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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May 09. 2024

선비 정신, 이제 싫다

조광조를 다시 보게 됐다 - '조광조 평전', 신병주

# 선비 정신


청소년 시절, 나는 '선비 정신'이 추구할 만한 가치라고 교육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게 뭐길래?


어려운 학술적 정의 대신, 두산 백과를 뒤져봤다. 여기서는 선비정신을 '사대부로서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인격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며, 세속적 이익보다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규정한다.


맞네. 내 기억과 비슷하다. 열심히 공부한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다. 지조를 지킨다. 그리고 조광조라는 인물이 조선의 대표 선비라고 배웠다. 나는 그를 개혁을 시도하다가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선비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광조를 다시 만났다. 도서관에서 건국대학교 역사학과 신병주 교수가 쓴 '조광조 평전'이 눈에 들어왔다. 재밌어 보여서 바로 빌렸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과거의 나는 선비 정신을 멋있게 봤다. '앎'을 성취한다. 이걸 지키려고 목숨까지도 버린다. 비장하고 무겁다. 조광조가 그랬다.   


난 이제 30대가 됐다. 조광조 평전을 읽으니 오히려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선비 정신이 따를만한 가치가 아닌 것 같은데?'


# 조광조는 누구인가? : 조광조 평전


* 박스 안 or "~" 안은 인용구


조광조는 선비 중의 선비다. 저자는 조선의 대학자인 조식, 이황, 이이가 거의 공통적으로 "조광조에 대해 깊은 존중을 표시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 꼿꼿했다. 다음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광인(미친 사람) 이라거나 화반(화의 태반)'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에게는 물론 남에게도 엄격했다. 친구관계가 끊어질 정도니 미움도 받았나 보다. 별명이 미친놈, 화를 자초하는 놈이다.


똑똑한 사람이 '칼 같은 말'을 휘두르면 무섭다. 그는 똑똑하기까지 했다.  


1510년(중종 5년) 과거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성균관에서 치른 알성시에서도 2등으로 급제하여 국왕인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29살에 과거 급제했다. 박현순 서울대 교수는 조선 시대 과거시험 합격자 평균연령이 36.5세라고 말한다. 조광조는 남들보다 빠르게, 성적도 우수하게 합격한 셈이다. 초시는 장원, 알성시는 2등으로 통과한 최상위 인재였다.


물론 그가 장원 급제 했다고 역사가 그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수석은 매 시험마다 나오지만, 후대가 그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조광조를 기억하는 건, 그가 '개혁 선비'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이상정치-도덕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유교 왕국을 만들기 위해 '경연의 상시화, 유교 경전 보급 확대, 도교문화 타파, 인재등용 방식 변경(천거제)'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은 왕국이다. 개혁 정책은 당시 왕이었던 중종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왜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줬을까?


중종반정은 명목상으로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반정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제 권력은 반정을 주도한 훈구공신들에게 있었다.


중종은 쿠데타로 왕이 됐다. 하지만 쿠데타는 기득권 양반이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는 반란의 주인공이 아닌 수혜자였다. 발언권이 구조적으로 약하다. 그는 회의가 끝났어도 신하들이 퇴장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배웅했던 왕이다.   


나는 이런 상급자가 상상이 안 된다. 상급자 퇴장 후 하급자가 퇴장하는게 동서고금 보편적 관행 아닌가? 이런 상황이니, 중종은 쿠데타 주도 세력인 '훈구공신'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세력이 절실했다.  


결국 조광조는 중종이 데려온 '메기'인 셈이다. 중종은 기존의 정치 문법과 세력에 도전하는 조광조의 정책을 적극 지원했다. 훈구파 세력의 농촌 권력을 약화하는 (1) 향약의 보급, 개혁 성향의 선비를 손쉽게 초빙하는 (2) 천거제 도입이 대표적이다.


나에게 '유교사회 실현'이라는 조광조의 이념은 아무런 감동도 감흥이 없다. 그저 '옛날에는 그랬구나' 싶다. 다만, 조광조로 대표되는 신진 세력과 중종을 왕으로 만든 훈구 공신세력간 긴장과 다툼이 치열했겠다는 생각만 든다.  


