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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Mar 18. 2024

'가족', 해석할 수 없는 세계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l 노지양 옮김 l 출판사 글항아리 l 가격 1만5000원



밀도 높은 문체로 인간관계의 복잡한 미묘함을 파헤치는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입니다. 때로는 자기비판적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전개해 나가지만 공통적으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지요. 자서전적 글쓰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책은 단순한 삶의 기록을 넘어섭니다. 여성이자 유대인, 그리고 하층민으로서 뉴욕에서 태어나 자란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와의 긴밀하면서도 때때로 긴장된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자신의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인물, 때로는 모호하고 때로는 날카롭게 세상을 인식하는 지혜롭고 강하며 가족에 헌신적인 어머니와의 끈질기고 무서운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요. 이 책을 쓰던 당시 중년의 작가는 늙은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걸으며 웃고, 회상하며, 논쟁합니다. 싸우거나 침묵하거나 지치다가도 기쁨과 생동감으로 가득해지는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책의 제목처럼 ‘사나운 애착’ 그 자체이지요.


예를 들어 어느 날, 애빙던스퀘어를 지나서 브리커가로 들어설 때였어요. 모녀는 젠트리피케이션(소득이 낮은 계층이 살거나 낙후된 곳에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이후 임대료 상승 등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 진행된 이 부자 동네 웨스트빌리지가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얼마간 불편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지요. 그러다 불쑥 어머니가 말했어요. “요즘에 네가 준 그 전기 읽고 있다”고요. 저자가 어머니에게 준 조지핀 허브스트의 전기 얘기였어요. 조지핀 허브스트는 1930년대에 활동한 작가로 완고하고 고집스럽고 열정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나 사랑에서나 작가로서나 모든 성취를 이루었고, 죽을 때까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산 여성이었지요. 그의 전기를 재밌게 읽었냐고 묻는 저자에게 어머니는 “내 말 들어봐”라고 대화의 물꼬를 텄어요. 순간 저자는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어미니와 나눴던 모든 대화들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 말인즉슨 자기가 준 책을 버렸다는 뜻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렇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너한테는 재미있었겠지만 난 아니었어. 나는 그 모든 걸 내 몸으로 살았다고. 다 아는 얘기야. 여기서 내가 뭘 더 배우겠니? 뭘 배워. 넌 신나서 봤겠지만 난 아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얘기할 때마다 저자는 번번이 머릿속 혈관이 터져버릴 것처럼 화가 났어요. 그래서 “엄마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 엄머처럼 말해. 엄마가 말한 대로 그 모든 걸 엄마도 다 겪어봤다면 그 사람이 처한 조건이나 배경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고, 책의 의미도 더 풍부해지는 거야. 그렇게 되면 엄마도 책을 쓰고 싶어지는 거고. 엄마보다 백배 천배는 더 배우고 공부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배워. 하물며 엄마가 뭐라고 왜 못 배우는데?”라고 쏘아붙이곤 했지요. 그렇게 두 사람의 오후는 완전히 재앙이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전과는 사뭇 달랐어요. 어머니는 행동하고 해낸 조지핀 허브스트가 “자기 삶을 살았다는 게” 부럽다고 말했어요. 자신은 못 그랬다고요.


한번은 모녀가 뉴욕을 산책하다 예전에 한 동네에서 살던 저자의 친구를 만난 적이 있어요. 20년 만에 만난 동네 아이에게 어머니는 당신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어요. 저자는 그 모습을 보며 “인정 넘치게 지독하고, 후덕하게 짜증스럽다”고 생각하지요.  


타협이나 미화 없이 마지막 문장까지 펼쳐지는 두 사람의 생(生)은 대담하고 강렬하게 느껴져요. 또한 저자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상상하게 되는 과거 뉴욕에 대한 풍경은 읽는 이 역시 함께 그 시절을 거닐고 있는 듯 생생하게 다가오지요.


청소년기엔 인생의 매 순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요. 가족, 친구,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늘 고민일 거예요. 저자 역시 이러한 고민의 시기를 거쳤어요. 사회적·가족적 역할과 개인적 정체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갔지요. 이러한 고민은 시대를 뛰어넘습니다. 그 고민의 흔적을 이 책에서 살필 수 있지요. 저자에게 어머니란 너무나도 복잡해 해석할 수 없는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이러한 저자의 고민과 깨달음은 때로는 도전적이고, 때로는 위안을 줍니다. 그러면서 독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가족과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지요. 우리 모두가 겪는 인생의 진실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에요. 진솔한 문장들 속에서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있지요.


이 책처럼 잘 쓰인 자서전적 글쓰기는 저자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해 말합니다. 이를 ‘자기 고백 서사’라고도 하는데요.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획득하는 글쓰기 방식이지요. 비비언 고닉은 이 책에서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인간 경험의 본질에 접근합니다. 가족, 어머니와의 관계, 자신의 유년기를 형성했던 개성 있는 동네 사람들을 통해 복잡하고 때로는 충돌하는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을 탐색하지요. 이러한 글쓰기로 유명한 작가로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비비언 고닉은 버지니아 울프에 버금가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어요. 이 책은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의 대표작이자 회고록 분야의 대표작이기도 해요. <뉴욕 타임스>의 ‘지난 50년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선정됐고, <옵서버>의 ‘20세기 100대 논픽션’에 선정되기도 했지요.  


특히 이 책 속 문장들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얽히고설키는 삶의 무늬를 더듬어 가는 여정에 참여해 보세요. 문학적 소양은 물론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여러분에게 중요한 영감을 줄 거예요. 자신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2024년 3월 18일(월) <조선일보> - 신문은 선생님 '재밌다, 이 책!' 코너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4/03/18/20240318000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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