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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수 Sep 03. 2021

무슨 일 있어도 그 강에는 가면 안돼


    얕은 강에서 익사한 아이   


여름이 되면 엄마는 몇 번이고 내게 다짐을 받았다.

"아무리 더워도 그 강에는 가면 안 된다. 친구들이 아무리 가자고 해도 안돼! 알겠지?"

아이들은 여름이 되면 '어린이 해수욕장'이라고 꽤 괜찮게 이름 붙여 놓은 강에서 여름 햇살과 함께 익어 갔다.


그곳은 주로 에너지를 주체 못 해 미쳐가는 사내아이들의 아지트였고 다리 아래로 슬쩍 본 아이들은 다이빙도 하고 물장구도 치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애들이 지나가면 자기들끼리 괜스레 더 심하게 장난치며 옆 친구 팬티를 까내리는 꾸러기도 있었다. 더이상은 탈 수 없을 만큼 까만 몸에 엉덩이만 낮에 뜬 흰 달처럼 하얘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던 것은 시꺼먼 남자아이들만 있어서가 아니었다.

엄마의 말이 아니더라도 여름만 되면 그곳에 가지 말라는 담임 선생님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다. 그곳에서 죽은 학생 이름과 함께 말이다.


선생님의 입수 금지 명령이 있는 날에는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할 것 없이 지금까지 전설처럼 내려오는 물귀신 이야기가 총망라돼, 여자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꺄꺄' 거렸다. 친한 친구가 변을 당한 적은 없었지만 가엾게도 아이들은 매년 일을 당했다.

 

얼굴 없는 물귀신이 갑자기 다리를 잡아당긴다는 둥, 아이를 빠뜨린 엄마 귀신이 자기 아이 삼으려 딸과 닮은 아이를 데려간다는 둥 허나 그뿐이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우리 학교 남자아이들은 죄 그곳에 모여 있었다.

물귀신이 여름마다 아이들을 잡아가는 곳, 들어가면 절대로 안되는 공포스러운 장소! 내게 강이란 그런 곳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야? 귀신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거지 안 그래?”

“그래도 깊은 곳도 있었겠지. 물에 빠져 죽은 거라며?”

“아니라니까! 나도 가 본 적이 있다고. 장마가 아니고는 늘 깊이가 일정해. 어른 무릎밖에 안 오는 깊이야. 어디를 가도. 그러니까 물귀신이 잡아갔다는 거지.”


우리 집에 모인 아주머니들은 며칠째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엄마와 친한 학원 원장님 아들이 가족 여행으로 물놀이를 갔다 죽었다. 본 적은 없지만 그 애가 나와 같은 고등학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묘한 것은 그 강이 꼬맹이들도 놀기 좋은 아주 얕은 강이라는 점이었다.

사정을 파보면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들을 보낸 당사자에게 확인할 수 없던 아주머니들은 며칠째 흉흉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공부를 잘한다고, 커서 공군이 되고 싶어 한다고 그렇게 바람결에 안부를 듣던 얼굴 모르는 아이의 죽음도 쇼크였지만 얕은 강에서 일어난 미스터리가 내겐 더욱 큰 쇼크로 다가왔다.

역시 강에는 물귀신이 있는 거였다. 얕은 강이건 깊은 강이건 어떡해서든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 '얼굴 없는 그녀'   


최근 내가 코로나에 걸리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서로 격리 생활을 하며 힘들었다. 우리는 군마(群馬)의 한 온천으로 가족 여행을 결정했고,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쉬자고 입을 모았다. 창 밖으로 들려오는 새소리,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웠다. 식재료의 자연스러운 맛을 최대한 살린 호텔 음식은 지친 기운을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고 야외 온천에서 신록을 보며 누덕누덕 붙어 있던 피로를 걷어냈다.


"오늘은 오후 1시부터 패들보드(SUF) 체험을 할 거야. 보드를 타고 호수 깊숙이 들어가서 즐기는 건데 그렇게 무섭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엄마. 우리 모두 엄마 옆에 있을게."


담박하면서도 정성 담긴 아침 식사를 기분 좋게 즐기고 있는데 이번 여행의 스케줄을 담당한 딸의 입에서 믿기 힘든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는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얕은 강에 가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물은 무섭다. 겁보에 쫄보인 데다 수영도 하지 못한다. 강이고 바다고 안전사고 관련 뉴스는 매해 미디어를 장식하는 단골 뉴스 아닌가.


