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만에 도심으로 나갔다
2020.09.15. Tue
거의 한 달이 다 되었다.
갑자기 학원 종강을 이틀 앞두고 갑작스러운 셧다운이 있었고,
어쩌면 이번 생에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화상 비대면 강의로 출판 학교의 마무리를 지었다.
강의를 수료하고 나면 뭔가 크게 달라지겠지, 했던 기대와는 달리
내가 변하지 않으면 변하는 건 없었다.
서울에 자취방을 구해 눌러 앉은지 세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룬 게 없었다.
거기다 급격히 확산된 코로나 때문에 현관문을 여는 게 두려웠다.
새벽녘엔 누군가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려는 끔찍하고 무서운 꿈도 꿨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어느덧 동이 틀 시각, 그렇게 밤낮이 바뀌었다.
엄마랑 통화를 했다.
여기서도 집에만 있을 거라면, 보다 안전한 본가로 내려오라고 했다.
내 방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가족들이라도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사실 위기가 몇 번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엔 견디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는 날이면 기분도 덩달아 쳐졌다.
가볍게 나서던 산책마저도 어려웠으니까.
가만히 창밖을 쳐다보고 앉아있는데, 비행기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세 달 만에야 처음 보는 비행기의 이륙.
금세 작은 점이 되는 것을 뒤따라가다 앉아있다 보니
어느덧 내 손은 비행기 티켓을 찾아보고 있었다.
추석 전, 미리 내려가기로 결정한 터라 이미 표를 예매해두었지만
충동적인 마음이 마구 일렁였다.
내가 고등학생 때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경험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다 문득 빨래를 널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 참에 지갑만 덜렁 들고, 기차를 탔다고 한다.
뭐든 준비하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하는 내 성격으론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날이 올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내려오라고 했던가,
그녀가 덧붙인 말이나 그 말의 요지는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그저 다시 돌아와 보니, 창문을 열어둔 채로 며칠 동안 집을 비운 터라
가기 전 널어놓은 빨래가 다시 홀딱 젖어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외출을 할 땐 꼭 창문이 닫혔는지 확인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창문을 열어둔 채로 종일 바깥에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어둑해진 뒤에 돌아와 신발을 벗으면서야
아, 창문을 내내 열어두었구나 하고 탄식했다.
아무튼
비행기 표가 생각보다 훨씬 쌌다.
당장 내려가는 건 비쌌지만,
어차피 집을 좀 정리해야 하니까 하루 정도 뒤쯤? 떠나는 걸 볼까?
하루씩 하루씩 미루다 보니
원래 본가로 가려던 일정이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또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는 모르지.
일렁일렁 하루에도 수천수만 번 으르렁대다 잠잠해지는 파도의 얼굴처럼
나도 내 속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본가 생각이 나자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삼일 정도를 침대에만 머물렀던 것 같다.
깨어있는 동안엔 드라마나 예능 같은 것을 보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실컷 잠을 잤다.
눈을 뜨면 먹었고, 다른 것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막아서면
멀리하고 싶어지는 마음.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았다.
책태기라고 하던가.
올해 읽은 책이 벌써 100권을 돌파했다.
내 생에 가장 책을 많이 읽은 한 해가 될 것이다.
그중에는 내가 정말 읽고 싶어 읽은 책과
읽어야 해서 읽은 책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책들은 마음을 울리기는 했지만 어딘지 공허했다.
분명 너무 좋은 책인데, 읽는 내내 마음이 울렁거렸는데도 채워지질 않았다.
3일간 종이 위의 활자를 보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그 사흘째가 될 수도 있었다.
동이 트고 나서야 잠든 탓에 느지막이 눈을 떴다.
안압이 꽉 찬 것처럼 뻑뻑한 눈에
뒷목이 뻐근하며 머리 전체에 통증이 있었다.
한참을 누워 머리를 만지고 있는데 전화를 받았다.
다시 학원을 열었으니,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을 가지러 오라는 거였다.
친절히 방법을 고심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잠깐 들르겠노라고 이야기하고는
샤워를 했다.
