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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설공주 Jul 24. 2024

운전면허

10년 후?

  얼마 전에 21년 차 이민자가 되었다. 내 인생 3분의 1을 이민자로 살았고 그와 함께 21년 차 운전경력자가 되었다. 자동차와 운전은 이민 생활의 변수이자 상수였다.  

얼마 전에 남편이 운전면허를 경신하면서 구시렁거렸다. 벌써 10년이 지났나, 세월 빠르네, 내가 다시 10년을 더 살겠나, , 10년이 더 지나면 내 나이 몇이고... .  그때는 뭔 말이 저리 많노, 했는데 내 차례가 되니까 이제사 이해라기보다는 그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21년 전 겨울, 치치에 두 아들과 입국했다. 국제 면허증은 있었지만 순전히 장롱면허였다. 그보다 앞서 1년 반전에 동생의 이민 입국길에 따라와서 석 달을 지냈다. 그때도 국제 면허증을 갖고 왔지만 폼생폼사였다. 그럼에도 묘하다. 그것 갖고 고물 차 운전을 하리라고 상상인들 했을까.

 

젊음과 무식의 소치라, 대단히 용감했다.

자동차 보험은 생각도 안 했다. 시동 걸고, 시동 끄고, 주차하는 걸 두어 번 해보고는 도로로 나섰다. 언젠가부터 그 생각을 하면 무섭다. 앞뒤에 예전의 나와 같은 그런 운전자와 차량이 서 있을까바서.


내 나이 42살 하고 육 개월 정도였다. 그때의 나, 참 어렸는데 늙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나이 절반을 더 산 요즘 나는 내가 늙었다는 생각을 안 한다. 아니 나이가 들어서 좋다. 다시 그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맘이 놓일 정도이다.


그나저나 지난 21년, 운전하며 있었던 썰을 풀자면 공책 한 권 갖고는 안된다. 맨 처음 차는, 이름하여 빨강차, 닛산 센트라 1.5, 1986년인가 그랬다. 거창하게 말하면 생애 처음 차였는데 그때 조수였던 청년과 동생이 터너 옥션에서 사 왔다, 그때 비자를 받겠다고 일을 시작했던 교민 업체가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교외에 있었다.

처음에는 천지분간을 못했기에 그쪽 동료들의 동냥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이제 와서 말인데 나이 마흔둘에 처자식을 놔두고 혼자 와서 있지도 않은 길을 뚫겠다고 나선 나도, 그래보라고 부추긴 사람들도  제정신은 아니었을 거다.

그때 나는 무지 젊었기에 어마무시 무지했다. 처음 그 동냥차를 타고 다니면서 한두 주일이 지나자 아연 내 처지가 돌아보였다.

죄다 영주권자 또는 시민권자, 학생 비자 등등의 동료들에게서 나는 을 중의 을이라, 내 처지를 견딜 재간이 없었다, 출퇴근을 그쪽 사정에 맟춰야 한다는 것이 꽉 다문 입술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은 차를 사자고 덤볐다. 그때 차값이 등록까지 다해서 1,100불 정도였다.


두 달 일했던 업체에서는 비자를 신청하자고 했지만 그때 내 생애 처음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 그래서 집으로 돌아갔다. 2001년 12월 초순, 여름인 치치에서 돌아온 부산의 칼바람이 어찌 그리 춥든지. 그 칼바람 덕에 오늘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도 책 한 권 짜리인데 다음으로 미루겠다.


2003년 여기 겨울에 들고 왔던 국제면허는 11개월을 다 채워서 풀라이센스 면허에 도전했다. 그때 형편에는 시험값도 빠듯한지라 미룰 때까지 미루다가 시작했다. 필기시험은 바로 통과했지만 도로 주행이 문제라, 세 번을 미끄러졌다. 날짜와 시간을 가게 사정에 맞춰야 하고, 임시 면허 처지가 될까, 그리하면 보험은 어짜노, 온갖 것이 쫄게 했다.

세 번의 낙방 동안 친구들은 에지간히도 내 편을 들어줬다. 요새 키위들이 이민자들을 봉을 삼는다, 뭐 그런 인간들이 다 있노, 다음에는 꼭 합격할거야 등등.

키위 시험관들도 할 말이 있을 거다. 이민자들을 봉을 삼아서가 아니고 모르는 걸, 잘못하는 걸, 이민자라고 봐줘야 하냐? 이제사 고백인데 나 그때 운전 형편없었다. 내 멋대로 배워서 내 멋대로 돌아다니고 청소라고는 안 하던 차 꼴하며... .

나도 할 말이 있다. 차라는 것이 엔간히라도 봐줄 것이 있어야지. 어디로 봐도 흠집이고 벗겨진 도장은 말 그대로 101마리 달마시안 급인데 세차는 뭔 세차... . 애고 부끄러워라, 지금도 그러고 다니긴 하지만 차가 그때보다는 눈꼽만치 정도 나은 덕이고. 처음 시작할 때 제대로 배웠으면 어땠을라나 모르겠다. 지금도 내 차에 동승하는 사람이 있으면 엔간히 쫄린다.


그 눈물고개 운전면혀증을 받고서 10년이 지난 10년 전, 다시 경신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시력이 문제였다. 결국에는 시력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장 안경을 쓰지는 않아도 된다,였기에 그때는 넘어갔다. 이후 언제부턴가 안경 없이는 한시도 불편한 처지가 되었다.


10년 전 면허증 속의 나는 내가 좋아했던 회색 니트 웃도리를 입고 특유의 약간 한쪽으로 기운 표정을 짓고 있다. 흰머리가 많았지만 그래도 미장원에서 손질한 티가 났다.

뜻밖에도 면허증 사진에는 안경을 벗어야 한다기에 앞을 보기가 불편했지만 요즘 사진 속 나는 집에서 대충 잘라낸, 흰머리가 죄다 덮은 할매 포스가(?) 철철, 팍팍이다. 그냥은 그리 안 보인다 카는데 사진은 와 이리도 정직하노.

42살 젊은이가 늙었다는 생각을 했고, 63살 젊은이는 내 생애 최고로 젊은 날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시력 저하와 흰머리가 지름길로 왔다.


10년 후, 남편 말마따나 내가 운전면허를 경신하는 날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바라기는,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날까지 운전만은 내가 하고 살 수만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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