대신 방법론의 측면에서 봤을 때, 조광조의 개혁은 위험하고 대책없어 보였다. 그는 자기 주장과 가치관만 강조하 꼿꼿한 태도를 유지한다. 왕에 대한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아래 인용구는 중종이 도교의 제사장소인 소격서 혁파에 미적거리자 조광조가 올린 상소문이다.


한 고을의 수령일지라도 한 고을의 민정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야 한 고을의 정사를 보전할 수 있는데, 더구나 임금이 나라에 있어서 어찌 공론을 버리고 군정을 어기고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인정이 크게 어그러져서 그릇된 뒤에는 구하려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충격 받았다. 조광조는 겁박을 해서라도 자신의 아젠다를 납득시킨다. '신하들 말 잘 들으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집 부리지 마시고. 우리 말 안들으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선비 정신이 이렇게 공격적일 줄 몰랐다.    


중종은 굴복한다. 왕은 소격서를 폐지시킨다. 조광조가 정치 목표를 성취시켜가는 방식이 시종일관 이렇다. 그는 향약 보급, 천거제도 도입 등 여러 성취를 이룬다.


조광조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중종반정 과정을 재검토하자고 말한다. 공신으로 등극한 사람 중 걸러내야 할 사람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건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다. 중종을 만들어낸 쿠데타 과정을 다시 짚어야 한다. 중종은 피하고 싶다. 자신의 정통성도 공격받을 수 있다. 그는 조광조에게 굳이 이걸 왜 해야 하냐고 반문한다.


조광조는 거침없다. 그는 공신을 추려내는 과정이 잘못됐다는 자신의 판단을 고수한다. 타당한 측면도 있다. 평전의 저자는 "중종 대에 단행된 정국공신 책봉은 일단 그 숫자가 12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공이 없으면서도 친익척이거나 줄을 잘 대서 공신이 된 인물이 많았"다고 말한다. 


다만, '개혁 선비' 답게 방법이 매섭다. 아래는 그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강혼은 지극히 간사한 사람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빌붙었습니다. 유순은 반정 때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꼴 때문에 이제껏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구수영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데도 오히려 공을 누릴 수 있었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권균은 다 도성 문 밖에 있으면서 공을 얻었습니다


누가, 왜 공신에서 제외돼야 하는지 직격한다. 결국 중종은 이번에도 굴복했다. 조정은 공신에서 제외될 명단을 발표한다. 1519년 11월 11일의 일이다. 조광조의 개혁 방식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4일 후, 조광조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중종은 조광조가 '붕당을 형성했다'고 비판하며 죽이라고 말한다. 평전의 저자는 조광조의 공격적인 정치행태에 왕이 큰 부담을 느꼈을 거라고 말한다.


죽기 직전까지 조광조는 자신을 죽이라고 명한 사람이 중종이라는 걸 몰랐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스탠스를 빠르게 변화시켰고, 조광조는 신진 관료에서 죄인으로 순식간에 격하됐다. 조광조의 죽음 후 대부분의 개혁 아젠다가 흐지부지됐다. 


# 사화의 희생자


조광조는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키려다 죽었다. 그래서 그는 선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앞서 말했듯, 나는 '선비 정신'이 더 이상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위험해보인다. 지금의 시대 정신이 되면 안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이유다.


먼저, 선비 정신은 가치관과 철학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까지 각오하라고 말한다. 타협은 비겁함과 나약함으로 치부된다.


나는 '꼿꼿함'을 강조하면 우리 사회가 망한다고 본다. 여러 학자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서로가 서로에게 꼿꼿한 태도로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만을 말하고 상대방과의 대화와 타협이 실종됐다고 진단한다. 


