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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Oct 06. 2020

[철학] 과학주의 비판

 


<들어가며>


 내가 아는 사실이 무너진 적 있는가?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사실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무너지지 않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과 태양이 돈다고 믿던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던 부르너는 화형을 당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그렇게 소크라테스도 죽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참 허무한 이야기다. 모두가 믿던 진실이 틀렸고, 진실을 주장했던 선도적인 사람들은 죽임 당했다.


 가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려고 투쟁하기보다, 우리의 믿음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생각을 전환하고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사실들을 무너뜨려보는 것이다. 칸트의 표현대로 하자면 "코르페니쿠스적 전환"이고 헤겔의 표현대로 하자면 "계몽"이다. 일상성의 항거에서 벗어나, 또 다른 믿을만한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

 과학에 대한 믿음을 의심해본적 있는가? 인간사에는 늘 과학이 함께 있었고, 당대의 사람들은 당대의 과학을 믿으며 산다. 그리고 과학은 늘 발전해왔다. 즉 다시말해 과학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시시때때로 무너지고 새로 건설되어졌다. 일례로, 고대 그리스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물리학, 지구과학, 식물학 등 수많은 자연과학을 연구했는데,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우스운 소리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습,냉,온의 성질에 의해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할 수 있다는 4원소설이나, 물질은 연속적이며 한없이 쪼갤 수 있고 빈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속설 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오랜시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지만, 현대과학기술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식으로 근대를 지나 폭발적으로 성장한 과학은 수천년 간의 인간의 지식을 위한 노력이 무안할만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러면 지금의 과학은 완전체인가? 현대과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과학적 지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강한 믿음으로 건설한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이 통째로 무너질 가능성은 없는가? 혹시 어느날 사과를 떨어트렸는데 갑자기 하늘로 치솟을리는 없을까?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모든 것들 또한 미래 인류에겐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현대과학의 틀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과학적 현상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예를들어 양자역학(미시물리학)은 이미 현대의 패권자인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과학의 세계를 보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중슬릿실험으로부터 전자나 원자핵같은 입자들이 평상시에는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떠한 '관측'을 받으면 입자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실험으로부터 확실성의 원리를 정초로 건설된 고전역학과는 정반대로 '확률 붕괴'라는 의심스럽고, 기괴한 특성이 발견된 것이다.


 양자역학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제안한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고양이가 상자 속에 갇혀 있고, 고양이와 함께 독가스가 들어 있는 통이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가 살포될 확률은 정확히 50%이다. 독가스가 살포되면 고양이가 죽고, 살포되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죽지 않는다.  5분뒤에 고양이는 살아있을까? 혹은 죽었을까? 결정론을 정초로하는 고전역학자들은 상자를 열어서 관찰을 하든 안하든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중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확률붕괴의 세계에서는 고양이가 죽은 세계와 살아있는 세계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상자를 열고 관찰을 통해서만 그것은 결정되어 진다. 즉 관찰을 통해서만 결과는 의미를 갖는것이고, 결과는 항상 관측에 지배를 받게 된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이중슬릿실험은 이러한 중첩론의 근거를 마련하는 실험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양자역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대로라면 우리의 선택과 관찰 행위 하나하나마다 세계가 중첩적적으로 분리되고 있고, 우리는 평행하거나 혹은 다중한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가능성도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인문학적 글의 목적이 도대체 이 고전역학으로 설명안되는 현상을 규명하고, 혁명적인 과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하나의 예로, 우리가 확고히 세워올린 과학에 대한 믿음이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상자를 열지않아도 죽음에 대한 결과가 이미 상자 속에 담겨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과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이 시간의 끝에서도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너무나 자신있게도 세계의 중심으로 지구를 외치던 중세인들을 조소하는 현대인들은, 과연 인간 지성사의 끝에 서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가? 21세기의 지식은 조소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하면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죽임 당했고, 브루너도 그렇게 죽임 당했다. 이제 현대사회에서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이 철학을 삼켜버리려 하고 있다. 현대에 만연한 과학주의는 과학의 논리로 수 많은 철학의 주제들을 해체하였다. 모든 것은 과학의 법칙 앞에 논리정연하게 질서지어지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그 요구에 응당하지 못한 것들은 믿음에 반하는 것들로 그들에게 있어 분명 사유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되어진다.


