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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떠나 Apr 27. 2021

잘 가, 와자뵹

반려 선인장 와자뵹과의 이별에 대하여



 에피톤 프로젝트라는 인디 밴드를 좋아한다. 멜로디가 부드럽고 보컬의 음색이 따뜻해 한동안 즐겨 들었다. 밴드의 대표곡 중 ‘선인장’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곡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가사 때문이다.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마음고생이 심했을 때였다. 광고인을 꿈꾸던 대학생 시절, 꼭 가고 싶었던 회사에 드디어 입사한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팀에 있던 선배가 나를 몹시 미워했다. 자신을 서포트할 수 있는 시니어급 카피라이터가 필요했는데 웬 초짜 주니어 카피라이터가 자리를 채우자 굉장히 답답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인사를 무시하는 건 기본, 다른 팀원들에게는 보인 적 없던 짜증 공격이 계속되니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팀장마저도 그녀의 노골적인 불만을  제압하지 못했다. 홀로 그녀의 불만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외롭고 분했다. 그때 우연히 이 노래를 알게 된 것이다. 듣는 순간 가사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출근할 때에도 퇴근할 때에도 자주 이 노래를 들었다. 그때 마침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 중 하나가 ‘다육이 키우기’였다. 회사 근처 가까운 쇼핑몰을 둘러보러 갔는데 역시 그곳의 디자인 문구점에서도 갖가지 다육이를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와자뵹을 처음 만났다.


 문구점엔 생각보다 다양한 다육이를 팔고 있었다. 검지 하나 크기의 작은 녀석에서 화분 바닥 크기만 손바닥만 한 녀석까지. 길쭉하고 키가 큰 녀석도, 잎이 동그란 대신 키가 작은 녀석도 있었다. '베이직 이즈 베스트'를 모토로 하는 나는 누구나 '선인장'을 상상했을 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모양의 다육이를 골랐다. 은색 깡통 안에 뿌리를 내린 아기 선인장이었다. 흙 밖으로 나온 키가 3센티쯤 되어 보였다. 가격은 3000원.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생명을 이렇게 덜컥 키우기 시작해도 되나 싶은 죄책감과 두려움, 책임감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초등학교 앞에서 500원에 병아리를 사 오는 기분, 딱 그랬다. 무튼 나는 녀석을 회사 책상 한 귀퉁이에 놓아두었다. 그나마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자리로 골랐다. 그날부터 선인장의 이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제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가 의지할 수 있으면서도, 너무 거창한 이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이 아이디어를 줬다. 친구네 강아지 이름인 ‘와자뵹’은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와자뵹. 아주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와자뵹!을 외치며 씩씩하게 자라자는 의미에서 선인장의 이름은 와자뵹이 되었다.


아직 와자뵹과 어색하던 시절. 자그마한 와자뵹.


 와자뵹을 친구로 맞이하고, 다른 다육이 두 개를 더 선물 받아 책상 위엔 다육이 삼총사가 결성됐었다. 허나  두 녀석은 얼마 못가 죽고 말았다. 내심 내가 고른 새끼에 더 마음을 쏟았던 걸까? 어쨌든 와자뵹은 꿋꿋이 혼자 살아남아 나의 회사 생활을 쭉 함께 해줬다. 책상 달력에 와자뵹 물 주는 날을 표시해 놓고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금요일 저녁이면 늘 해가 가장 잘 드는 창가에 와자뵹을 데려다주고 퇴근을 했다. 나와 사람들이 없는 동안 와자뵹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행히 와자뵹은 함께 회사에 다니는 내내 건강하게 자랐다. 그동안 나를 미워하던 선배는 내게 마음을 열었고, 조직개편으로 팀이 바뀌었고, 나는 승진을 해 대리가 되었다. 와자뵹과 함께하고부터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내 편이 있다는 든든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에 점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와자뵹이 노래의 가사처럼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던 덕이 컸을 것이다.


새로운 다육이 친구 옆에서 쑥쑥 자라고 있던 와자뵹

 그 뒤로 회사를 옮길 때에도 와자뵹은 늘 함께였다. 전 회사의 짐을 집으로 옳길 때에도, 그 짐을 새로운 회사에 갖다 놓을 때에도 상자 한 귀퉁이에 와자뵹을 안전하게 옮기는 게 우선수위 중 첫 번째였다. 그러던 중 캐나다에 나갈 일이 생겼다. 와자뵹과 1년 동안 헤어지게 된 것이다. 벌써 두 살. 녀석이 제법 키가 커져 보기만 해도 흐뭇할 때였다. 생물 다육이를 캐리어에 넣을 수 없을뿐더러, 현지에서 숱한 이사를 하게 될 것이 뻔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생에게 와자뵹을 잘 키워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한동안은 와자뵹을 잊고 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환경에 혼자 적응하려니 정신이 없기도 했고, 매일 계속되는 낯선 경험에 와자뵹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고, 적응의 끝엔 상황과 사람에 대한 단점이 보이는 법이다. 생활이 덜컥 거리는 순간마다 와자뵹이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동생에게 와자뵹의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늘 사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진 속엔 못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 자란 와자뵹이 있었다. 방 한켠에서 햇빛도 잘 안 들었을 텐데 녀석은 조용히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일 년 뒤 와자뵹을 다시 만났을 때 녀석은 괴물처럼 휘청휘청 큰 키로 자라 있었다. 화분 크기의 3-4배는 되어 보였다. 기특했다. 흙에 나무젓가락을 꽂아 지지대를 만들어줬다. 이름처럼 화이팅 넘치게 자라난 녀석은 자신의 성장으로 늘 내게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허리가 휘어버린 와자뵹


 그런 와자뵹과의 이별은 갑작스러웠다. 이사 간 새 집의 어디에 와자뵹을 둘까 고민하다 창가 옆 거실장 위에 두기로 했다. 올해 봄까지 녀석은 변함없이 자랐다. 그러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와자뵹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창가에서 비를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가족들 중 누군가 물을 너무 많이 줬었는지도 모른다. 와자뵹의 일부는 조금씩 조금씩 썩어갔다. 꼿꼿하던 와자뵹의 허리는 꼬부랑 노인처럼 구부러져 갔다. 그런 와중에도 난 회사 일로, 여러 약속으로 와자뵹을 챙기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와자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세상을 떠났다. 내가 캐나다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3센티의 작은 체구로 이 삭막한 도시 생활을 견딘 강한 생명이었다. 3년을 함께 해주어 고마웠고 좋은 친구를 더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선인장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 머리 위로 눈물을 떨궈. 그때가 우리 함께 했었던 날 그때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날이 되면 간직했었던 그대의 눈물 안고 봄에서 있을게.’

 하늘에서는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와자뵹이 예쁜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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