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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Nov 22. 2023

훔치다

마음을 훔치려던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손으로, 물건을 훔쳤다.

엄마가 목요일마다 속회 예배를 드리러 가면 나와 할머니 둘이 슈퍼를 지켰다. 금전함을 열어 지폐는 차곡차곡, 동전은 반듯반듯 정리했다. 손님이 계산대 위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나는 커다란 업소용 계산기를 두드리며 값을 더했다. 타다닥, 띵, 잘랑, 거스름돈을 내어주고 물건을 검정 봉지에 담아내면 잠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엄마가 화장실에 가거나 은행에 잠시 다녀올 때면 혼자 슈퍼를 봤다. 엄마가 나가고 손님도 없으 나는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다가 금전함을 열었다. 댕 금전함 열리면 사부작 2백 원을 꺼내 청바지 워치 포켓에 쏙 넣었다. 엄마가 동전 개수까지 기억할 리 없었고 CCTV도 없으니 2백 원의 행방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퍼에서 피아노학원 가는 길에 분식 포장마차가 있었다. 주문하면 바로 튀겨주는 떡꼬치는 학교 앞에서 미리 튀겨놓고 파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쫀득하고 파삭하고 따끈해서 떡꼬치를 베어 문 순간 피아노 학원에 가는 일도 밤늦도록 엄마를 기다리는 일도 거뜬히 해낼 것 같았다.


떡꼬치를 몇 번이나 사 먹었을까.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포장마차에서 떡꼬치 사 먹었어? 승재엄마가 너 봤다는데….” 아니라고, 승재아줌마가 잘못 본 거라고, 내가 거기 왜 냐고 시치미를 뚝 뗐다. 다행히 엄마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이제 도둑질은 그만하자.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훔치는 건 나쁜 짓이야.’ 자책했지만 막상 슈퍼에 혼자 있으면 금전함에 자꾸 손이 갔다.


얼마쯤 지나 떡꼬치를 먹으러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물었다. “너 돈 어디서 났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생각이 뒤엉켰다. ‘아줌마가 왜 이런 말을 하지? 엄마가 말했나? 승재아줌마가 또 봤나?’ 포장마차 주위에서 무언가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낯설었다. 혼자 발가벗겨진 기분, 꼬리가 길어 결국 잡히고만 기분….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떡꼬치를 당당하게 받아 들었지만 떡꼬치는 더 이상 그 맛이 아니었다. 그 후로는 포장마차 앞을 지나는 것조차 창피해 먼 길로 돌아 학원에 갔다.


아버지가 바빠서 엄마가 슈퍼 문을 열어야 하는 날에는 아침부터 라면을 먹었다. 일주일 동안 라면만 먹고 싶다고 말하는 나였지만 엄마가 없는 아침에 허락된 라면은 맛이 없었다. 집에 라면마저 없는 날에는 새로나슈퍼로 갔다. 문을 연지 얼마 안 된 새로나슈퍼는 깔끔하고 깨끗했다. 주인아줌마는 새댁이었는데, 식전부터 스낵면을 사가는 나에게 “아침부터 라면을 먹니?”라고 물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말투,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그 말이 꼭 엄마의 말 같아서 그 이후로 원래 가던 부원슈퍼보다 새로나슈퍼를 더 많이 갔다.


새로나슈퍼에서 새콤달콤을 훔치기 시작한 것은 아마 떡꼬치 사건이 있고 난 뒤일 것이다. 나에게는 벌집핏자 하나 살 돈밖에 없었는데 새콤달콤이 눈에 들어왔다. 새콤달콤, 아이셔, 비틀즈 같은 캔디류는 계산대에서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새콤달콤 하나쯤 바지 앞주머니에 넣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긴 티셔츠로 새콤달콤을 감추고 과자가 놓인 쪽으로 가서 벌집핏자를 집었다. 과잣값 3백 원을 계산하고 나와서 들킬세라 집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방에 들어와 티셔츠를 올리면 새콤달콤이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대단한 을 해낸 것인지, 큰 죄를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새콤달콤을 입에 넣었다. 시큼하고 달큼한 새콤달콤을 오물거리다 보면 엄마가 왔다.


새로나슈퍼에 가서 여느 때처럼 새콤달콤을 주머니에 감추고 베이컨칩만 계산대에 올렸데 아줌마가 물었다. “너무 오래 고르는데… 다른 것도 있는 거 아니야?”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상의만 살짝 걷어도 새콤달콤이 보일 터였다. ‘제대로 걸렸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학교에도 연락하겠지? 경찰서에 잡혀 가나?’ 떨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태연하게 손을 걷어 보였다. “다른 건 없어요.” 아줌마는 알았다며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값을 계산했다.


그 이후로 도벽은 사라졌다. 나는 친구들이 매점에서 만두를 훔쳐 먹자고 했을 때 가담하지 않는 중학생으로 자랐다. 마트 점원의 실수로 물건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을 때 다시 마트에 들어가 추가 금액을 내는 성인이 되었다. 그건 아마도 뻔한 거짓말을 하는 나를 몰아세우지 않은 엄마, 내 티셔츠를 들추지 않은 새로나슈퍼 아줌마 덕분이었을 것이다.


다만 떡꼬치나 새콤달콤을 보면 아홉 살의 ‘나’가 떠올라 스스로에게 언짢아졌다. ‘난 나쁜 아이야. 다행히 경찰서에는 안 갔지만 지옥 불에 떨어질 거야.’ 조용히 나무랐다. 부모님이 슈퍼를 시작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슈퍼를 넘긴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금전함에 손을 대서 망한 거라고….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새로나슈퍼가 문을 닫은 것도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나 같은 아이들이 새콤달콤을 빼돌려 말끔했던 그 슈퍼가 결국 문을 닫게 된 거라고….


그 시절 ‘나’는 떡꼬치가, 새콤달콤이 왜 그리 먹고 싶었을까.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것에 왜 그토록 마음 졸여가며 손을 댔을까. 하나라도 틀리면 빵 점, 아버지 앞에서는 백 점만 살아남았다. 나는 단 하나도 틀리지 않기 위해 나를 더 옥죄었다. 틀린 ‘나’를, 틀릴 수도 있는 ‘나’를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고 싶었는데 마음 주는 이가 없었다. 마음을 훔치려던 손으로 물건을 훔쳤다. 엄마는 슈퍼로 사라졌다. 나를 지켜주던 엄마가 곁에 없는데, “다 큰 애가 언제까지 엄마, 엄마 할 거야. 그만 좀 울어. 언니가 돼서 동생보다 더 우니?”라는 말에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눈물을 훔치던 손으로 물건을 훔쳤다.


Photo by Carli Je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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