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셨다. 매일 아침 우리에게 좋은 글을 써주셨는데 그때 칠판에 적어주신 구절 중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문장이 있다. 매일 좋은 구절을 적어주는 게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내가 교사가 되어 선생님의 본을 받으려 하니 그냥 문장을 찾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독서가 바탕이 되고 그 영향으로 자신도 감명받은 문장이 가슴에 남았고 선생님은 그것을 우리와 나누셨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은 최치원의 <秋夜雨中>을 배운 후에 우리에게 적어주신 구절이다. 세상에 나를 안다는 사람이 많지만,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능히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이 문장이 당시 나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에 대해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다. 가족과 친구와 지인들이 모두 다 나를 안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는 것인지, 정말 내 마음까지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에 생각이 머물자 앎의 실체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나의 외모와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 취향 등이다. 그러나 그게 나의 전부인가? 그건 또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심지어 부부 사이라도 한 인간의 전체 모습을 아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이번에 읽은 앨리스 먼로의 작품 <The bear came over the mountain>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은 남편을 잊고 남편은 그런 부인에 대해 당혹스럽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같이 살며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을 텐데 결과적으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가 아는 부인과 다른 여자를 비교하지만, 그 내용 역시 빈약하기 그지없다. 머리 색깔과 눈빛, 말투와 단정하고 꼿꼿한 성품 등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는데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다 안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은가. 그 긴 기간 동안 그들은, 우리는, 아니 나는 누구를 얼마만큼 자세하게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지음(知音)에 대한 환상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 여겼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까지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 옛날 최치원이 그랬듯이 피 토하는 절규가 남을 뿐이다.
밖에는 비가 온다. 비 오는 날은 맑은 날보다 기억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진다. 기억이 섞이고 새롭게 배합되어 전혀 다른 성격의 감성을 만들어낸다. 최치원의 <추야우중>이 그리운 밤이다.
秋風唯苦吟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나니
世路少知音 세상에 나를 알 이 적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엔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 앞의 마음 만 리를 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