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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y Feb 28. 2023

 후쿠오카에서의 느린 시간

느리고 조용한 후쿠오카에 비친 마음


기울일 모든 에너지를 봇물처럼 쏟아냈다.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전쟁터의 코뿔소처럼 돌격. 뿔이 부서지는 줄도 모른 채 머리를 박고 이 싸움의 우위를 선점하려 드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나도 대학교에,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만만하게 들어갔던 학과에 적응하지 못했다. 몸은 마음에 안식을 두지 못하고, 마음은 몸에서 멀어져 그 마음의 자리를 텅- 비워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여행을 하고,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나는 지우개로 어설프게 지워진 연필 자국처럼 흐려졌다.


이런 상념을 가득 안고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행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절정에 달하고,

설레는 마음이 실제 여행에서의 경험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그런 본전의 마음이 실제의 경험을 더 크고 윤택한 시간으로 만들어준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의 마음은, 가기 전 떨림보다 낯선 바닥에 떨어져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적응하고

그곳에서 만난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할 때 더 큰 여행의 성취감을 얻곤 한다.

이번 여행의 동반자는 언니다. 낯선 곳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건 내 옆에 있는 나의 언니였다.

10년 전, 어딜 가나 언니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 손가락으로 언니 팔을 꽉 쥐고 이리저리 쫓아다녔던 나.

이번 후쿠오카에서도 그런 여정이 될 것 같다. 작게는 길 찾기, 돈 관리, 낯선 곳에서의 여행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그런 일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언니에게 넘겼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멀지만 가까운 도시, 후쿠오카.

한국으로 치면, 수도권에서 조금 벗어난 대전이나 광주 같은 도시라고 전해 들었다.

명란과 뽀얗고 기름진 모츠나베, '일본 여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츠란 라멘 본점이 바로 이곳에 있다.

온갖 달콤하고 예쁜 디저트들이 거리 상점에 즐비해있고,

거리에 섞여있는 신사들의 외관은 꽤나 이색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언니랑 나는, 첫날, 하카타역 부근에 있는 숙소에서 나머지 3박의 일정은 하카타에서 멀지 않은

텐진역 근처의 호텔에서 머물렀다. 하카타역과 텐진역은 후쿠오카를 대표하는 중심 지역이다.

여행지 검색 때 자주 잊히던 이름이었는데, 사흘을 거닐고 집에 오니 서울 지하철 노선도 어딘가에 적혀 있을 것만 같은 익숙한 기분이었다.



뚜벅이 코스로 사전에 마음먹어 두었던 우리는 아침 8시부터 준비를 하고 나와 후쿠오카를 걸었다.

큰 뭉치의 계획만 남겨두었다. 예를 들어, 캐널시티의 오코노미야끼. 다자이후에 있는 우메가에모찌.

큰 뭉치 대부분이 음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루 일정의 하이라이트를 정해두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뒀다. 그리고 그 여백을 길가의 선을 따라 대책 없이 걸었고 또 걸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후쿠오카를

3일 내내 걸었고, 걸으며 주변을 보았고, 다시 걸으며 춤을 췄고, 후쿠오카를 최대한 담아보려 애썼다.



아침의 후쿠오카, 점심의 후쿠오카, 노을이 지는 후쿠오카, 바람이 부는 후쿠오카, 창백한 골목의 후쿠오카, 밤거리의 후쿠오카. 5일이라는 타임 퀘스트가 걸린 간헐적 여정이었지만, 정착하지 않은 철저한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곳의 다채로운 풍경을 봤다. 우리가 걸었던 후쿠오카는 대체로 조용했다. 서울의 시내처럼 빵빵거리지 않았고 미세한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눈앞이 1초간 24장의 연결로 흘러갔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우리는 문자를 그림으로 봤고, 정보를 풍경으로 느꼈다.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 동일한 순간에 그곳의 장면이 사진처럼 한 장 한 장 기억에 포개져갔다.


하카타역과 텐진역을 잇는 나카스강이 있다.

나카스 주위에는 달달한 기름 냄새를 풍기는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다.

낮에 보았던 차분한 공기의 나카스 강은 밤이 되면 반전된다. 긴 전깃줄에 달린 노란 알전구 조명이 달랑달랑 거리며 사람들은 야키토리와 생맥주를 먹기 바쁘다. 야키토리는 닭꼬치와 비슷한 작은 닭구이인데, 일본식 꼬치라고 생각하면 엇비슷하게 알맞을 것이다. 이런 포장마차와 강가에서 조금 더 걷다 보면, 현란하게 반짝거리는 유흥가가 나온다. 나카스강은 포장마차로도 유명하지만, 일본 최대의 환락가로도 이름을 알린 곳이다. 사실 우리는 이 골목을 밤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관광객들처럼, 어김없이 포장마차에 가서 야키토리를 뜯고 생맥주를 마시려고 했지만 어딘가 나카스 강의 밤거리는 내키지 않는다는 감정이 마음에 꽂혔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만난 작은 감정을 수용했고, 또 다른 길가의 선을 따라갔다.


#비공식 이야기


밤마다 호텔에 돌아가 일기를 썼다.

사흘 내내 언니는 나보다 먼저 잠에 들었고, 나는 혼자서 창문 옆 소파에 남았다.

언니가 잠들어버린 순간에 나는 철저하게 경계 지어진 후쿠오카의 이방인이었다.

후쿠오카의 밤은, 낮보다 시끄럽다. 호텔 벽 사이로 앞 블록 재즈 바의 둔탁한 드럼 소리도 들리고

새벽 5시에는 난데없이 윗 위층에서 튼 클럽 음악이 울려 퍼졌다. 겉보기에 멀쩡한 이불을 머리끝에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관자놀이에는 산모기에 물린 듯한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후쿠오카에서의 모든 일이 생소하기만 했다. 낯선 곳에서의 나. 이곳에서의 모든 현상들, 주위의 풍경들. 조용함을 넘어 깊은 고요로 채워진 후쿠오카와 곁에 들리는 파형 높은 음악들. 한없이 잠겨 내려가는 생각들 주위를 통통 치고 올라오는 자극들.

목적을 갖지 않고 떠나온 여행에서 문득, 목적에 대한 생각으로 잠겼다. 그 목적들은 인공적이지 않았고 억지로 꺼내 올려진 산물이 아니었다. 물건들로 어지럽혀진 곳에서 청소의 심각성을 느끼고 잠자코 정리한 뒤,

조용히 앉아 비워진 것들을 발견하고 채워야 하는 작은 의무와도 비슷했다. 그런 목적을 한 줄 한 줄,

내 식의 표현으로 정리하다 보니 서서히 잠이 왔다. 그리고 그 시간, 모든 마음들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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