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을 다룬 소설, <하얼빈>
<일본 법원 판사와 안중근의 대화>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더 말하라.
-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 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장.
- 여기까지 오기는 왔구나. 여기서부터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다시 가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사형장까지.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국선변호인 미즈노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 공의 진정이 피고인에게 스며들지 않았고, 의붓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를 베풀어도 자식이 그 생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은 인지상정이라고 미즈노는 안중근을 변호했다.
넓은 도량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신 이토 공은 자신을 해친 범인에 대해 극형을 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피고인을 극형에 처한다면 이토 공은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이토 공을 경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변호인 미즈노는 말했다.
검찰관은 안중근의 범죄가 무지와 오해의 소치이며, 이것이 살의의 바탕이라고 말했고, 변호인은 이 무지와 오해는 동정할 만한 것이고 감형의 사유가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이 가지런하게 잇닿아서 서로를 꾸며주고 있었다.
- 안분도 : 안중근의 장남이다.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 안정근 : 안중근의 동생으로 여섯 살 연하이다. 안정근은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모병, 교육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지 상해에서 사망했다.
- 안공근 : 안중근의 둘째 동생으로 나이 차이는 열 살이다. 1939년 5월 중경에서 실종되었다.
- 안명근 : 안중근의 큰아버지인 안태현의 장남이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십 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에서 죽었다.
- 김아려 : 안중근과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상해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6년 상해에서 죽었다.
- 조마리아 : 안중근의 모친. 안중근의 거사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그후 다른 유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1927년 상해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