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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Jan 06. 2023

나는 쓸수록 내가 된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삽질이다

밤 10시에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아이들에게 퉁명스러웠다. 첫째는 “엄마, 8시에 온다고 했잖아.” 따지며 울먹였다. 큰 행사를 앞두고 며칠 전부터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토록 마음 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피곤한데 눈이 감기지 않았다. 문득 떠나고 싶었다. 마음이 어지러운 날에는 쇼핑을 한다. 옥션에 들어가서 ‘여행’ 카테고리를 서성였다. ‘대한민국 숙박대전’ 할인 행사 중이었다. 제주, 부산, 서울에 있는 호텔과 강릉, 속초, 가평에 있는 펜션을 훔쳐보았다. 아무리 시간을 짜내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베스트’ 카테고리로 넘어갔다. 30대 여성을 위한 200개의 상품이 손끝을 스쳐갔다. 살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알을 굴렸다. 치킨 너겟과 선지해장국, 물티슈와 마스크, 운동복과 내복을 무심히 지나쳤다.


새벽 한 시, ‘내가 뭐 하고 있지?’ 순간 깨달았다. 내 안에 숨죽여있던 감정이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지쳤어. 떠나고 싶어.’ 써야 했다. ‘쓰지 못해서 잘 수 없었구나.’ 헨리 나우웬이 말했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기진한 마음을 열고 내 안으로 들어갔다. 겉은 고요했지만 내면은 요동치고 있었다.


마음이 질척한 날에는 글을 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를, 애쓸수록 애꿎어지는 ‘나’를 적는다. ‘사과를 할 상황이 아닌데, 죄송하다고 했지. 책임지듯 그 말을 해놓고 답답했어.’ 나는 내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기가 어렵다. 타오르다가 금방 꺾어버리고는 웃으며 마침표를 찍는다. 감정적으로 얽혀봤자 고통만 어지니 고개를 숙이는 편이 낫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병들었다. 복수하듯 K를 마음에서 도려냈지만, 불현듯 화가 났다. 싱크대 앞에서 터진 만두에게, 덜 익은 고기에게, 상한 파프리카에게 욱했다. 식탁에 앉아 남편과 두 아이에게 거칠어졌다.


글은 안전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미워할 용기였다. K와 L을 사나운 욕과 흉측한 저주로 난도질한다. 글은 그런 나를 가르치지 않고, 계몽하지 않고, 다그치지 않는다. ‘비공개’만 선택하면 영원히 천기가 된다. 오직 나를 위한 집필이다. ‘이제 그만 좀 해.’라고 내가 나를 몰아세울 때, 글은 침묵으로 나를 기다려준다. 그렇게 마음이 길을 찾아가는 동안 나는 다시 상냥한 엄마가 될 수 있다.


글은 나를 아껴준다. 시작은 K로 인한 서운함이었는데 그 끝에 아버지가 서있다. 오늘 내가 느낀 감정과 그에 대한 반응을 쓰다 보면, ‘왜 그랬지?’라는 질문에 닿는다. 지난날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나’가 불쑥 손님처럼 찾아온다. “아주 못 돼 처먹어가지고…. 쟤는 지밖에 몰라.” 그 말을 만나려고 이렇게 굽이굽이 돌아왔나. 아버지의 말, 엄마의 눈빛, 처절한 실패, 뼈아픈 후회와 조우한다. 글은 그런 ‘나들’을 환대해 준다. ‘나’라고 여겼던 감정의 조각들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해체된다. ‘나에게 가장 혹독했던 건 ‘나’였구나.’ 나와 감정의 틈으로 들어가 내가 ‘나’를 안아준다. 어떠한 분노, 허무, 우울도 나라는 존재보다 크지 않다.


탁한 마음이 단 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려는 몸부림으로, 이해받으려는 투쟁으로 묵묵히 쓰는 일이다. 감정은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는 곳에서만 상처를 드러낸다. 글은 상처받은 나를 사랑해 준다. 처음 글을 쓸 때, 나는 그럴듯한 멋들어진 이야기만 썼다. 나를 겉도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감정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진짜 ‘나’를 쓰게 되었다. 악하고 약한 ‘나’와 대면하고, 쓰고, 고치며, 지난날의 사건들을 개정했다. 나에 대한 오해가 이해로 바뀌고, 나를 해석하는 만큼 마음 깊은 곳의 혼돈이 해소되었다. 동일한 삶의 사건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졌다. ‘혜린아, 너 참 예쁘다. 잘하고 있어.’ 정성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억울하고 오만하고 찌질한 ‘나’를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를 보일 수밖에 없다. 가끔은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 망설인다. 혼자 옷을 벗는 느낌이라고 할까. 감정은 적나라한 ‘나’, 가장 어둡고 꿉꿉한 ‘나’인 까닭에 ‘비공개’와 ‘공개’ 사이에서 고민한다. ‘일기’로 둘 것인지, ‘에세이’로 꺼낼 것인지 택해야 한다. 달빛은 그윽하게 ‘공개’를 권하고, 나는 들키기 위한 발행을 감행한다. 쓰는 사람은 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모두 나를 알아버린 것 같다. 읽히고 싶은 마음과 읽히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둥둥 떠다닌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을 알 수 없음이 두렵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친애하는 독자가 된다. 가장 사랑하는 후배의 말을 경청하듯 내가 나의 글을 읽는다.



“읽기와 쓰기의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거야.” -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101쪽.



진심이 담긴 글은 반드시 누군가 알아본다. 같은 마음결을 지닌 이들에게 가닿는다. 먼저 쓴 용기에 박수를 받고, 그들도 어렴풋이 무언가 내보이기 시작한다. 상처의 공명,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늑하다. 그 갈채에 힘입어 또 쓸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연소되지 않고, 쓸수록 쓸 것이 더 많아진다. 내가 나를 한 겹씩 벗으며,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 진정한 ‘나’에게로 다가간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삽질이다. 대학에 입학하고도 수능을 또 봤지만 실패였고, 남편과 매몰차게 헤어졌지만 결국 결혼했고, 아직도 어른이 덜 된 것 같은데 아이가 둘이나 있고, 소설가를 꿈꿨지만 에세이스트가 되었다. 하지만 삽질은 기록될 때, 하나의 소설이 된다. 글을 쓴다고 앞으로 삽질을 안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올해에도 계속되는 나의 삽질을 더욱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글은 나를 다정하게 한다. 나를 바라보던 눈으로 당신도 정답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Photo by Ilya Pavlo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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