'이탈리아로 가는 길'을 저술한 조귀동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탈리아는 한국과 비슷하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른 산업화를 겪었다. 1960년 전후 ‘경제 기적’이라 불린 고성장을 이뤘고, 1980년대 들어서는 ‘제2차 경제 기적’으로 호시절을 맞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문제로 지적된 것들, 예컨대 방만한 공공 부문과 만성적 재정 적자, 인위적 경기 부양에 대한 의존, 낮은 생산성, 높은 인건비, 투자 부진, 불투명한 기업 지배 구조 등이 바뀌지 않으면서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1990년대 이후 이탈리아 정치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부재로 인하여) 개혁에 나설 추진력을 갖지 못했고, 경제가 정체를 면치 못하며 2021년 1인당 GDP(3만 1,288달러)에서 한국(3만 1,497달러)에 추월당했다 


그는 과거 다섯손가락 안에 손꼽혔던 이탈리아의 경제가 한국에 추월당한 원인을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에서 찾는다. 이탈리아 정치는 비판과 갈등만 있을 뿐 대화와 타협이 없었기에 꼭 필요한 의사결정에 합의하지 못했다. 적시에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고 그래서 내리막길로 나아갔다는 거다.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전례없는 저출산-고령화에 직면하고 있으며 미-중 패권 경쟁의 지리적 중심지에 있다. 세계 경제-산업 구조 변화에 탄력적으로 반응하는 수출의존형 경제를 운영한다. 우리는 빠르게 답을 찾고 변할 수 있어야 살아남는다.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치관과 이념을 고수하기 위해 타협과 설득을 회피하는 '지조있는 선비 정신'은 해롭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의 시대 정신은 '이념 그런거 다 버리고, 생존'이다. 자유무역을 외치는 미국이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산업 보조금을 퍼준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자본을 좇는다.


말과 행동이 같은 나라가 없다. 행동에 따라 말도 유연하게 변화시킨다. 그래야 하니까. 선비 정신은 이걸 방해한다.


둘째, 선비 정신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향만 강조한다.


조광조가 그랬다. 그는 힘의 원천을 몰랐다. 중종의 심기를 무시하고 자기 생각만 외쳤다. 조광조의 죽음 후, 개혁 정책은 원점이 됐다. 나는 그가 타협-소통을 토대로 전략적으로 행동했다면 중장기적인 개혁도 가능했다고 믿는다.  


퇴계 이황도 조광조가 거칠었다고 인정한다. 


조광조는 천품이 대단히 높았으나 학력은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소격서를 없애자고 논한 일만 보더라도 가히 엿볼수 있다. 군신 간의 의리가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이것은 정암(조광조의 호)의 지나친 데라 할 것이다.

임금을 요순처럼 받들고 백성에게 요순의 덕택을 입히려는 것은 군자의 뜻이기는 하나 당시의 사세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할수 있겠는가.


조광조의 전략은 미흡하고 소통은 과격하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성리학적 사회'에 당대 현실을 끼워맞춘다. 그러다 탈이 났다. 아무것도 된 게 없다. 사실 과격한 소통은 쉽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말하는 게 훨씬 어렵다. 그는 어려운 걸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 조광조는 힘의 원천을 파악하고, 가용 자원을 점검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중장기적 기획을 마련해야 했다. 가령, 자신을 지원하는 중종이 심하게 거부하면, 유예해야 했다. 자신의 세력을 기르기 전에 상대편을 자극하는 것도 자제해야 했다. 목숨 걸고 일하는데, 더 신중해야 롱런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여유로움을 가졌더라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때로는 타협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런 태도가 '선비 정신'이 됐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조금 더 유연하고, 실용적인 나라가 됐을 거다.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꼿꼿함을 유지하는 선비 정신은 위험한 것 같다.


이제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큰 이념'간 대립이 사라졌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모두가 실리를 좇으며 싸운다. 이렇다할 명분도 없다. 미국은 중국 부품 들어가면 보조금 안 준다. 중국은 원래부터 명분을 개의치 않았다. 이게 내가 느끼는 2020년대의 시대정신이다.


모두가 명분이나 이념 대신 생존과 실리를 좇는다. 게임의 룰이 바뀌면, 작은 나라인 우리는 그걸 따라야 한다. 꼿꼿함과 지조 대신 부드러움과 유연함으로, 이상향을 향한 지고지순한 이념 대신 차가운 현실 인식과 지혜로운 실리 추구가 지금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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