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잠재력에 관하여
교육을 뜻하는 'education'은 '밖으로 드러내다' 또는 '앞으로 이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교육할 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것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끄집어 내야 한다.
<아직도 가야할 길> - M. 스캇 펙
하레의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어린이집에서 하레는 하루종일 무얼하며 지낼까,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 설렜다.
내가 '학부모'가 되어 아이를 보러 가다니, 어쩐지 신기하기도 했다.
어린이집에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워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좁은 공간 속에서 몇몇 아이들은 큰 소리로 울고, 엄마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기념 사진을 찍으며 시끌벅적했다.
지난 2월 말, 새학기 오리엔테이션을 갔을 때만 해도 하레 혼자만 말도 못하고, 진도도 잘 못 따라가는 아이였다.
이제 하레는 당당하게 반짝반짝 빛나면서 모든 활동을 적극적으로 씩씩하게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첫 미술 수업시간은 모래 놀이였다.
하레가 좋아하는 모래놀이에 더해 바다 동물 모형을 가지고 하는 꾸미기 놀이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다.
두 번째는 음악 동화 수업이었다.
선생님이 수업을 준비하시는 동안 내 무릎에 앉아 있던 하레는 오프닝 음악이 나오자 벌떡 일어나 안무를 깡총깡총 뛰며 따라했다.
춤추면서 씰룩거리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너무 귀여워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음악 수업의 주제는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씨앗'인 '까망이'가 햇님과 천둥, 비, 바람을 만나 시련을 이겨내고 싹을 틔워 결국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합동 공놀이, 악기 합주, 그리고 마지막엔 부직포로 된 꽃 의상을 입고 모든 아이들이 한 송이의 꽃이 되어 마무리했다.
한 명, 한 명 앞으로 꽃처럼 피어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싱그러운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대견했다.
참관수업을 마치고 엄마들이 집에 갈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하나 둘씩 울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역시 아직 다들 아가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늘 당차고 똘똘하던 아이도 눈물, 콧물 짜면서 '엄마 가지마' 하고 울었다.
크다만 어른들에게 하도 치이다 보니 나는 가끔 만3세 아이, 하레에게서 보이는 미성숙함에도 과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제 내 안의 과거의 낡은 렌즈를 통해 아이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레를 더더욱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바라봐 주어야지,하고 다짐했다.
ㅇㅇ이랑 △△이가 너무 울자 담임 선생님은 알아서 할테니, 엄마들은 그냥 가시라고 했다.
결국 너무 울어서 엄마가 데리고 간 아이들도 있고, 아이가 한 눈 파는 사이 서둘러 나간 엄마도 있었다.
하레는 내 품에 안긴 채 착 달라붙어 있었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망치듯 빠져나와 아이를 불안정한 감정 상태속에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레에게 "고모 이따가 올께. 맘마 먹고, 코 자."하고 눈을 보며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두 세 번 반복하자 하레는 '알겠으니까 그만 가봐.'하는 듯한 표정으로 교실에 있는 낮잠 이불에 벌러덩 눕더니 나를 보내줬다.
우와, 예상치 못했던 하레의 의젓함에 놀랐다.
그 날 저녁엔 아빠 직장 회식에 따라갔던 하레가 땀 냄새, 고기 냄새가 범벅이 된 채로 신나게 통통 튀어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 맛있게 먹었어??"하고 묻자, "배 아파."라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은 건지 옆구리까지 빵빵했다.
온 몸을 기쁨으로 빛내며 씩씩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하레가 참 예쁘고 대견하다.
곧이어 1학기 학부모 상담날이 다가왔다.
담임 선생님께서 하레의 장점으로는 관찰력이 좋고, 만들기, 동화책을 좋아하고 적극적이라고 하셨다.
특히 블록으로 '대담하게 만들기'를 잘한다고 하셨다.
가끔 수업시간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하레가 만든 걸 보고 얼른 따라 한다고도 하셨다.
개선되어야 할 부분으로는 가끔씩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는 것과 요구사항이 있을 때 울기보다 말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지적하셨다.
또 앞으로의 배변훈련을 위해 대소변을 쌌을 때 표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외동인 하레에게 친구들과 여럿이 지낼 때의 규칙을 좀 더 가르쳐주길 당부하셨다.
나도 선생님께 하레의 성격적 특징이나 집에서의 하레의 모습등에 대한 추가 정보를 교환하고는 서로에 대한 감사와 격려를 전하고 하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레가 '블록 만들기를 대담하게 잘한다'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땐 '그 정도는 다른 애들도 다 하는 거 아닌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레와 집에서 블록만들기를 하면서도 뭔가 '특별하다'는 걸 느낀 적은 없었다.
그 후, 개인 사정으로 어린이집의 담임선생님이 한 번 바뀌었다.
새로온 담임 선생님께서도 하레의 블록 만들기를 칭찬 하시면서 블록으로 4대의 오토바이를 만들고 그 오토바이가 하나로 합쳐져서 로봇이 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경이롭다'라고 하셨다.
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하레가 '하지말고 같이 놀자'고 했다.
"그릇들이 '고모, 몸이 너무 더러워서 냄새가 나요. 빨리 보글보글 목욕시켜 주세요!' 하는데? 어떡하지? 고모 빨리 설거지하고 와서 또 같이 놀자!"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혼자서 심심했던 하레가 놀이방으로 들어가 블록으로 '강아지'를 만들어서 설거지를 하던 나에게 들고와서 보여주는데 깜짝 놀랄만큼 멋졌다!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서 하레 아빠에게 카톡으로 보내고는 둘이서 감탄하고 흥분했다.
