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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Sep 26. 2022

30살, 일본 제국의 총리를 죽이다

안중근을 다룬 소설, <하얼빈>

#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


나는 소설은 잘 안 본다. 나는 경제, 사회, 과학 같은 분야의 책을 주로 본다.


얼마 전 거의 몇 년 만에 소설을 읽었다. 이 책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최소 한두시간은 몰입했다. 며칠 만에 다 봤다. 책 읽으면서 이야기가 안 끝나길 바랐다.


김훈 작가의 장편소설, '하얼빈'이다.



이 책은 청년 안중근을 다룬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는 과정, 죽이는 과정, 그리고 감옥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쇠락하는 조선왕조와 성장하는 일본제국이 절절하게 대비되어 있다. 


안중근은 30살의 나이에 거사를 감행했다.

나는 100년 전에 살었던 동년배 청년 이야기를 재밌게, 부끄럽게, 무겁게, 안타깝게 읽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재미있다. 의미있다. 시간 잘 간다. 생각할 거리도 많다.


나는 뭘 생각했을까?




# 안중근


* 박스 안은 인용구


첫 번째 생각 : 부끄럽다


<일본 법원 판사와 안중근의 대화>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안중근과 나는 동갑이다. 누군가는 이 나이대를 가장 창창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안중근은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마주한다.


안중근은 재판에게 말한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도망가야 는가?'


나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30살의 나이다. 암살 후 도주하고, 더 크고 더 많은 일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 유리한 증거가 있으면 더 말하라.

 - 나는 증거물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 다만, 나의 목적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렇게 깊이 나간다면 공개를 제지할 수 밖에 없다. 방청인들은 모두 퇴장.


안중근은 '이토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토를 죽였다. 당당히 체포고, 죽음까지 감내한다.


오히려 재판장 그의 입을 막는다. 재판장이 피의자를 무서워한다.


일본 제국이 말하는 '동양 문명의 진보와 평화' 거짓이. 안중근은 이 주장을 조선에, 일본에, 세계에 말하고 싶었다. 그걸 위해 목숨을 던졌다.


뭔가 부끄다.  머릿속에는 워라벨, 커리어, 자산, 가족, 친구 등 협소한 이익만이 가득하다. 작은 불의에 굉장히 민감하, 큰 불의나몰라라 한다.


의무적으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공동체, 대의, 정의, 이런 사라졌다. 나는 그저 적당히 일 끝내고, 퇴근 잘 하고, 아내와 놀고, 친구와 놀고, 가끔 책 보고, 놀러가고, 좋은 커리어 쌓고 싶어하는, 소시민이다.


옛날에는 큰 사람이 되길 원했다. 아니다. 나는 무뎌졌고, 협소해졌다. 내 주위를 잘 챙기는 것도 벅차다. 사회? 정의? 에이..


그러나 동년배 안중근은 안 그랬다. 그는 자신이 이뤄야할 공동체적 목표와 소명을 인식한다. 목숨까지 던진다.


그의 열정, 그의 희생. 동년배 맞아?


두 번째 생각 : 짠하다


- 여기까지 오기는 왔구나. 여기서부터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말을 해야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다시 가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여기서부터 사형장까지.

안중근은 몸속에서 버둥거리는 말들을 느꼈다.


안중근은 목숨과 발언 기회를 맞바꾸려고 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다. 조선 독립의 당위성, 일본 제국의 폭력성.


그런데 그의 말이 밖에서는 잘 안 들린다. 그는 말할 공간이 없다. 짠했다.


당시 조선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확히는 조선 왕조가 그런 메시지를 일본에 전달했다. 그래, 조선 왕조는 일본에게 미움을 받기 싫었겠지. 조국의 지배층도, 안중근을 응원하지 못했다.


일본당연히 안중근을 덮었다. 걔네들은 똑똑하다. 그래서 조선을 합병할 수 있었다. 러시아까지 제압하고, 청나라까지 노린다. 안중근의 의도쯤이야, 쉽게 간파한다.

