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집 리뷰는 아니고요
나는 태어나기를 소심하고 말이 없고 내성적인 아이로 태어났었다. 지금의 지인들이 듣는다면 ‘눼눼눼.. 너 I세요.’ 라며 비꼴 말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정말로) 그랬다.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노라면 떠오르는 감정이 있다. 바로 불안. 항상 두근거리던 심장, 쩍쩍 마르던 입안, 식은땀과 머리로 치솟는 열, 붉어지는 얼굴까지.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기억에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어린이집을 마저 다니지 못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한 학기가 가도록 말 한마디 없이 학교를 다닌 적도 있었다.
말이 없고 내성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쭈뼛거리고 목소리가 작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어른들은 똑바로 말하라고 짜증 섞인 말을 했다. 친척 어른들은 종종 ‘성격이 그래서 나중에 무슨 일을 할래.’ 이런 말들을 하곤 했다.
나 스스로도 이런 성격으로는 세상을 잘 살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들 나에게 ‘기대’라는 것을 할까. 마음속에 부정적인 언어의 씨앗이 심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성격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하든 기대하지 않아. 믿어주지 않아.’
이런 신념 속에서 나는 더 위축되어 갔다. 거기다 집안은 항상 우울하고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부모님은 감수성 많은 둘째가 마음에 어떤 것을 품고 사는지 돌볼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이해한다. 엄마도 아빠도 그때는 너무 어렸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주어진 성격을 극복해보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살아남고 싶었던 생존 본능 같은 거였을까.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겠다며 억지로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수업시간에는 덜덜덜 떨면서도 꾸역꾸역 발표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분단장’이라도 맡을 정도까지는 성격이 변했고 튀는 아이는 아니었을지라도 말 못 하고 사회성 없는 아이까지는 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성격은 점차 변해갔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어린 시절에 가졌던 부정적 신념들이 괴롭혀댔다. 겉으로는 점차 밝아졌지만 속으로는 우울하고 슬펐다. 매일 가슴속에 떠오르는 무가치한 느낌에 내면은 문들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공부를 했고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똑같았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대학로에서 사주를 봤다. 그 당시에는 그런 카페가 많았고 함께 술 한잔 먹던 친구가 사주나 봐보자고 해서 들어간 사주카페였다.
참고로 내 사주는 꽤 괜찮은 편(?)이다. 이 정도면 썩 나쁜 소리 듣지 않고 나올만한 사주라고나 할까. (물론 꼰대를 지나 조선시대 몹쓸 시아버지 같은 고리타분한 해석을 곁들이면 내 사주도 별 게 아니다. 사실 그런 사람에게 여자 사주란 남자 잘 만나고 고분고분한 성격을 갖는 것 외에는 잘못된 사주라 봐야겠다. 이런 점에서 사주란 해석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반영해서 풀이하는 것이고, 자칫 그 사람의 인생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가스라이팅 비슷한 것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릇도 크고 배포도 있고 의지력도 있고 머리도 좋고, 운은 46세부터 틔이는데 그때부터는 날개를 단단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사주라고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 인생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주를 보고 돌아와 창문도 없던 고시원에 누워 있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한 몸 눕기도 어려운 좁은 방에 옷장이 제대로 없어 천장에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머리 위로 짓누르듯 내려오는 옷들 아래에서 나는 희망에 찼다.
이런 진창 같고 사방이 컴컴한 상황에서 사주만이 잘 살 수 있을 거라 말해줬다. 엄마의 시집살이는 고되었고 겨우 고된 시집살이에서 벗어날 때쯤에는 갱년기가 왔다. 그리고 아빠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강했고, 무심했다. 무심해서 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 각자는 저에게 할당된 불운에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미처 그 누구도 살피지 못한 20대 초반의, 여전히 앳된 막내딸의 삶을 보이지도 않는 우주가 믿어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달콤했다.
실제로 나의 삶은 사주가 말해주듯 점점 더 나아졌다. 졸업을 하자마자 취업을 했고 적절한 기회를 만나 미국을 갔고, 다녀와서도 좋은 곳으로 직장도 잘 옮겨 다녔다. 서른 살이 되자 20대까지 쫓아다니던 불안과 우울이 맑은 날 물안개가 거치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요가도 하고 명상도 하고, 달리고, 쓰고 읽으며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매일이 평온한 것만은 아니지만 20대처럼 압도적인 감정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은 날은 좀처럼 없다.
나는 노력했다. 정말로.
가끔 짝꿍이 이런 질문을 한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없다고 매번 답한다. 정말로 나는 노력했다. 이해할 수 없는 우울감이 10대와 20대를 집어삼켜도, 대인기피증이 심해 팀플마저 못 나가게 되었대도 다시 일어서서 노력했다. 손발이 발발 떨면서도 발표를 했던 그때의 나처럼. 삶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여행을 가고, 마음이 더 깊어지기 위해 요가를 배우고 명상을 배웠다. 그리고 무엇을 찾든 그럴듯한 행복한 삶보다는 알차고 진실한 삶의 진정한 기쁨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런 노력 끝에 일상의 안온함을 얻었다.
“내가 지금 짓고 있는 미소 하나도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이 없어.”
내가 최근에 가끔 하는 말이다. 내가 얻은 안온함, 일상의 평온함, 행복감 그 어떤 것도 노력 없이 얻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있기 위해, 따뜻함을 안고 웃으며 사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노력해 왔다. 그리고 나는 그 노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느끼고 있다. 실체적 감각으로 느끼고 실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 스스로를 신뢰한다. 그렇기에 나에게 주어질 남은 40여 년 남짓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고,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때 나를 위로해 줬던 K사주에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 심심하면 또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자주 찾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여전히,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