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만 Aug 10. 2020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당신이 옳다  by 정혜신



반성한다. 나는 이런 말로 남편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

"당신은 공감 능력이 없어."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울적해했다. 그런 그를 나는 더욱 몰아세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을 울릴 순 없겠지.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날 남편과 싸운 것은 내가 격분하는 일에 그가 나만큼 충분히 분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편의 낮은 감수성을 비난하며 남편이 내 마음에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더 이상 나의 분노는 여성을 비하하던 어느 동료의 이야기가 아닌 부부임에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정혜신 박사의 책 <당신이 옳다>는 그날의 내게 질문을 한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감정과 똑같이 느끼는 것이 공감인가. 공감을 잘한다는 건 상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상태까지 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 결에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p270~271)


공감이란 상대와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존중이란 바로 개별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남편이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껴야만 하고 그것이 공감이라 생각했다. 개별적 존재로서 그를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남편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그를 대했다.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p200)


나는 남편을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치부했다. 내 감정을 함께 나누기에 부족한 사람이라 여겼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남편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겪은 모든 경험의 끝은 '감정을 보여선 안 된다. 약하게 보이면 안 된다. 강해져야만 한다'였다. 그런 다짐을 하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그런 그의 내면을 몰라준 게 미안해졌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에 대해 이미 확실히 안다고 여겼기에 그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얼마나 아픈가요. 나는 물었어야 했다.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은 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일지 모른다. 이 사태에 대한 엄마로서의 진단이 이미 내려진 상태다.
(...) 적절한 질문을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궁금해야 질문이 나온다. 궁금하려면 내가 내린 진단과 판단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틈이 있어야 한다. (p267)


그날 밤 남편과의 일을 겪으며 사람을 보는 게으른 시선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서도, 작가로서도 세상을, 또는 인간을 보는 안일한 태도를 경계해야 다. 어느 강의에서 이슬아 작가는 글쓰기를 '부지런한 사랑'이라 표현했다. 사랑은 상대를 계속해서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싶게 한다. 그런 부지런한 마음이 사라진다면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꽃에 대해 글을 쓰려면 꽃을 사랑해야 한다. '꽃이 피었습니다'가 아닌 그 개별 꽃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그 꽃이 하는 말을 들어줘야 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그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라는 존재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108, 109)


여태껏 나는 내가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아에도 마음 아파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부지런한 시선으로 존재 자체를 이해해준다는 의미에서의 공감에는 나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인간성의 상실을 경험한 사례가 있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공감 능력이 떨어질 수 있을까? 이렇게나 잔인하다고? 나는 그런 짓을 벌인 사람들을 상종하지 못할 부류라 간주하며 이 사회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정혜신 작가는 그런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자기’를 드러내면, 그러니까 내 감정, 내 말, 내 생각을 드러내면 바로 싹이 잘리거나 내내 그림자 취급만 당하고 사는 삶은 배터리가 3퍼센트쯤 남은 방전 직전의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 내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끼면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 심지어는 폭력적 행동도 불사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끔찍한 말과 행동을 화살처럼 퍼붓던 일베 회원들 몇 명을 붙잡고 보니 고립된 처지의 유약하고 위축된 개인들이었다. 일상에선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들이었다. 경찰도 피해자도 허탈해할 만큼. (p93~94, 95)


존재가 소멸된다는 느낌이 들 때 가장 빠르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는 방법이 폭력이다. 폭력은 자기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폭력적 존재가 되는 순간 사람은 상대의 극단적인 두려움 속에서 자기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걸 느낀다. (p100)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 나의 사명은 '표현', '공감', '연결'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타인까지 신경 쓰며 공감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가 내게 물을 수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배우 차승원이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를 모르는 분들 또한 다 행복하고 평범해져야 나도 평범해진다. 남이 불행한데, 내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요새 들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을 겪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소멸을 경험한다. 그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폭력이다. 그 폭력의 대상은 내가 될 수도 있고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사는 이 사회의 그 누구나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누군가 그런 일을 저지르기 전에 그 사람이 자기 존재를 확신할 수 있도록 공감해주고 사랑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쩌면 공감은 그렇게 이기적인 이타심일지도 모른다.


"분노를 말할 수 있으면 분노로 폭발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 사회에 좀 더 건강한 자기표현, 부지런한 공감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두를 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자로 살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