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사삼공삼 Nov 03. 2022

첫서재

여긴 네가 춘천에 오면 꼭 함께 가려고 했던 곳이야.


육림고개를 올라가는 언덕엔 수제 돈가스가 엄청 맛있는 집이 있어. 가게 주인분이 주문을 잘못 받아서 돈가스도 메밀국수도, 심지어 스프에 레모네이드까지 먹게 되었던 날.  겨우 반쯤 먹고 나머지는 남겼다고 했더니, 다음엔 꼭 같이 가서 남김없이 다 먹어 버리기로 약속했던 거.

기억나?


언덕을 다 올라가면 잠깐 평지가 나와.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엔 우리 또래 친구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서 요리하는 식당이 있어. 속이 편안한 한식이야. 입맛이 없을 때 가끔 그 곳에서 명란 파스타와 카레를 시켜 먹곤 했는데, 정말 맛있는 곳이야. 꼭 같이 가보고 싶었어.


이제 내리막이야. 내리막길엔 아주 고즈넉한 독채 숙소가 있어. 성인 두 명만 예약제로 받는 곳이래. 벌써 내년 2월 예약을 받기 시작했더라. 비싸고, 조용하고, 좋은 곳 같아 보였어. 가끔은 한량처럼 저런 곳에서 단둘이 호사를 누려 보는 것도 좋았겠지.


조금 더 내려가면 맨드라미와 도라지가 심겨져 있는 커다란 화분이 길가에 놓여 있어. 여름엔 보라색 별 같은 도라지 꽃이 한가득 피더라. 사실 난 흰 도라지 꽃을 더 좋아하지만, 너와 함께 걷는다면 보라색 도라지 꽃도 꽤 귀여워 보일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


자, 이제 다 도착했어. 여기가 첫서재야. 야트막한 담이 있고, 담 너머엔 수 십년은 되었을 것 같은 키 큰 하얀 라일락 나무가 있어. 그 밑에는 튼튼한 나무 벤치가 있어서, 라일락 꽃이 반겨주는 초여름 봄날이 오면 그 아래에서 꽃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문 손잡이를 잡고 큰 유리문을 힘차게 열면, 따스한 공기가 우릴 감싸안을 거야. 서재지기 두 분이 다정한 눈빛으로 어서 오라며 한껏 낮춘 신난 목소리로 맞아 주시겠지. 그리고는 귀여운 메뉴판을 가리키면서 뭘 마실 거냐고 속삭이실 거야.


네가 메뉴를 고민하는 동안 재빨리 오른쪽으로 걸어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 앞 테이블이 비었는지 한번 슥 볼게.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럼 너랑 나란히 앉아서 통유리창 밖 라일락 나무를 보면서 그림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 졸리면 고개를 쭉 빼서 왼쪽 방에 있는 커다란 안락의자가 비었는지 볼 거야. 생긴 것만큼 편한 그 의자는 정말 묘한 매력이 있어서, 반드시 여기 앉아서 이 책을 다 읽을 테다! 하고 굳게 다짐한다 해도 어느 순간 꼬르륵 잠들어버리거든. 의자와 찰떡같이 어울리는 책 모양 방석은 아마 돈키호테였던 것 같아. 내가 잠들었을 때 네가 곁에 있어주면, 영문도 모른 채 잠들었다 해도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어.


이제 사흘 뒤면 첫서재는 긴 겨울잠을 잘 거야.

아주 오래 기다릴 테니, 그저 봄처럼 돌아오길.

작가의 이전글 2022.07.2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