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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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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Nov 24. 2020

30. 지나고나면 사무치게 그립고 아름다울 순간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어떤 나라의 왕이 온 나라의 현자들을 다 모아서 자기 아들에게 읽게 할 지혜의 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모든 지혜를 간추려 담아 책을 완성하니 분량이 25권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은 더 줄이라고 명령했고, 결국 책 10권에서 또다시 줄여 1권에 담아냈다.

왕은 더 줄이라고 명했고, 현자는 종이 한 장을 왕에게 가져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세상의 지혜를 압축한 단 한 문장, 그것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This too shall pass."




어린이집에서 친구의 생일 파티가 있는 날이면, 늘 생일 주인공보다 더 신난 모습으로 알림장 사진에 찍혀 있곤 하던 하레에게도 드디어 생일파티의 주인공이 될 차례가 왔다.

그 해, 하레의 생일은 일요일이라 그 주의 금요일에 생일 파티를 했다.


하레의 생일 답례품으로 '신나는 여름'을 테마로 얼려서 쉐이크로 먹을 수도 있는 뽀로로 음료수 + 돌고래 모양 미니 물총 + 풍선 + 무설탕 막대사탕을 패키지로 만들었다.

손글씨로 쓴 핑크색 플라밍고 모양의 카드도 하나씩 넣었다.


생일날 아침,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버티던 하레는 "오늘은 하레가 '생일축하합니다! 후~'하는 날이야!"라고 하자 급 태도가 달라졌다. 

선크림도 스스로 챱챱 바르고(매일 아침 안 바른다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다니는데) 신이 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피자(케이크)도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의욕적이 넘치더니, 한 번 뒤집어 엎었다.

얼른 달려가서 수습했더니 다행히 모양이 망가지진 않았다.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자 어린이집에 가는 내내 숨 죽인채 케이크 박스를 소중하게 꼭 쥐고 유모차에 앉아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 날 알림장 모든 사진 속 하레는 광대뼈가 솟아 오른채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친구들에게 받은 선물을 한아름 들고 집에 오는 내내, 집에 와서 선물을 뜯어 보면서도 하루 종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금요일은 어린이집에서, 토요일은 면접교섭을 온 엄마와 또 한 번 생일파티를 했지만, '진짜 생일'인 일요일엔 나도 작은 케이크라도 놓고 다시 한 번 축하해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에 들러 하레에게 줄 작은 초코 케이크를 샀다.

잘 태어났다고.

내 조카로 와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하레는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만 쏙 빼들고는 안으로 도도도도 뛰어 들어갔다.

주말 사이에 하레가 금요일날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씨몽키들도 태어나 있었다.

그냥 라면스프 같아 보였는데, 물에 넣으니까 '생명'이 태어나다니...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봤다.

하레를 식탁에 앉혀 놓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조촐한 세 번째 생일 파티를 했다.




며칠 뒤,  하레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조금 망설이더니, 하레가 집에서는 '괜찮냐'고 물으셨다.

"네, 별 일 없어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혹시 어린이집에서는 내가 모르는 하레의 모습이 있나 싶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생일이 지나고서부터' 조금씩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말을 해도 들은척도 안하고 멍하게 있거나, 장난감 정리를 하는 시간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친구의 장난감을 뺏아서 정리를 해버리기도 한다고 했다. 


하레의 '어떤 모습'을 선생님이 지적하는지 알 것 같아서 "미운 네살의 포문이 드디어 열린건가요?"하고 농담을 하고는 집에서도 가끔 그런다고 했다.


"하레는 '안되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경계에서 장난을 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 - 예를 들면, 어린이집에 등원 준비를 하면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온 집을 뛰어다니면서 술래잡기 하듯 장난치는 것 같으면 같이 장단에 맞춰주는데 '정말로' 하면 안 되는 위험한 일들에 대해선 '단호하게 얼굴에 웃음기를 싹 빼고 안돼'라고 해야 돼요.

그럴 때 서럽게 울기도 하는데, 울어도 어쩔 수 없어요.

울면서 하나도 안 듣는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다 알아듣고' 그 행동을 다신 안 하거나 "하면 안되지~"하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하레는 이제 심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여요.

전엔 엄마, 아빠의 이혼 때문에 아이를 조심조심 다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이 그저 일관되게 훈육을 부탁 드려요.

울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단호하게 안되는 건 안된다고 말씀해 주세요."


담임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하레에게 "멋진 친구니까 잘 할 수 있지?"하고 물었고, 하레는 "떼(네)!!!"하고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대답은 잘한다."며 웃으셨다.

내가 "선생님한테 하이파이브해!"라고 해서 선생님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하원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선생님으로서 원아를 '울도록 놔둬'야 하는 게 엄마/혹은 고모만큼 쉽지는 않겠다 싶다.

어린이집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 논란이 뉴스에도 자주 나올만큼 민감한데, 아무리 훈육을 위한 거라도 아이를 울리는 일이 조심스러울수도.

