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이 폐막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아시안게임이 원래 이렇게 짧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휘리릭 하고 지나간 것 같다. 내가 극도로 바빠서였는지, 아니면 예전만 못한 아시안게임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시아인 최고의 축제라는 대회가 특별한 감흥 없이 스쳐갔다. 이제는 굳이 국제 스포츠 대회가 아니더라도 호기심, 승부욕, 눈요기 등을 충족시켜 주는 이벤트와 매체가 많아져서일까?
아시안 게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태어나서 처음 국제대회에 관심 갖고 열광했었던 86 서울 아시안 게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88 서울 올림픽의 전초전 성격으로 86 서울 아시안게임을 준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1986년에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초등학교(물론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입학할 때부터 하도 우리나라에서 무려 전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레 그 2년 전 대회인 아시안게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대회에 관해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사실과 장면이 생각난다.
먼저 대회 최종성적... 어렸을 때 막연히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성적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히 우리나라가 3등 하겠지.’, ‘일본과 중국이 치열하게 우승 싸움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 8세 아이의 머릿속에 형성되기 어려운 홈 어드벤티지라는 개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대회 중반까지만 해도 대회 초 예상대로 중국과 종합순위 1, 2위 경쟁을 하던 일본이 대회 중반을 넘어가자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금메달 획득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50여 개에서 머물렀다. 반면 우리나라는 복싱이며 양궁 같은 주력 종목에서 금빛 질주를 하더니, 금메달 수에서 일본을 역전한 것은 물론이고 압도적 차이로 앞서 나가고 있던 중국까지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고 나갔다. 어렴풋한 기억에, 일본이 매우 자신 있어하던 유도에서 예상외로 고전하면서 한동안 금메달 수가 정체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 대회 끝나기 직전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이 금메달 92개로 동률을 이뤘을 것이다. 그런데, 폐막 이틀 전 날이던가 하루 전 날이던가, 아무튼 중국이 육상에서 금메달 2개를 추가하고 우리는 금메달 추가에 실패하는 바람에 격차가 다시 2개 차로 벌어졌다. 마지막 날 축구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꺾으면서 금메달 1개를 추가했지만, 끝내 역전에는 실패했다. 혼자 발 동동 구르며 엄청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육상 임춘애 선수는 86 아시안 게임이 낳은 최고의 스타가 아닐까 싶다. 육상 3관왕... 가난 때문에 쌀밥 대신 라면을 먹으면서도, 육상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달려 결국 30억 아시아인 중 최고가 되었다는 입지전적 스토리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하며 열광했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임춘애 선수의 근황이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는데, 근황보다는 임 선수의 출생 연도 1969년이 눈에 띈다. 나랑 9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구나, 86년 아시안 게임 당시 임춘애 선수는 만 17세의 앳된 소녀였던 것이다.
복싱에 12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모든 금메달을 싹쓸이해 그 광경을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연신 너털웃음을 지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내 기억에 복싱 결승전이 한 날에 열렸던 것 같은데, 30분~1시간 간격으로 쉴 새 없이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리니, 조부께서는 그 장면이 재미있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그런 웃음을 지으셨던 것 같다. 그랬던 복싱에서 이제 금메달은커녕 메달조차 기대하기도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복싱은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목, 축구는 86년 아시안게임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때도 매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응원하고 흥분하곤 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4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도 예선부터 결승까지 전(全) 경기의 결과가 다 기억이 날까? 첫 경기 인도를 3:0으로 가볍게 제압하고, 바레인에 0대 0 무승부(이때 TV로 시청하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최순호 선수를 향해 고함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 4대 2로 이긴 뒤 조 1위로 토너먼트 진출... 그리고 8강에서 이란에 1:1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5:4로 힘겹게 이긴 뒤, 오히려 4강에서 만난 인도네시아를 4:0으로 손쉽게 격파하고 결승 진출... 결승전 상대 중동의 강호 사우디를 2대 0으로 이겨서 금메달을 땄던 당시의 환희와 흥분이 새롭게 떠오른다.
86 아시안 게임은 나에게 관람의 재미뿐만 아니라 색다른 신체활동의 즐거움까지 선사해 주었다. 육상 경기 시청 중에 높이뛰기가 나왔는데, 선수들이 뛰는 폼이 참 특이했다. 도약 후 허들을 넘듯이 앞으로 다리를 쭈욱 뻗어 바를 넘는 것이 아니라, 바의 몇 걸음 앞에서부터 몸을 뒤집기 시작해 배가 하늘로 향하게 하여 바를 넘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미국의 포스베리라는 선수가 1960년대 후반, 기존의 높이뛰기 자세들이 모두 한계가 있다면서, 앞서 묘사한 자세를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일명 배면 뛰기이다. 나는 아시안게임이 끝나고도 기 배면 뛰기가 뇌리에 남아, 집에서 혼자 그 자세를 연습했다. 어떻게 하였냐면, 집에 있는 소파 끝에 방석이나 책들을 놓아 장애물을 쌓아 올렸다. 그때 집에 이원수 문학전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튼튼한 바(bar) 역할을 하는 장애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조금씩 높이를 올려가며 훈련 아닌 훈련을 했다. 나중에는 ‘내가 진짜 좀 제법 하는데?’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3년이 지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어느 체육시간에 가을 체육대회에 나갈 반대표 선수를 뽑는다며 몇 가지 종목에서,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받았다. 특별히 잘하는 운동이 없었던 나는 마침 높이뛰기를 한다기에 자원을 했다. 그래도 반을 대표하여 반의 명예를 걸고 나가는 것인데 아무나 내보낼 수는 없었나 보다. 담임선생님이 10명 정도 되는 지원 학생들에게 뛰어보라고 했다. 나는 중간 정도 순서에서 뛰었는데, 3년 전 나 혼자서 나름대로 고되게 연습한 탓인지, 오래간만에 하는 높이뛰기인데도 바를 손쉽게 넘을 수 있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바를 쓰러뜨리지 않고 넘었다는 사실보다도 TV에서 보는 육상선수들이나 하는 배면 뛰기 자세를 보이니 깜짝 놀란듯하다. 담임 선생님도 충격적이라는 듯, 나를 반대표로 뽑으며 체육대회에서 잘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전교생이 참가하는 체육대회 높이뛰기에서도 나 이외에 배면 뛰기를 하는 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배면 뛰기는 또다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나 포함해서 마지막 두 명만 남게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비록 학교 대회지만 ‘내가 금메달을 따는 것인가?’ 하는 기대에 우쭐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결선에서 상대하게 된 친구는 한눈에 봐도 체육인의 체격과 포스를 지닌 절대강자였다. 그냥 허들을 뛰듯이 뛰어도 월등한 체격 조건 때문인지 바(bar) 위를 표범처럼 붕붕 날아다녔다. 배면 뛰기도 초등학교 체육대회에서는 한계가 있나 보다. 결국 나는 그 친구에게 보기 좋게 패하고 2등을 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뿌듯했다. 운동 신경 하나 없던 내가 체육대회에서 전교생 중 2등이라는 결과를 얻었던 것, 86년 아시안 게임이 남겨 준 고마운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아시안게임이 열릴 때마다 높이뛰기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번 항저우 대회 때에도 우상혁 선수의 힘찬 도약과 밝은 표정이 어렸을 적 높이뛰기로 인한 유쾌한 기억을 소환시켰다. 다음은 또 어떤 대회를 보면서 추억에 젖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적거려 보니 일본 나고야 대회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