무엇보다... 강 속에는 물귀신이 '절찬 대기!' 중이란 말이다. 내가 목표가 아니라 할 지라도 어여쁜 내 아이들이나 남편이 타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니라도 함께 있던 주변의 누군가가 물귀신에게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본다면 일생 괴로울 수밖에 없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캔슬해. 엄마가 웬만하면 맞춰 주는데 이것만은 할 수가 없어. "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러나 내 말에 무게를 싣기 위해 단호히 사족없이 말했다. 살면서 이런 엄마를 몇 번 보지 못했을 딸은 사태 파악을 바로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가 무서워할 것 알았는데 우리 가족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어. 미안해. 전화할게"

여행 중이니 어찌어찌 묻어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을 딸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이건 안 될 말이다. 한 번 즐겁자고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일개 인간에 불과한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엄마! 캔슬할 수는 있는데 돈은 100프로 다 내야 한대. 한 사람당 6천 엔씩이니까 2만 4천엔(25만 3천 원) 내야 할 것 같은데. 돈도 직접 그 장소까지 가서 현금으로 내야 하고."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다. 보통의 경우라면 소비자 센터에 전화해 저촉되는 사항을 알아보고 대응했겠지만 예약시 캔슬 관련된 확인 체크란이 있었다고 하니 도리가 없다. 시커먼 몸과 반짝이는 눈, 레게 머리와 레게풍 옷을 입은 강사와 함께 호수로 향했다. 우리 이 외에 다른 두 가족도 함께였다. 


산 중턱 내리막 길에서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 호수를 보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호수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깊어 보였다. 게다가 보안 요원이 두세 명 있을 줄 알았는데 레게 머리 혼자다. 그냥 나만 캔슬료를 물고 차에 있을까? 실망할 딸아이의 얼굴이 그려졌다.


'안 무서울 수도 있어. 생각보다 재미있을 수도 있고. 정 무서우면 하다가 슬쩍 빠져서 차로 가면 되잖아. 아이들은 한창 즐기고 있을 터이니 처음부터 안 가는 것보다는 덜 서운할 거야. 괜찮을 거야. 안전할 거야.' 

강사가 나눠준 구명조끼를 계속 손톱으로 뜯으며(튼튼한지 확인 중) 나는 생각했다. 


    여름 호수에 발을 담그고  


처음에는 보드 위에 앉아 노를 저었지만 차차 익숙해지면서 강사의 지시에 따라 서서 노를 젓는다든지 보드의 방향을 바꾸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물에 빠지면 아니 물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처음 만나 어색하던 분위기가 서로의 보드가 부딪치며, 물에 빠진 옆 사람을 건져주며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강사가 보드에서 물구나무를 섰을 때 사람들은 "오오오오!" 하는 감탄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난 노를 꼭 잡고 웃지도 박수를 치지도 않았다. 방심하다가 물에 빠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들과 단 둘이 온 턱수염 무성한 아저씨는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소리 지르며 일부러 강에 빠졌다. 50대가 넘어 보이는 그 아저씨는 안경을 잃어버릴 뻔했는데도 아랑곳 않고 하얀 이를 씨익 드러내며 물속으로 몸을 날리고 또 날렸다.


"아아아아악!"

아저씨 함께 온 남자 아이가 신경쓰여 어디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는데 젊은 아가씨의 보드가 뒤에 와서 부딪치며 둘다 퐁당! 들어찬 물 때문에 코가 찡하고 시야가 흐려졌다. 허부적대며 보드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가씨가 건너편에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했다. 손사래를 치며  애써 웃어 보이다 진짜로 웃음이 나왔다. 보드에 다시 올라가는 게 좀 어려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에 빠져 보니 참 시원했다. 턱수염 아저씨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그제야 느껴졌다. 자꾸만 내 볼을 간질이는 강바람은 좀 전의  바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깨어났다. 바람이 강을 쑤석거리면 나도 함께 '출렁' 했고, 바람이 고요하면 나 역시 새초롬해졌다. 산봉우리를 감도는 새하얀 구름은 차 안에서 본 구름과 달랐다. 무엇보다 가슴 풀어헤친 호수의 속살을 느껴보는 경험은 각별했다.  호수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은 시원하다 못해 오싹했고 오른편 구석쟁이에 있는 폭포는 '콰아아아! 콰아아아!' 우렁차게 우리를 환영해 줬다. 


물 밖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맛 봤다. 호수 품에 안겨 하나된 편안함. 딸아이가 아니었으면 내 손으로 경험했을 리 만무한 패들보드를 통해 그날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보다 남은 호수와 하늘과 햇살을 마음에 담아 왔지만 무엇보다... 나는 이 여행에서 그동안 내 다리를 잡고 놔주지 않던 물귀신을 떠나 보냈다. 다정한 강이 나를 보며 잘했다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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