돌봐야할 아이들이 한 둘도 아닌 상황에서 하레를 붙잡고 집에서처럼 일일이 설득을 하기도 힘들테고.

조만간 선생님께 편지라도 써서 보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기억하라.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로 키우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아이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아이에게 높으면서도 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어른의 존재다.
높은 기대는 성적이나 수행 능력에 대해서 가지는 게 아니다. 진실성, 너그러움, 공감, 세상에 공헌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들에 대해서 가지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아이, 내 아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회복탄력성 훈련> p.91 - 케네스 R.긴즈버그, 마샤M.재블로우


일주일 뒤, 

'정리'를 하라고 하면 들은 척도 안했다던 하레는 정리를 잘해서 우등상으로 '하트 스티커' 한 장을 받아왔다.

하원하자마자 스티커를 뜯어서 내 오른팔에 전부 다 붙이고는 '끄읏!(끝)'하고 외치며 방긋 웃었다.

내 온 팔이 하레가 붙인 하트로 도배가 됐다.



그래, 하레는 이렇게 늘 계속 변화하고 성장한다.

한 순간의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걱정할 필요 없어.

그저 하레에게 '높은 기대'를 갖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하레가 성장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자,라고 생각했다.


하레같은 어린 아이들은 물레 위를 빙글 빙글 돌아가는 흙반죽처럼 시시각각 유연하게 변화한다.

하지만 이미 세월과 환경이 빚어낸 상태로 '굳어서' 성인이 됐다면, 이미 만들어진 도자기는 부숴져야만 한다.

완성된 도자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깨뜨려 없애는 장인의 고집스러움을 갖고 하레처럼 나도 나 자신을 끊임없이 재창조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 새로운 사람들, 사건이 들어올 자리를 자리를 비워두자.

낡은 습관과 패턴을 놓아주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집착하지 말자.




아기나 어린아이들은 고통이 너무 심하면 견디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지만, 완벽한 자아와 신경체계를 갖춘 어른이라면 고통 때문에 목숨을 잃을 거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20년 전이나 50년 전에 키운 방어기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과거에 붙잡아두게 된다. 우리는 현실과 접촉하지 못하며, 거짓으로 사는 것이다.

<음식은 자유다 Women, Food and God : An unexpected path to almost everything> p.179 - 지닌 로스


언젠가 감정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This too shall pass."라는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은 적이 있다.

그래. 이것 또한 지나갈거야.

그러다가 문득 모든 것이 지나간다면, 왜 '행복한 순간'엔 이 말을 떠올리지 않지?하는 의문이 들었다.

살면서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을 겪을 땐, "원래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는 둥,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둥, 온갖 격언을 다 떠올리며 견디지만 막상 즐거운 시간도 지나갈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산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잘못 이해했던 적이 있었다.

지독한 절망과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진정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 나오는 기쁨을 '처음' 맛봤던 그때의 나는 행복과 기쁨같은 감정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좋은 일만 계속 이어져야 하고 남들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도 나를 피해가야 마땅하다는듯이.


좋은 시간들이 무한정 이어져야 한다는 '근거 없는 생각'과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인생에서 '고통'을 만들어내는구나.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나에게 삶은 때때로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나를 훈육하는데, 그땐 나도 하레처럼 '울어야' 하는구나.

속상해서 울면서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야'라고 배워야 하는 구나.

삶의 흐름을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수용하며 'YES'라고 하는 건 참 쉽지 않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거 같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간격이 있고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항상 무언가가 채워진채로 그리고 동시에 부족한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누릴지, 부족한 것을 갈망하며 괴로워할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내 집착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고통과 삶이 나에게 주는 성장을 위한 꼭 필요한 고통을 알아볼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 

행복과 슬픔의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즐기고 후회없이 놓아 보내도록 하자.

모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들이니.




하레가 생일선물로 받은 씨몽키가 태어난지 한 달쯤 된 때였다.

아침, 저녁으로 공기 펌핑을 해주어야 하는데, 바쁜 일상속에 길이 10cm 남짓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는 작은 씨몽키의 존재를 잊는 날도 가끔 있었다.


어느 날, 같이 태어난 대부분의 친구들이 죽었는데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커다랗게 자라난 씨몽키 두 마리가 쉬폰 드레스같은 지느러미를 우아하게 펄럭거리면서 그 작은 플라스틱 통 안에서 헤엄을 치는 모습을 발견했다.

코끝이 시큰하고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을 정도로 경이롭고 대견했다.

그날부터는 아침, 저녁 공기 펌핑을 해주는 일을 절대 잊지 않았다.

씨몽키가 잘 살아 있나, 잘 자라고 있나를 보는 게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하레가 태어나고 이만큼이나 쑥쑥 자란 지난 3년간, 나도 참 많이 자랐네, 하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하레와 씨몽키와 함께 쑥쑥 커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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