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과 드라이브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
무언가 진짜 중요한 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말 중요한 가치, 기회, 교훈 등은 세상이 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들에게 흰 쌀 밥 위에 생선을 발라 얹어 주듯, 그렇게 나는 숟가락만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숟가락만 입에 넣으면 되도록 놔두질 않는다. 결코. 그래도 분명 세상이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 나에게 힌트를 주기는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걸 아주 알쏭달쏭한 형태로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 날 것 그대로를 준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그 암호 같은 교훈을 해독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같은 맥락으로, 중요한 기회나 가치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고 잘 드러나지 않아서, 항상 주위를 살피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내 힘으로 불필요한 미사여구, 소모적인 논쟁을 비롯하여 내가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나의 주위를 환기시켜야 한다.
잔뜩 부풀어 오른 복잡성을 녹이고 분해해서 본질에 닿는 명료함과 간결성에 도달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몇 개가 있다. 그중 운전은 아주 자주 사용하는 Therapeutic 한 방법이다. 운전에 집중하면서, 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또 풍경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이 가진 특권이 있다. 적당한 노동으로 인해 아주 집중해서 생각하라고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음으로써 여유로움을 얻을 수 있고, 그 여유로 인하여 어떤 특정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조금 더 다양한 폭으로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차분히 본질에 닿는 생각을 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책상에 앉아서 어떤 어려워 보이는(그리고 주로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면 더 답답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 문제에 대해 일대일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은 부담을 크게 느끼게 된다. 어쩌면 사실 이 방법이 집중력의 관점에서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롯이 고민'만'해야 하는 상태로 있다 보면, 나는 빨리 이 상황을 탈출하고자 조속히 결론을 내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곤 한다. 부담스럽고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나의 질문에 성급하거나 미숙한 답변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오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할 때에는 시간을 조금 더 두고, 틈틈이 적당한 노동으로(운전, 걷기, 요리 등) 나의 관심을 분산시키며 천천히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도움이 된다.
내가 직접 운전을 하는 게 조금 더 좋지만, 내가 운전을 하지 않는 드라이브도 좋아한다. 그래서 운전을 할 수 없던 고등학생, 대학교 초년 시절에는 목적지 없이 광역 버스를 타고 밤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살고 있던 서울에서 그날 끌리는 목적지까지 가는(수원, 분당, 파주 등) 버스를 타고,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정리하고 답답한 마음을 환기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버스에 타는 사람들,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바깥 풍경을 살피고, 가끔은 창문을 열어 바깥바람을 느끼기도 하면서. 도착지에 이르면, 내려서 바로 돌아가는 편 버스를 탈 때도 있고, 아니면 근처 카페에서 생각을 글로 정리하거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면 조금 걷기도 한다. 정해진 것은 없다. 그냥, 그날 발이 이끄는 대로. 꽤나 자주 이런 밤 드라이브를 즐겼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나의 즉흥성을 너무 고백해 버린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미국 생활에서 조금 아쉬운 점을 꼽자면 단연코 아직 내 차와 면허가 없어 운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가끔 '네가 지금 하는 일을 안 하면, 또는 은퇴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라고 물어보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택시 운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운전에 진심인 나다. 야경을 좋아하기도 하고 밤 운전이 주는 그 특별한 매력이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걷기나 다른 distraction 활동 등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탈출구를 하나씩 찾아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운전/드라이브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밤에는 혼자 걷는 건 안전하지는 못해서 더더욱.
며칠 전에는 친구가 운전해주는 차로 골든 게이트 파크(Golden Gate Park)에 야경을 보러 드라이브에 다녀왔다. 골든 게이트 파크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생긴 공원인데, 가로길이 5km, 세로 길이 1.6km에 해당하는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공원이다. 다들 골든 게이트 파크에 대해서는 뉴욕에 센트럴 파크가 있다면, 샌프란에는 골든 게이트 파크가 있다는 설명을 하더라.
공원이 매우 큰 데다가, 공원 안에는 다양한 테마로 꾸며진 곳들이 있다.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일본 정원, 드 영 뮤지엄(de Young museum), 산책로와 피크닉을 즐길 수 있는 공원 속 공간까지. 넓은 공원을 잘 꾸며둬서 한 번 가면 반나절은 가뿐히 있을 수 있다고들 한다. 아직 이 공원에서 긴 시간을 보낸 적은 없고, 다음 주 주말 정도에 가 볼 예정이다.
공원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살짝 걷다가 찍은 사진들이다.
이 날 야간 드라이브에서 했던 생각들 중 일부를 공유할까 한다.
살면서 일종의 '거리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관계에 대해서, 또 스스로에 대해서. 과하게 집착하거나 매몰되어 있지 않으려면, 한 발 떨어져서 관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특히 완급 조절을 잘 못하고, 'All or nothing'의 태도를 삶의 많은 영역에서 견지해 왔다. 최근 다시 읽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카뮈의 말을 빌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볼 수도 있겠다.
"사람은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를 가리켜 동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혐오한다. 나는 전체, 혹은 무를 원한다."
과장을 꽤 보태서 이것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와 같은 태도를 -일시적으로라도- 가지고 있다는 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내가 이루어 낸 크고 작은 성취나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데에는 분명 내가 이런 성향에 도움을 받은 부분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속가능성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요즘이다. 조금 더 중장기 적인 계획을 하고, 그것을 위해 아주 작은 노력들을 매일 조금씩 이루어 내고 싶다. 큰 변화나 성장을 위해서는 지속성이 너무나도 중요한 요인일 때가 많다.
일종의 거리감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욱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거리감이 없이 아주 밀착해 있다 보니 도통 오래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short sighted 되어 아주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에 매몰되어 버릴 때도 많다. 친구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는데, 그 친구는 무언가 어떠한 크고 복잡해 보이는 문제에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딱 한 발 떨어지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이 문제가 생과 사의 문제인지 고민해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거대하고 아주 중요한 문제 앞에서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얼마나 연약해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위로를 받거나 오히려 그 순간 고려해야 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게 되기도 한다고 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긍정적인 무력감(단어를 바꿔 표현하자면 겸손함일 수도 있겠다)과 비슷한 결일 것이라 추측한다.
어떤 외부적 문제나 타인과의 관계보다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필요한 시점에서 나와의 관계에서도 한 발 떨어질 줄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암호화된 형태로 세상이 나에게 제공해 주는 지혜들을 잘 버무려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만들어 나가는 힘(통찰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 느낀다.
또 이날 흘러가는 생각들 중에 몇 번이고 곱씹게 되었던 동일 책 <시지프 신화>의 구절을 두 개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날의 드라이브 중에서 떠다니는 생각들 중 꽤나 자주 나오던 친구들이었거든.
"나는 영원을 갖지 못하기에 시간과 한 편이 되고자 한다. 나는 향수도 원한도 고려하고 싶지 않으며 오직 명확하게 보고자 할 따름이다.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개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개인을 짓뭉개는 것은 세상이고, 이를 해방시키는 것은 나이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