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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마 Apr 28. 2022

남들이 나를 넘겨짚을 때

미국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런 데에 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겨울이었다. 작년 겨울에는 수업을 하나밖에 듣지 않았다. 석사과정이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교육대학원생으로서 넉 달간 일반 학교에서 풀타임 교생으로 일하게 되는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대학원 수업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몸은 바빠도 마음은 가뿐했다. 고작 3학점을 들으면서 몸이 바빴던 것은 그 안에 실습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주간 고등학교에 나가 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재학 중인 학교의 국제학생 센터에서 영어 튜터로 일을 하기도 했다. 국제학생 센터에서는 모든 국제학생에게 1:1 영어 튜터링을 제공한다. 매일 11시부터 4시까지 튜터링이 있었고 금요일 오전에는 역시나 국제학생 센터에서 제공하는 언어교환 세션을 진행했다.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수업을 하는 시간이 월등히 길어지니 가끔 내가 아직 졸업을 안 한 학생이라는 사실을 깜빡깜빡했다. 이럴 때에 친구로부터 ‘인터내셔널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 파티에는 다른 한국인 친구와 같이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전화를 했더니 이 친구가 길을 잘못 들었단다. 이름이 비슷한 다른 장소에 간 것 같다고 했다. 친구에게 건물 이름을 알려주느라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 고개를 들어 간판을 올려다보면서 통화를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몇 번 망설이다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리곤 내가 친구에게 읽어주고 있던 그 간판 이름을 나에게 읽어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불필요하고 과한 친절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방금 내 입으로 읽는 것을 못 들었단 말인가) 교회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는 친구네 교회의 ESL 부서였다. 거기서 마주치는 미국인의 절반이... 영어선생인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프로페셔널한 나머지 나에게 말을 천천히 해줬다. 모두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을 또박또박 천천히 하니까 꼭 길 물어보는 관광객이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다. 국제학생을 위한 파티에 나 같은 동양 애가 친구랑 한국어로 떠들고 있으면 아무래도 당연히 외국인 같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불쑥불쑥 “아니, 근데 내가 이중언어 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면 어쩌려고” 하는 마음이 올라왔지만 티는 안 냈다. 어디서 왔는지 묻기 전에 "국제학생이세요?" 한 마디쯤 덧붙일 수 있지 않았을까도 싶었지만 그런 티도 안 냈다. 어쨌든 나는 한국에서 온 국제학생이 맞으니까. 게다가 이런 명절에 갈 곳 없는 국제학생들을 위해서 파티도 열어주고 어쨌든 좋은 사람들이 아닌가. 다들 친절하고 유쾌하고 따뜻했다. 학생인지, 뭘 공부하는지, 쉴 때는 뭘 하는지, 그런 얘기를 주로 했다. 그러다 내가 ESL을 전공하며 국제학생 센터에 영어 튜터로 있다고 얘기를 하면 상대방은 대체로 “Oh!?”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재빨리 어색함을 숨겼다.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는 교육대학원의 커뮤니티 영어 프로그램을 대면으로 진행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18세 이상의 영어 학습자 누구에게나 무료로 영어 수업을 들을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거기에 선생님 중 한 명이자 프로그램 조교로 있었다. 조교의 업무 중 하나는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출석부에 선생님들 서명을 받는 거였다. 학기의 첫날이었고 조교로서도 첫날이어서 스태프끼리도 서로 잘 몰랐다. 나는 명단을 들고 교실을 방문할 때마다 나를 프로그램 조교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명단을 보니 이름 하나가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다들 처음 보는 사이라서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기가 힘들었다. 누구더라 하고 고민하다가 짐작 가는 사람의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는 이미 학생들이 꽤 앉아있었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교인데요, 혹시 출석부에 사인하셨나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사인 안 하셔도 돼요.”


        내가 정정했다.


        “아니요, 사인하셔야 되는데...?”


        그가 설명했다.


        “학생들은 서명 안 해도 돼요. 교사용이에요. 뒤에 빈자리 가서 앉으세요.”


        내가 다시 정정했다.


        “알아요. 저도 교사예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조교이기도 하고요. 여기 서명받는 게 제 일인데요.”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그는 내 얼굴만 보고 당연히 학생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이 멋쩍고 미안해서 오 마이 갓 아임 쏘리를 연발하며 웃었고 나는 같이 일하는 사이에 기분 상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웃었다. 이런 웃음을 반복할 때마다 나는 자격지심이 커지거나 마음이 뾰족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하게 타인을 선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기도 한다. 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타인의 편견은 타인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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