 근대 역학자들은 인과성, 원인과 결과, 힘, 공간, 시간 등의 기초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과학의 체계를 세웠지만, 해당 개념들의 정당성과 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과학은 필연성과 확실성이라는 인식의 기반 위에서 강한 믿음을 현대인들에게 제시했지만, 필연성과 확실성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학의 기초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을 거부한다. 필연성과 확실성의 원리가 흔들리면 과학이 성립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한 반성은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거북스럽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나무에서 사과가 왜 떨어졌는지 물어보지만,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게 만든 중력이 법칙이 왜 존재해야하는지를 물어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현대의 만연한 과학사회에서 우리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질문할 수 있지만, 그러한 원리의 근거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던지기 힘들다. 아마 그것은 앞서 말한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이 과학을 해치는 질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내부적 자연과학의 한계>

 우리는 과학에 대하여 좀 더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러한 믿음의 근거를 확실하게 찾고 오직 이 근거의 태두리 안에서 과학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 내부적인 학문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수 많은 자연 인식들을 모으고 분류하고 사용하고 정의하며 과학이라는 학문을 건설했다. 그렇다면 수 많은 자연 인식들에 대한 학문이 어떻게 인간 내부에 존재하며, 과학의 한계가 인간의 한계로 국한되는 것일까? 그것은 과학이 자연 그 자체를 인식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 모은" 자연 인식에 대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기반으로 수집한 자연인식들을 통해 과학을 건설했다. 인간에게 전달된 자연인식은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닌, "인간만의"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칸트의 구상설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온 세계가 인간에 의해 구성됬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커피가 한잔 있다고 해보자. 검은 색도 있고, 향기로운 커피 냄새도 있고, 따뜻함도 있다. 또한 일정한 모양과 부피를 유지하고 있는 컵도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잡다한 인상들을 인간의 오성 아래 모아서 사고한다. 인식들을 모아서 개념화할 수 있는 인간 오성의 능력이 없다면, 검은색, 커피냄새, 따뜻함 등의 잡다한 인상들은 매우 맹목적이며 서로 분리되있기 때문에 결코 커피 한잔이라는 정리된 개념으로 사유될 수 없다. 커피 한잔은 각기의 직관적 감성들로 현존할 뿐 커피라는 개념, 즉 완성된 대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인간의 자발적 오성으로 구성된 것이다. 즉 비인간적 존재자들에게 커피 한잔은 맹목적이거나 혹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또 다르게 구성될 것이다. 박쥐에게 커피한잔은 초음파 덩어리로, 벌들에게 커피한잔은 자외선 덩어리로 인식되어진다고 배운것처럼 말이다.


 즉 과학 안에서 세계는 있는 그대로 인간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대로만 인간에게 비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은 세계를 인식하는 자(인간)에 "대하여" 서 있는 대상으로 규정하였고, 그 대상을 늘 동일한 방식으로 인식함에서 진리를 추구하였다. 인식의 확실성 즉 과학의 완전함을 위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근거시켰으며, 그러한 인간에 의해 세계는 그 자체로서의 세계가 아닌 인간이 요구하는 모습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즉 세계는 인간의 요구에 따른 "상"으로서만 인간에게 비춰지게 되었을 뿐더러,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진리'가 되어버렸다.


 이를 통해 인식의 주체인 나와(subject) 인식의 대상인 객체(object)의 관계는 명확해졌다. 인식의 대상인 객체는 전적으로 주체(인간)의 사유능력, 인식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명증적이거나 실체적인것이라 할 수 없다. 즉 과학의 대상인 객체들은 태생적으로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주체(subject)는 라틴어의 어원에 따라 "아래(sub)에 세우다(iectum)"를 의미한다. 즉 밑에 세워져 있어서, 자신 위에 존립하는 모든 것의 근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립근거로서의 대상은 물론 "주체에 대하여(ob) 세워진(iectum)" 객체일 것이며(object), 바로 그것이 인간에 의해 인식되어지는 대상이자 과학의 대상이다. 과학의 기저에는 인간이 있다. 과학은 인간만의 학문이자 인간 내부적 학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인식되어진 커피한잔이 아닌 인간에게 커피라는 인상을 전달한 "그것", 박쥐에게는 초음파로, 벌들에게는 자외선으로 비춰지는 "그것", 인간에게 주어진 잡다한 인상들의 발원지로 요청되어야만 하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비춰지는 커피한잔의 일면적인 모습 밖에 볼 수 없다. 즉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며,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형이상학으로서의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경험의 단서는 전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것보다(커피한잔) 더욱 실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해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인식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한 과학에 의하여 판단되어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축적되어 온 귀납적 지식들과 합리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건설된 광범위한 체계적 지식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과학은 우리의 경험을 기반으로 시작되며, 과학의 한계는 곧 경험의 한계이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은 과학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유일한 정답이라는 신념아래 과학의 이름으로 경험 너머의 것들을 부정한다. 과학이 경험을 한계로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경험 너머의 것들을 부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과학주의 시대에서 당당하게 신과, 영혼, 세계와 같은 것들을 논의하지 못한다.


 현대의 과학주의적인 태도는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 과학의 권능을 확장하며, 과학을 인간에 있어서 최고의 인식형태로 간주하고 원리적으로 모든 문제가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연과학의 대상은 더이상 자연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 혹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확장되어, 자연과학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서 정밀하게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인간의 인식을 위해 건설된 학문이, 인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대상들까지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혹은 어떤 존재의 계열에 속해 있는가? 우리는 과연 자연(自然)의 말 뜻대로 스스로 그러한 존재, 즉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자연 속에서 자연을 거부하는,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이 물음은 다소 함축적이며 복잡하다. 이것은 과학과 삶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를 잠시 바꿔야 한다.


