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린 Dec 08. 2022

엄마는 예쁘지 않았다

나를 찾는 여정은 결국 엄마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모는 예뻤다. 이모의 딸인 가을이도 예뻤다. 나와 다른 핏줄인 듯했다.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함께 자려고 누우면 나도 모르게 가을이에게 눈이 갔다. 가을이는 잠옷 바람이어도 고왔다. 예쁜 여자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걷기만 해도 눈길을 받는 삶, 뭇 남성들의 시선이 귀찮은 일상 말이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예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상상했다.


어린 시절, 전교에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아이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얼굴로 모든 게 포장되어 시샘을 당했다. 예쁜 아이들은 대체로 싸가지가 없었다. 그런데 가을이는 착했다. 새침함 안에 세심함이 있었다. 가을이는 결혼식 때 쪽 찐 머리에 드레스를 입었다. 5:5 가르마를 탔는데 앞머리 없이 봉긋한 이마, 갸름한 턱이 우아했다. 신부 화장을 했지만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타고난 미녀였다. 가을이의 신랑은 부유했다. 여성의 미모가 남성의 재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추하게 느껴질수록, 아름다운 것을 선망했다. 초중고 시절, 제이를 부러워했다. 얼굴과 행동뿐 아니라 제이가 입은 옷, 쓰는 물건은 모두 남달랐다. 제이는 인기가 많았다. 동그란 듯 갸름한 얼굴은 하얬고, 쌍꺼풀 없이 큰 눈은 웃으면 반달이 되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 제이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나와 다른 차원의 사람에게서 느끼는 동경이라고 할까. 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제이와 친구가 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대학 시절, 정이 언니는 새로운 우상이었다. 언니는 외고를 나왔고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나와는 출신부터 판이했다. 정이 언니는 은은하게 예뻤다. 큰 눈에 연한 쌍꺼풀이 김고은처럼 고풍스러웠다. 패션 감각도 특별해서 언니가 입었던 옷을 집에 와서 인터넷에 검색했다. 비슷한 옷을 찾아도 내가 입으면 분위기가 달랐다. 언니의 싸이월드에 자주 들렀다. 벽에 기대어 무심히 앉아 있는 사진이 연예인 화보 같았다. 나도 벽만 보이면 같은 동작을 취해보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장난처럼 말했다. “얼굴이 그게 뭐냐? 고추장이라도 좀 발라라.”, “집이 기울고 있어. 너랑 엄마가 너무 무거워서….” 무심히 넘겼지만 아버지의 말은 가슴 깊은 곳에 얼었다. 엄마는 예쁘지 않았다. 엄마의 딸인 나도 예쁘지 않았다. 학술답사나 워크숍, 교회 수련회를 가면 해가 어스름한 새벽에 일어났다. 누군가 깨기 전에 화장을 하고 앞머리를 헤어롤로 말았다. 앞머리 없는 나는 가족에게만 보일 수 있었다. 캐리어는 2박 3일 동안 쓸 드라이기와 메이크업 도구, 옷과 장신구로 가득했다. “언제 일어나서 화장을 했어? 네 생얼 궁금했는데….” 친구가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얼굴로 묻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 피아노 연주회에 나가던 날 교회 집사님이 화장을 해줬다. “혜린이 코가 참 예쁘다. 엄마 닮았네.” 나는 눈살을 구겼다. ‘엄마가 예쁘다고? 엄마 코가 어떻게 생겼지?’ 엄마는 뚱뚱했다.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말을 하면서 손은 따로 움직였다. 집안에 있는 건빵, 비스킷, 모카빵이 엄마의 입으로 들어갔다. 가끔은 엄마가 한심했다. ‘몸이 무겁다고 하면서 저걸 왜 먹지?’ 내가 그나마 키가 크고 마른 건 아버지를 닮아서였다. 내가 언젠가 “저는 아버지 닮았어요. 할머니랑 똑같아요.”라고 말했더니 엄마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 나 닮았어. 친구들이 엄마 어렸을 때랑 똑같대.”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게 있는 좋은 것은 아버지로부터 나쁜 것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었다.