 

'너는 지금 일본 제국의 부당성을 이야기하고 싶겠지. 시스템을 문제삼고 싶겠지, 근데 렇게 놔두지 않겠다.' 일본은 생각했을 거다.


일본은 안중근을 무식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안중근은 일본의 진의를 오해한 미치광이다. 일본은 미개한 동양을 개화하는 문명의 진보자다. 진보에는 반동이 있고, 안중근은 반동이다.


아래는 안중근의 변호인의 말이다.


국선변호인 미즈노는 피고인의 범행은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피고인이 일본 같은 문명국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이러한 오해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토 공의 진정이 피고인에게 스며들지 않았고, 의붓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를 베풀어도 자식이 그 생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은 인지상정이라고 미즈노는 안중근을 변호했다.

넓은 도량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신 이토 공은 자신을 해친 범인에 대해 극형을 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피고인을 극형에 처한다면 이토 공은 지하에서 눈물을 흘리실 것이고, 이것은 돌아가신 이토 공을 경모하는 길이 아니라고 변호인 미즈노는 말했다.

검찰관은 안중근의 범죄가 무지와 오해의 소치이며, 이것이 살의의 바탕이라고 말했고, 변호인은 이 무지와 오해는 동정할 만한 것이고 감형의 사유가 된다는 취지로 말했다.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인의 변론이 가지런하게 잇닿아서 서로를 꾸며주고 있었다.


안중근은 일본 제국의 침략성과 폭력성을 빨리 파악하고, '동양평화론'이라는 대항논리까지 구상한 똑똑한 청년이다.


그렇지만 안중근은 멍청이가 됐다. 권력자가 그렇게 정의했다. 안중근은 발언 장소가 없다. 안중근은 남이 만든 장소에서 남이 만든 옷을 입고 전시됐다. 바보로 전시됐다.


30살의 동년배가 목숨을 던졌다. 그러나 그의 말은 묻혔다. 조선 왕조가 미워졌다.


무능한 왕조, 무능한 지배층, 무능한 나라. 불쌍한 국민.


세 번째 생각 : 열받는다


 - 안분도 : 안중근의 장남이다.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 안정근 : 안중근의 동생으로 여섯 살 연하이다. 안정근은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모병, 교육에 헌신했다. 광복 후에 귀국하지 못하고 망명지 상해에서 사망했다.

 - 안공근 : 안중근의 둘째 동생으로 나이 차이는 열 살이다. 1939년 5월 중경에서 실종되었다.

 - 안명근 : 안중근의 큰아버지인 안태현의 장남이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십 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에서 죽었다.

 - 김아려 : 안중근과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상해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6년 상해에서 죽었다.

 - 조마리아 : 안중근의 모친. 안중근의 거사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고, 그후 다른 유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1927년 상해에서 죽었다.


안씨 가문의 이야기다.


풍비박산 났다. 20세기 초까지는 일본 제국이 지배했다. 안씨 가문은 쉽지 않았을 거다.


렇지만 대한민국이 건립됐다면 좀 달라져야 했다. 아다. 많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집안까지 박살났는데, 보상이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공자의 후손들은 적어도 중산층이 될 수 있는 경제적, 금융적, 사회적 혜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돌아간다.


이건 어떻게 보면 투자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을 위해 '희생'을 하면, 챙겨줘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조직이 굴러다. 희생에 대한 대가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조직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누가 조직을 위해 일하겠는가?


국가도 똑같다. 그런데, 그렇게 되나? 잘 모르겠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이 책은 잘 만든 드라마 같다. 책에서 눈을 돌리기 어렵게 만든다.


청년 안중근의 심리 묘사가 흥미롭다. 역사책에 적혀있던 안중근 의사는 그저 위인이었는데, 이 책의 안중근은 동년배 누군가다.


그는 어떤 마음을 먹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까? 그리고 그 스스로를 죽였을까?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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