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물컵, 울티마툴레

그릇 이야기

by Sojin Jung

문을 열면 훅 하고 무례히 밀고 들어오는 폭염을 상대하며 이 여름을 견디고 있어요. 서울도 39도를 찍고 말았고요. 잠시라도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냉장고를 열고 컵에 물을 따라 정신없이 한 잔 쭈욱 마신 다음에라야 다음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쓰는 그릇 중 개별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것을 고르라 하면 역시 물컵이 아닌가 싶어요. 특히 이렇게 더운 여름에는요. 십여 년 전에 마트에서 개당 천 원씩 주고 산 두툼한 유리잔을 물컵으로 쓰고 있었는데 포개 놓기도 좋고 설거지할 때도 깨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여차해서 깼다 해도 별로 아깝지 않은 그런 컵이라 그럭저럭 십 년 넘게 잘 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그릇이 뭔가.. 생각해보니 물컵이었어요. 밥 국그릇보다도 더 자주 쓰는 그릇인데 제일 못난이를 쓰고 있었던 거죠. 편해서 좋았어, 라는 생각보다는 왠지 오래 손해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컵을 살까 찾다 예전 테이블 스타일링 수업을 준비하다 본 사진에 있던 반짝거리는 유리컵이 생각났어요.


그 사진 속의 유리컵은 검은색 떼에마 접시와 사르파네바 무쇠솥과 함께 세팅되어 있었어요. 센터피스도 없이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무채색 그릇들을 올려놨을 뿐인데 어떤 화려한 칼라를 쓴 그릇보다도 더 가득 찬 느낌이었습니다. 작은 빛의 조각들을 모아 붙인 듯한 사진 속의 컵은 차갑거나 날카롭지는 않으면서 다만 화려했어요. 무쇠솥과 검은 접시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이 유리가 독보적으로 장식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던 거예요.

그 컵의 이름은 울티마 툴레(Ultima Thule), 핀란드의 천재 디자이너 타피오 빌칼라(Tapio Wirrkkala)의 디자인이라는 것은 나중에 안 일입니다.

타피오 빌칼라는 라플란드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이 컵을 디자인했죠. 라플란드는 핀란드 북쪽의 땅으로 산타클로스가 살고 있는 곳이고, 울티마 툴레는 라틴어로 ‘극북의 땅’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극북의 땅, 빙하의 녹아내린 물방울이 만든 짧은 스템이 컵을 받치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코끝 쨍한 로바니에미에 있지는 못하지만, 빙하를 떠 온 것 같은 이 컵에 얼음물을 넣어 마시며 가을을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핀에어 일등석에서 사용하는 컵이니 견고하기도 할 테고요


마침 세일을 하고 있길래 컵을 사서 돌아오는데 옥외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불덩이 같습니다. 백 년만의 더위라고 하는데, 정말 백 년만의 더위가 맞나요? 그렇다면 오히려 희망적일 텐데요. 100여 년 전 견딜 수 없었던 더위가 있었던 이후로 100년간은 괜찮았다는 것으로 애써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요.

타피오 빌칼라, 그도 몰랐겠지요. 라플란드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모습, 그 아름다움을 빌려왔을 뿐인 디자인이 머지않은 훗날 ‘현상’이 되고 그 바람에 결국 ‘예언’이 되고 말았다는 기막힌 사실을요.

———————————————————


내가 쓰는 컵은 싼 것으로 여러 개 장만하지 마시고 조금 비싸더라도 마음에 드는 예쁜 것으로 서너 개 사는 게 좋아요. 그리고 손님이 많이 오실 때를 대비하고 싶다면, 오히려 심플하고 저렴한 유리컵을 사는 거죠. 생각보다 손님이 많이 오실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예쁜 컵이 네 개 정도 있으면 그걸로 해결될 때가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손님이 많이 오셔서 식탁에 쫘악 세팅을 해야 할 때는, 단순하고 저렴한 컵을 두셔도 예뻐요. 같은 것을 반복하여 세팅하면 그 개별적 물건이 썩 예쁘지 않더라도 여러 개를 세팅하는데서 오는 통일감과 리듬감 때문에 예뻐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늘 쓰는 컵을 예쁜 걸로, 손님용 컵은 저렴하더라도 어떤 세팅에도 어울리는 심플한 걸로 사는 것으로 해요. 다만, 너무 얇은 컵은 피해야 해요. 많이 미끄럽다던가 지름이 넓은 컵도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립감이 나쁘거나 설거지하기 불편하면 잘 안 쓰게 되고 결국 그릇장에 들어가 장식품이 돼버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