엄마가 창피했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을 무렵, 집에 가서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저녁을 먹고 하라는 엄마의 말에 “속이 안 좋아.”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엄마가 독서실에 왔다. 구저분한 꽃이 그려진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휴게실에서 죽을 먹는데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눈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고기야채죽나 단호박죽이었다면 덜 부끄러웠을까. 희멀건 쌀죽과 간장이 엄마처럼 촌스러웠다. ‘내가 무슨 환자도 아니고….’ 마음을 억누르며 꾸역꾸역 밥알을 삼켰다. 흰 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엄마 같았다. 기미 가득한 양 볼과 핏기 없는 입술은 언제나 아파 보였다.


엄마는 무능력했다. 나와 동생이 초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엄마에게 “나가서 돈 벌어와.”라고 소리쳤다. 자기 계발과 멀찍이 떨어져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엄마가 딱했다. 아버지는 교회나 친척 모임에서 “이여사 참 예쁘죠? 똑똑한 사람이에요. 저 만나서 고생만 했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뚱뚱하고 무능한 엄마와 예쁘고 지혜로운 엄마 중에 어떤 엄마가 진짜인지 헷갈렸다.


아버지는 엄마를 무시했고, 엄마 또한 당연한 듯 스스로를 하대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입고, 아무렇게나 취급당했다. 나도 아버지의 시선으로 엄마를 봤다.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즐겁다가 화내다가를 반복하는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격분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나를 다그친 적도 없지만 환히 안아준 적도 없었다. “엄마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라는 질문에도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는 곰 같았다.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밥과 돈마저 요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 인생에서 오직 기다림으로 존재했다. 언론 고사를 준비하며, 밤늦게 과외까지 하고 집에 들어가면 자정이었다. 엄마는 웅크린 채 거실에 누워 있다가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깼다. 오래된 습관으로 “밥은 먹었어?”라고 물었고, 내가 “응, 들어가서 자.”라고 답하면 방으로 들어갔다. 딸의 생사 외에 궁금한 것이 없었다.


엄마가 옆에 있어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의 자리에 온갖 사람을 앉혀봤지만 돌고 돌아 다시 허전해졌다. 어딜 가든 주목받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나를 봐주길 바랐다. 아나운서가 되면 내가 꿈꾸던 최대치의 사랑이 채워질 것 같았다. 못생기고 무능한 나를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내가 나에게 예쁘고 능력 있는 모습만 허용했다. 시험에 떨어진 나, 살찐 나를 매섭게 다그쳤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았어.’ 애써 나를 설득하며 엄마의 자리를 메웠다. 엄마를 왜곡할수록 내가 점차 사라졌다. 나 자신을 가을이, 제이, 정이 언니 옆에 세워두고, 생기를 잃어갔다. 나를 찾는 여정은 결국 엄마를 복원하는 일이다. 나를 알기 위해 엄마를 써야 했다. 예쁘지 않은 엄마를 쓴다. 엄마의 삶은 시부모를, 남편을, 시누이를, 자식을 울며 삼키는 일이었다. 뱉지 못한 눈물 때문에 엄마의 몸이 점점 부해졌을까.


이 글을 한참 쓰다가 문득 예뻤던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열 살쯤 되었을까. 동생과 장롱을 뒤지다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그곳에 엄마의 스무 살이 있었다. 연보라 셔츠를 입고 친구들과 바닷가에 간 엄마가 다른 사람 같았다. 동생은 눈이 동그래져 “엄마 되게 예쁘다.”라며 감탄을 했고 나는 엄마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진을 들고 가서 “엄마, 이거 엄마야?”라고 물었더니 맞단다. 몇 해 지나 예쁜 엄마가 보고 싶어 옷장을 열었는데, 사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예쁜 엄마를 찾고 싶다. 이렇게 예쁘지 않은 엄마를 쓰다 보면, 어쩌면 예쁜 엄마에게 닿을지도 모르겠다.


Photo by Artem Kovalev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