머리카락이 또 한 움큼 빠졌다.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이 정도로 빠지면 듬성듬성
빈 곳이 티가 날지 모른다고 계속해서 생각하던 차였다.
샴푸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며 머리를 감았다.
머리카락 하나 정말 징글징글하게 빠진다.
엄마가 매번 하던 잔소리는, 이제 내 몫이다.
세면대 앞에 서서 머리를 말리면서 빨래 바구니의 빨랫감이 넘쳐흐르는 걸 봤다.
오늘 돌아오면 이불과 함께 빨래를 돌려야지.
학원에서의 용무는 정말 금방 끝났다.
10분 남짓한 시간을 위해 자진해서 학원에 온 것이 억울할 것이 분명했기에
5층에 있는 카페 구석에 앉아 챙겨 온 책을 꺼냈다.
후두염 때문에 한 달 동안 커피를 5잔도 못 마셨다.
아-몰라하는 심정으로 커다란 커피를 시키고
신문 한 부를 챙겨 와 읽었다.
종이 신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도 제발 신문 좀 읽으라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흘려버렸다.
지금은 대차게 후회한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던데...
너무 오랜만에 활자를 봐서 그런가, 글자가 뱅글뱅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찬찬히 헤드라인을 읽어보면서 마음이 가는 기사가 있으면
본문을 정독하는 방식으로 했는데도 1시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읽기 훈련이 부족한 탓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창비에서 서포터스 리뷰용으로 보내주신 책 네 권 중 두 권을 챙겨갔었다.
다행히 성인용 단행본보다 큰 글씨체에 얇은 부피감이라 한시름 놨다.
이 활동을 하면서 '동화집을 읽을 나이'가 지나 몇 편의 동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을 덮으면서는 항상 '동화집을 읽을 나이' 따위는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내가 읽은 동화들은 내 어린 시절의 어딘가에도 있던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특히, 훅-하고 불어온 첫사랑의 바람에 이게 뭔지도 모르고 나부끼던 초딩 때가 떠올랐다.
누가 누굴 좋아하고, 누구와 누가 사귀고, 누구와 누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고......
지겹도록 그 '관계'들 속에서 괴로울 텐데도 그때의 나는 그게 가장 중요했다.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생활, 관계의 변화, 감정들을 하나하나 만지면서 책을 읽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마음이 충만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말랑말랑한 연애 소설 같은 걸 읽는 걸까.
두 편을 연달아 읽고 나니,
오늘 제대로 된 끼니를 챙기지 않았단 걸 깨달을 만큼 허기가 밀려왔다.
학원에 다니는 동안 먹은 음식 중 가장 떠오르는 음식을 먹으러 갔다.
혼자 앉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애매한 시간대
4시의 끝, 5시 무렵 라구 짜장밥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다시 먹어도 고소하고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무엇이든 오래 끓이면 이런 깊은 맛이 나는 걸까?
아무래도 허기가 졌던 탓에 허겁지겁 먹긴 했다.
함께 제공받은 트러플 오일을 뿌려서 색다른 풍미를 즐기면서
혼자 베니스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선물용 트러플오일을 찾아헤맨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꿈만 같은 기억. 다시 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이리시 친구가 남자친구와 함께 로마로 여름휴가를 간 사진이 올라왔다.
마스크를 끼고 있긴 했지만, 여름을 통째로 잃어버린 우리와는 조금 달라 보여 슬펐다.
여름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예 없는 건 상상한 적이 없는데.
여름아, 미안해.
배가 많이 부른 것 같으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선유도 공원 즈음에 내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산들산들 바람도 불고, 양화한강공원을 통과해 집으로 간 적은 없으니 어쩐지 설렜다.
버스를 타러 가다 말고 아, 머리핀을 하나 사야지 하고 들어선 유플렉스
사람을 대하는 게 어색해져서 몇 번 머리핀을 꽂았다 바꿨다 하다 그냥 내려놓았다.
터덜터덜 걷다가 여기에도 서점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저번에 잠깐 일정 사이에 뜬 공백을 메우려 방문했다가
책 한 권 제대로 구경 못하고 내려온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12층으로 가 책이 가득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부끄럽지만 나는 전공자인 게 무색할 만큼 서점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책을 사는 곳, 보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다.
