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제29회 NSGC(National Society of Genetic Counselors)의 AEC(Annual Educational Conference)가 막을 올렸다. 그렇게 고대하고 기대했던 컨퍼런스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장롱면허를 자랑하던 나는, 차 렌트는 꿈도 못 꾸고 미경 언니네서 컨퍼런스가 열렸던 호텔까지는 버스를 타고 다니게 되었다. 그때는 우버도 없었고, 택시도 다니지 않는 동네라 버스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나라 버스 시스템이야 정말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최고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너무나 익숙해 있던 나는 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미경 언니네 집에서 학회가 있던 숙소까지 갈 버스를 탈 수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큰 도로를 몇 번 건너야 했다. 도로에 차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규모가 있는 도로라 차들이 빨리 달렸다. 나는 차가 오지 않아도 얌전히 보행자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왜 안 바뀌지? 사거리 자동차 신호는 계속 바뀌는데 보행자 신호는 왜 안 바뀌지?
설상가상으로 지나가는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나를 쳐다봤다. "쟤는 왜 걸어가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무슨 사파리 초원에 있는 초식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정말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미국은 뉴욕 같은 대도시 외에는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부분 차를 이용하다 보니 걷는 사람이라고는 강아지와 산책 나오거나 운동하는 사람밖에는 없었다. 그마저도 텍사스는 덥다 보니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같았다.
정말 10분은 서 있었던 것 같다. 어찌할 바를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반대편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행자 신호등 기둥에 있는 버튼을 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보행자 신호가 바뀌었다.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주변을 좀 살펴볼걸... 그래도 뭐... 버튼이 있는 걸 봤어도 누를 생각은 못했을 것 같다. 신호가 왜 버튼을 눌러야 바뀌어. 그냥 시간 되면 바뀌어야지... 흥. 미국은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지 않는 곳에 있는 신호등은 이런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창피한 마음에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어가려고 하는데 시선이 느껴져서 살짝 보니 이해한다는 눈빛과 미소로 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윽.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버스정류장은 시외버스터미널 느낌이었다. 뭐가 뭔지 몰라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버스가 거의 1시간에 한 대. 버스 한 번 놓치면 시간 맞춰 못 다니겠구나 싶었다. 또 하나 신기했던 것은, 그냥 일반 버스인데 고속도로로 다닌다는 것이었다. 역시 미국, 땅덩이가 넓구나!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려 학회가 열리는 Hyatt Regency Hotel 근처에 내렸다. 못 내릴까 봐 어찌나 불안했던지.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내 앞에 학회가 열리는 호텔이 뙇! 나타났다.
가슴이 두근두근.
비싸게 돈 주고 온 학회였던 만큼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성적인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국인한테 나 유전상담이 뭔지 알고 싶어서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왔다, 유전상담이 뭔지 물어봐도 되냐, 너는 어디에서 일하는 유전상담사냐, 일의 만족도는 어떠하냐 등등.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었는지 모르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때는 정말 뵈는 게 없었다.
그중에 최고봉은 정말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아서 쑥스럽고 창피한 마음 다 제쳐두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너무나 친절하게 장소도 옮기고 머리도 묶고 포즈도 바꿔가며 2장 찍어주셨는데, 두 장 다 흔들렸다. 아쉬웠지만 끌어낼 수 있는 용기란 용기는 다 써버린 상태라 더 이상의 사진은 찍지 못했다.
학회는 조금 뻘쭘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상태로 혼자 돌아다니고, 혼자 밥 먹고, 용기 끌어모아 사람들한테 말 걸고.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 유익했다. 유전상담 석사 프로그램 디렉터들을 만나서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각 프로그램들마다 어떤 사람을 뽑는지, 어떤 자격요건이 제일 중요한지 등에 대한 질문도 하고, 여러 유전상담사들을 통해 유전상담이 어떤 것인지, 왜 중요한지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들으면서 왠지 유전상담사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목요일부터 시작된 학회는 일요일까지 이어졌다. 나는 유전상담사가 된 나를 상상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강연들을 듣고, 학회장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매 순간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늦게까지 있는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버스 시간을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저녁까지 먹게 된 일이 있었는데 먹고 버스 시간에 맞춰서 달려가 보니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그때 시간이 오후 7시 반-8시 정도였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버스 정류장에 사람이 없었다. 다들 벌써 집에 간 건가.
조금 무섭기 시작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웬 까마귀가 그렇게 많은지. 어두워서 잘 못 봤다가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 하나에 까마귀가 가득 앉아서 깍깍 울어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달라스 특성상 흑인들이 많이 사는데, 버스 정류장엔 건장한 흑인들만 있었다. 까마귀는 울어대지, 사람들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지, 버스는 딜레이 돼서 안 오지. 하아... 정말... 나는 학회에 참석했던 기억보다 그날 그 시간 까마귀가 깍깍 울어대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내 모습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 너무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버렸다.
30분 딜레이 된 버스가 드디어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탔는데 승객이라고는 나 외에 흑인 남자 한 명 밖에 없었다. 운전자도 흑인 남성. 끄악. 핸드폰은 로밍도 하지 않고 가서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연락도 못하고, 택시는 더 무섭고, 버스를 타지 않으면 미경 언니네까지 갈 수 없던 상황이라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며 버스에 올랐다. 뒷자리에 앉아 전방을 예의 주시하며 가는데, 고속도로에 올라탄 버스에 갑자기 불이 탁 꺼지는 것이었다. 또 한 번 끄악.
이 버스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원래 이 길로 가는 게 맞았나? 아닌 거 같은데?
저 운전자는 왜 나 쳐다보는 것 같지? 저 승객이랑 운전자랑 둘이 짜고 치는 판에 내가 잘못 발 들인 건가?
납치인가? 어떻게 하지?
정말 마음 조리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혼자 써 내려가며 온갖 나쁜 생각은 다 갖다 붙이며 꽤 긴 시간을 혼자 눈도 최소한으로 깜빡거리며 마음 부여잡고 가고 있는데, 어? 어디서 많이 본 덴데? 휴우. 미경 언니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것이다. 안심하는 마음도 잠시 버스에서 쏜살같이 내려서 10분 정도 되는 미경 언니네 집까지 정말 전력질주. 누가 보면 웬 미친 사람이 저렇게 오두방정 뛰어가나 했을 거다.
학회보다 이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니. 쩝.
그래도 이 학회 덕분에 유전상담이라는 분야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에 대한 감도 왔다. 이 학회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 힘이 되어 그 후로 몇 달간의 유학 준비 기간이 힘들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