 밥은 못 사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끔 커피정도는 살 수 있는 월급

가끔 영화를 보고, 더 가끔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러갈 수 있는 월급


  나는 특별히 돈 드는 취미도 없고, 자동차나 패션에 관심도 없어서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내집마련이지만... 그건 어차피 근로소득으로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해서 진작에 포기했다.

  부모님 집에서 출퇴근한다고 하면 집값은 들지 않고, 교통비 오며가며 대충 10~20만원, 핸드폰값 5~10만원, 보험 5만원, 식대 기본 30만원, 화장품/옷값 등등 50만원에 '생계에 쪼들리지 않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수 있도록'하는 저축 50만원, '가끔 커피 사는' 커피값 10만원, '영화보고 연극 뮤지컬 볼 수 있는' 문화생활비 20만원 등을 따져서 200만원 정도로 계산했던 것 같다. 이 때 자취해서 나가산다고 가정하고 당시 시세로 월세 50만원 정도를 더한 250만원 정도가 내가 생각할 때 괜찮은 월급이었다.


폼나는

  내가 생각하는 폼나는 직업이 뭘까 고민해봤더니, 좀 복합적인 개념이었다. 내가 원하는 '폼'은 외형적으로 대우가 괜찮으면서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명예가 있는 직업이었다. 경영학과에서 내가 느낀 회의감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직원의 작업효율을 높이는 온갖 기법들에서 느껴지는 '현타'였다. 나는 창업하지 않는 한 CEO가 아니고 결국 그 직원이 될텐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쥐어짜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고 느껴졌고, 그런 경영학의 마인드가 내게는 명예가 없는 일로 여겨졌다. 이 때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사명감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내 업무의 방향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회사, 그리고 내게 그런 확신을 주는 회사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이나 외국계회사

  생각해보니 이건 그냥 있어보여서 붙인 조건이었다. 과감히 패쓰.


9to6 삶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인데, 세상에 완벽한 직업은 없어서 소위 괜찮다고 여겨지는 직업일수록 야근이 잦았다. 나는 얼마만큼의 야근을 감당할 수 있는가 고민해보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요건들을 충족한다면 가장 먼저 포기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개인적인 삶이 사라지는 수준이 아닌 이상 꼭 칼퇴가 지켜져야 하는 것은 아닌 걸로.


안정적 고용상태

  그냥 안정적 고용상태를 유지하는 직업은 있는데, 앞의 다른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면서 안정적 고용을 유지하는 직업은 정말 드물었다. 이 때 처음 공무원과 공기업을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조건들을 기초로 내가 염두에 둘 수 있는 진로를 크게 분류해보니 1.사기업 2.공기업 3.로스쿨 4.공무원 5.창업 정도였다. 가장 먼저 소거된 직종은 1.사기업과 5.창업이었다. 사기업은 폼나는 직업/(기업에 따라)돈 잘버는 직업에서 걸러졌고 창업은 안정적 고용상태/(역시 상황에 따라)돈 잘버는 직업에서 걸러졌다. 3.로스쿨은 9to6에서 걸러졌다. 어지간한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변호사는 어지간하지 않아보였다. 이 판단에는 마침 로스쿨에 진학한 선배가 한 이야기에서 얻은 공포가 크게 작용했다. 빅펌 변호사는 주7일 출근에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건 일상이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제도는 있지만 육아휴직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출산휴가를 3개월이상 내는 경우는 드물며 그 이상은 커리어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선배들의 카더라식 이야기는 당시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소스였다.) 내게 남은 건 2.공기업과 4.공무원이었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을 것 같은 진로로 골랐다. 자격증과 경력 가산점 없고, 시험 점수로만 모든 것이 결정되며, 어떠한 사전 준비 없이 지금 당장 도전해서 될 것 같은 것. 공무원 시험이었다. 공무원 중 '돈 잘버는' 공무원은 5급 사무관이었기 때문에 나는 행정고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건 충분한 정보 수집 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진로를 고른 탓이 컸다. 사무관도 변호사 못지 않게 9to6 삶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된건 나중의 일이다. 그리고 사전 준비 없이 도전하는 행정고시를 '될 것 같은 시험'이라고 단정한 것이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 깨닫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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