온라인 서점이 편리하게 몸집을 늘린 이후로
오프라인 서점은 가끔 시내에 나갈 때가 있으면 들러서 이용할 뿐이었다.
교보문고나 반디앤루니스 같은 대형 서점에만 갔다.
내가 부산에서 갔던 작은 서점들은
자그마한 공간에 사장님이 자리를 지키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탓에 제대로 책을 구경하지 못하고 나오기 일쑤였다.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의 장점은 수많은 책과 사람 속에 숨어들 수 있다는 거다.
평소 부끄러움이 많거나, 할 말을 못 하는 성격이 아니면서도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하게 당당하지 못하다.
길을 걸으면서도 실수로 누가 다가오면 깜짝깜짝 놀란다.
고양이를 좋아하다 보니 고양이 같은 예민함을 갖게 된 걸까.
작은 서점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작은 서점, 나만의 아지트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잘 꾸려진 서점으로 향했다.
반은 의무감으로, 반은 호기심으로 들어선 공간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한참 멍해졌다.
책과 나무서가의 조합은, 그리고 코끝에 감도는 커피 원두 향.
어쩐지 홀랑 커피를 태워먹은 것 같은 씁쓸한 향이 나쁘지 않았다.
천천히 처음 들른 서점을 둘러보다가
그들이 '큐레이션'해 둔 매대에 눈길이 갔다.
<그래도, 서점>
작은 독립 책방이나 동네 서점, 서점에 관한 책들을 모아둔 것 같았다.
아기자기한 느낌이 가득한 책들 사이에서 호기심이 이는 책을 찾았다.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 서울》
두 명의 출판직 종사자인 일본인들이 한국의 서점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의 개성 있는 서점들을 둘러보며 출판의 미래를 보았다고 하는데,
서울에 있는 서점들을 잘 모르는 탓에 알고 싶어 펼쳤다.
서점 주인들을 인터뷰한 책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서점들이 서울에 있었다고?
그럼 난 지난 3개월 동안 무얼한 건지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부지런히 싸돌아다닐걸...
지금 와 후회하면 뭐 하나,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지도 속 '가고 싶은 곳' 카테고리에 몇몇 서점을 추가해두고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책을 한 권 사고 싶은데하고 고민하다가
경의선 책거리(?)라는 곳 근처에 서점이 꽤 많다고 해서
그리로 걸어가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 귀여운 책을 사고 싶었다.
경의선 책거리를 찾아가던 중에 휴대폰이 꺼졌다.
배터리가 다 닳은 탓이다.
길을 잘 모르는데 어쩌지 하다가 그리로 쭉 따라 걸어가면 홍대겠지 싶어 그냥 걸었다.
걷는 사람들과 양옆에 늘어진 가게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눈에 들어오는 서점이 있는지 살폈지만 찾지 못했다.
홍대 거리를 돌아돌아 큰 길가로 나왔다.
구두를 신었던 탓에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 같았다.
버스에 타자마자 창밖으로 책에서 봤던 서점 '북티크'가 건너편에 보였다.
아, 들러볼걸.
하고 아쉬워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멀미가 났다.
아까 먹은 짜장이 체한 모양이다.
소화가 잘 안되는 것도 있어서 걸은 거였는데
잠잠해졌던 두통도 지끈거리고
하루 종일 숨통을 죄어오던 마스크 때문에도 어지러웠다.
편의점에 들러 까스활명수와 소화제를 샀다.
많이 먹고 약으로 해결하는 거 이제 그만하려 했는데, 역시 쉽지 않다.
그냥 잘까 말까 하다가 앉은 것이
벌써 두 시간째, 이 일기 아닌 일기이자 넋두리를 쓰고 있다.
이렇게 오래도록 내 생각을 글로 쓴 게 아주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은 퇴고를 따로 하지 않을 생각이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뻥뻥 걷어차거나 비공개로 돌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게 2020년의 9월 15일의 변치 않는 기록인 것을.
부디 내일 아침에도 내가 부지런을 떨어서
오늘 마음먹은 것들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