딱히 뭘 가르친 적도 없는데 혼자서 이렇게 잘하는 걸 보면 이게 '하레의 재능'인 건가봐!! 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읏뚜기 비앵이(메뚜기 비행기)'를 만들어서 어린이집에 가져가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만드는 게 재밌고, 결과물로 긍정적인 반응까지 받으니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나는 어째서 하레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걸까?
생각해보니, 어린이집에는 '교구'외에 다른 장난감이 없지만 집에는 이미 완제품 로봇같은 장난감들이 있으니 하레는 굳이 블록을 가지고 놀 이유를 못 찾았던 것 같다.
때론 적당한 '부족함'이 아이를 창의적으로 만드는 거구나.
아이의 재능을 길러주고 키우려고 애쓸 게 아니라 이렇게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걸 내가 막지만 않으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알아보고, 소중히 돌봐주고, 필요한 재료들을 제 때에 공급해주기만 한다면 하레의 재능은 때가 되면 알아서 피어나겠지.
그 후로 하레는 블록을 가지고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날이 디자인이 더 입체적으로 정교해지고 대담하고 자유로워졌다.
하레가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부품들을 조립하고 연결해서 슥슥 만들어 내는 걸 보면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너무 조용해서 놀이방에 가보니 와플 블록을 가지고 "나 지금 헬리콥터를 만드는거야."하더니 두두두두하면서 헬리콥터를 들고 나왔다가, 곧 부수고는 '로봇'을 만든다.
쇼파에서 이리저리 '진지하게' 구상을 하면서 미리 만들어둔 '방패' 두 개를 (한쪽은 동그라미, 한쪽은 네모 모양으로 디자인된) 달아야 하는데 로보트 팔의 적당한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심하는듯 했다.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더니 이런 거였구나.
창조성이라는 원시적이고 거대한 에너지가 '아이'라는 통로로 흘러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레의 만들기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술술 흘러 나왔다.
어떤 조각을 어디에 이어 붙여야 하는지를 그냥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에 대한 검열도 의심도, 비판도, 머뭇거림도 없이 모든 순간을 즐기고 결과물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하레는 블록으로 순식간에 스테고 사우루스, 티라노 사우루스, 스피노 사우루스를 만들었다.
나보고는 프테라노돈을 만들라고 해서 간단한 모양을 만들었더니, '머리뿔'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작은 조각을 하나 머리에 씌워 줬더니, 만족해 했다.
하레가 '대결'을 하자고 하길래 만든 블록 장난감을 업그레이드 하며 갑자기 하레랑 창의력 대결이 불 붙었다.
나도 소극적으로 분위기 맞춰서 놀아만 주다가 하레를 보고 배운대로 자유롭고 호쾌하게 블럭으로 슥슥 전투기를 만들었다.
3년 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마주 달린 2개의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무한하게 늘어서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공포영화의 클리셰같은 이 장면이 마치, '스스로의 주관'이나 '자신'없이 남들의 시선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여러 갈래로 길을 잃은 나 스스로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날 자기전에 읽었던 유년기 트라우마에 관한 한 책에서 '자신이 삶에서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신체감각, 자신이 관찰한 것을 무시하고 타인들에게 맞추고 결국 그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라는 말에 너무 공감했는데, 내 무의식이 그걸 시각화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 본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수없이 많은 내 모습 속에서 길을 잃었다.
작은 나 뒤에 이어져 있는 수 없이 작은 '나'들.
어떤 게 '진짜 나'일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중심, 확신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엄마가 더더욱 왜곡시킨 '나'라는 존재.
엄마가 왜곡시킨 시선으로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
모든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의 모든 시선들을 내면화해버린 나,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 버렸다.
분명 하레의 블록처럼 나도 '무언가' 가지고 태어난 게 있을텐데.
나의 '본질'이 있을텐데.
일단은 '나'부터 찾아야 겠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잘하는지,
나는 무엇을 못하는지,
정말 내가 그렇게나 형편없고 쓸모없는 인간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장점 하나 정도는 찾을 수 있는 건 아닌지.
분명 뭐라도 하나 정도는 있을 거야.
벽에 걸린 거울 하나를 떼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제 단 한 개의 거울만을 마주한 채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관찰한다.
드디어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토마토를 키우려면 땅에 심어야만 하고, 비도 태양도 필요하다.
하지만 토마토만 생각하면 땅도 비도 태양도 쓸모없다.(토마토를 물만으로 키우는 방법에 관한 책을 서점에서 팔고 있지만 난 그 방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태양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땅은 세균이나 썩은 생선도 섞여 있어 더럽고 여러 가지 것이 우글거린다.
나는 코를 붕대로 동여매고 있는 친구가 울다 웃은 덕분에 납작 엎드려 뭔가 알지 못하는 것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쓸모없는 것 따윈 아무것도 없는 거다.
사람도 땅이고, 태양이고 비인 것이다.
나는 쓸모없는 것이 좋았다. 당장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물건이나 무엇에 쓰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물건이 좋았던 거다.
능률이나 성적과는 직접 관계없는 물건이 좋았다. 그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런 것들이 세월을 거쳐서 어떤 쓸모없는 것을 흡수해서 각 사람이 그 사람에게 알맞은 토마토를 맺게 한다고 믿고 싶다.
<친구가 뭐라고> 사노 요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