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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Apr 21. 2020

오페라 "엘렉트라"

복수는 차갑게 식었을 때 맛있다? 응 아니야

오페라 “엘렉트라”는 마치 늪과 같다. 한번 그 매력에 발을 담그면, 당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엘렉트라”를 감상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강렬한 체험이다. 음악의 선율은 마치 날씨 궂은날 태평양 한복판의 허리케인처럼 거세게 몰아친다.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포화 상태에 도달하며, 소프라노의 고음은 극한까지 상승한다. 오페라는 관객의 잠들어있는 신경 세포를 하나하나 일깨운다.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고 혈액 순환은 촉진된다.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해진다.


이 작품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하자면, 여의도 불꽃 축제의 최종 하이라이트? 그만큼 찬란하고 화려해서, 듣다 보면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로 전방 시야가 흐릿해진다. “엘렉트라”는 분명 최고 수준의 미적 감흥을 동반하는 작품이며, 이 특별함은 작품에 대해 한번쯤 정리해 보고 싶게 한다.



1. “엘렉트라”는 그리스 고전인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한 여인의 복수심을 소재로 한 오페라는 1막 구성으로, 약 110분 간 휴식 없이 스트레이트로 진행된다.


2. 1909년 1월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작품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905년 “살로메”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의 입지를 굳힌 그는 이전부터 극작가 휴고 폰 호프만슈탈의 러브콜을 받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작업을 함께하기 시작한다. 비록 나이는 10살 차이가 났지만, 두 예술가의 호흡은 1929년 호프만슈탈이 운명할 때까지 지속되며, “장미의 기사”,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 같은 명작을 세상에 내놓는다. “엘렉트라”는 오페라의 역사에서 둘도 없는 명콤비의 첫 번째 콜라보이다.


3. 배경 지식이 약간 필요하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트로이 전쟁 당시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해 승리의 공을 세웠다. 10년에 걸친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그는 금의환향해 전 국민의 축복을 받지만, 행복이 지속되는 시간은 짧았다. 부정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일찍이 사악한 간계를 꾸며놓고 있었다. 틈이 보이기를 기다렸던 아내는 궁전 욕실의 욕조로 남편을 끌어들인 후 그물과 흉기를 들고 방심하고 있는 상대를 기습한다. 


4. 오페라는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처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를 한시도 잊지 않는 주인공은 첫 등장부터 방황하고 있다. “아가멤논~ 아가멤논~” 아버지의 이름을 읊조리며 그의 흔적 곁을 서성이는 그녀는 신들에게 기도한다. 피를 손에 묻힌 어머니와 정부에게 부디 천벌을 내려달라고 간청한다. 원한으로 눈이 뒤집히기 일보직전인 그녀에게, 자매 크리소테미스는 곁에 와서 회유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뒤이어 찾아온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과거의 악행을 정당화하며 말다툼을 일으킨다. 엘렉트라의 화는 불난 곳에 휘발유 드럼통을 던진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간다.


5. 엘렉트라는 격정적인 감정을 하이 C로 세 차례 표출한다. 초반부 엘렉트라가 아버지의 죽음을 비탄할 때 한번, 중반에 어머니 눈 앞에서 저주를 퍼부을 때 다시 한번, 그리고 복수가 끝난 후 행복에 휩싸일 때 마지막 한 번이다. 소프라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뒤따르는 오케스트라의 포르테시모는 대지를 뒤흔든다. 청중은 마치 짬뽕 국물을 원샷하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로 속이 후련해진다.



6. 엘렉트라의 복수는 익히 봐서 알고 있는 복수와 양상이 다르다. 과거 SBS에서 방영된 일일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눈가에 점을 찍고 등장했던 민소희, 상류층 귀족으로 신분을 탈바꿈했던 “몬테스크리스토 백작”의 에드몽 당테스, 오대수를 20년간 삼시세끼 군만두행 열차에 탑승시켰던 “올드보이” 속 이우진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복수심은 한 인간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탑재시켰다. 이들에 비하면 엘렉트라는 지극히 평범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여인에 불과하다. 


7. “엘렉트라”는 복수할 능력이 전무한 인간의 복수극이다. 그래서 오페라가 주요하게 다루는 건 복수라는 행위보다, 복수에 수반되는 감정이다. 엘렉트라의 슬픔과 한탄, 절망과 기쁨은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기에 엘렉트라 역은 가수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전례 없는 에너지를 요구한다. 1908년 9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악보를 완성했을 때 초연 지휘를 맡았던 에른스트 폰 슈흐는 주인공 역에 현존하는 가장 드라마틱한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를 요청했는데, 현재 시점에서도 그의 요청은 유효해 보인다.


8. 오페라는 극적인 반전이 있다. 반전은 엘렉트라가 남동생 오레스트와 상봉할 때 발생하며, 이는 엘렉트라를 소재로 한 그리스 비극인 아이스킬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의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이 시점부터 불안감을 조성했던 불협화음은 물러나고,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분위기는 안정을 찾아간다.


9. 오레스트의 정체를 확인한 엘렉트라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사실 아가멤논의 복수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들 오레스트밖에 없는데, 얼마 전까지 그가 사고로 사망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만남이 믿기지 않는 엘렉트라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온갖 감탄사를 늘어놓는다. 감격적인 이 순간을 장식하는 엘렉트라와 바이올린 솔로의 하모니는 속된 말로 표현하면 지릴 것 같을 정도로 탐미적이다.


10. 오페라의 마지막 10분은 열광의 도가니이다. 오레스트는 어머니와 정부를 차례대로 응징하고, 죽는 자의 비명 소리를 듣는 엘렉트라는 기쁨에 도취된다. 오레스트를 찬양하는 합창단의 외침과 함께, 베토벤 교향곡 7번 4악장의 디오니소스 춤 같은 황홀감이 무대를 뒤덮는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어야 맛있는 음식”. 스페인 속담으로 알려진 이 경구의 뜻은 이런 것 같다. 복수란 마치 수건에 물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처럼 천천히 한 단계씩 진행할 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서두에 이 말을 인용했던 영화 “킬 빌”에서 주인공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 일본 오키나와를 찾고, 1달 동안 핫토리 한조의 칼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결과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만약 복수를 스테이크와 비교한다면, 차가운 복수는 미디엄 레어의 살살 녹는 맛일 터이다. 그렇다면 뜨겁게 익혀 먹는 복수의 맛은 어떨까. “엘렉트라”는 웰던 복수의 화끈함을 알려준다. 주인공의 복수심은 오레스트의 응징과 동시에 쾌락으로 전환되고, 극에 달한 쾌락은 광기로 전이된다. 마지막 피날레에서 광기에 휩싸인 엘렉트라는 승리의 춤을 춘다. 춤이 표현하는 무아지경 속에서 혈육의 정은 사라지고, 도덕적 구분은 해체된다. 끝을 모르고 부풀어가는 환희를 맞이하는 것은 죽음이다. 엘렉트라의 복수심은 죽음으로 귀결되기에, 복수심 뒤에 남는 것은 공허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복수가 곧 사는 의미인 인간에게 이보다 행복한 죽음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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