 자연이란 인간의 의지가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뜻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자연"하면 생각하는 산과 바다, 동물과 식물 이외에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간도 자연이고 공간도 자연이며(칸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 또한 인간 의식 내에서 구성된 산물이지만..) 또한 인간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신도 자연이다.  


 자연과학은 이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한다. 설명이라 함은 인과관계의 논리 하에서 객관성을 유지한 채로 자연을 설명하는 것이다.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자연을 일정한 보편 법칙 아래 포섭하고, 어떤 특수한 현상에 대하여 그것을 다시 보편 법칙의 인과 관계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에서 놓친 핸드폰이 떨어지는 현상에 대하여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해보자면, 지구는 지표 근처의 물체를 연직 아래 방향으로 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가 물체를 받치지 않는 한 그 물체는 떨어지는데(L, 법칙), 핸드폰을 받쳐주는 어떠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C, 조건) 핸드폰은 떨어진(E, 현상)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자연과학은 인간의 개입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모든 것들을, 인과관계라는 보편법칙 아래 포섭하고 설명한다. 과학은 항상 원인을 찾는다. 결과는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하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찾는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설명'의 방식은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보편 법칙(L)들은 수많은 세계의 현상(E)들을 경험하고 관찰하며 얻은 것들이기 때문에(귀납), 비록 과거에 수많은 현상(E)들을 관찰하였다 하여도 앞으로 발생할 현상(E)들의 표본을 포함하지 않는 한에서의 필연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끝이 오지 않는 한 우리가 세운 자연의 보편 법칙들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또 현상들로 세워진 보편 법칙아래에 다시 보편 법칙을 연역하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순환의 오류를 겪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흄이 지적한 '귀납의 오류'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인간에게는 자연의 모든 현상들을 연역적으로 논리타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태초의 신적인 명제가 없다. 인간은 오직 눈과 지능을 가지고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귀납적으로 이것들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객관적 필연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찝찝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인간을 지적 풍만함의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실용적이다. 과학은 인간사에서 약 2000년동안 쌓아올린 지식에 대한 믿음을 일순간에 무너뜨렸다. 과학은 현상하는 것들의 원인을 규명해나가며, 그러한 법칙들을 이용하여 비약적인 기술의 진보마저 이룩하였다. 이렇게 과학의 힘으로부터 우리는 수 많은 것들을 누리며, 과학에 대한 믿음을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과학의 한계를 넘어섰다. 물리적인 사물들은 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자연과학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목적에 근원하기에 이러한 질문에 하나 하나 답변해 나갈 것이고 결국 자연과학의 끝에는 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현상하는 모든 것들은 인과관계의 법칙아래 포섭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그들은 자연과학을 넘어서는 영역에까지 침범하고 있다. 그들은 태초의 것을 연구하고,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들에겐 오직 과학만이 정답이다.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 부정하는 자연과학은 일체 인간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연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찾는다. 마치 컴퓨터와 같이 입출력 방식의 사유체계를 통해서 인간을 규정하고, 인간 내면에 내재된 영혼이나 정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내용들은 일체 거부한다. 인간의 한계로는 도저히 영혼이나 정신 따위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인과법칙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는 자연이며 생리적 기계인 것이다. 자연과학의 이러한 주장은 "자유에 대한 도전"이며 약 2000년간 지속되어온 인간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도전이다.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이다. 여기서 외부적인 구속이라 함은 나의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포함시키기 때문에 그 속에 자연의 필연적 인과법칙 또한 내포하고 있다. 즉 의지의 자유인 자율로서의 자유는 원인들의 타율로서의 자연법칙 아래 포섭되지 않는 것이며 이것들과 분명 대립하고 있다. 


 앞서서 밝힌 자연과학과 정신과학 간의 대립, 과학과 삶의 대립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자연과학의 뜻대로 인간은 인과관계의 법칙에 포섭된 영혼 없는 껍대기, 혹은 기계인 것일까? 아니면 정신철학의 뜻대로 인간은 자율로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과관계에 역행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일까?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 자유로운 사고 속으로


 자연과학자들의 기본 입장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거부"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세이다. 이것에 항변하는 것은 상당히 외로운 일이다. 현대사회의 의식은 이미 자연과학 안에 매몰되어있고, 인식은 늘 자연의 정합성에 저항하지 않게 구성되니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거부하는 근거로서의 자연의 정합성 내지 법칙에 대한 믿음이 매우 확고하여 하나의 이념이 되고 유일한 정답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철학은 말 그대로 자유마저 뺐기고, 매우 형식적인 학문으로 변질해가고 있다. 고대로부터 중세 근대에 이어지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이상하고 괴상한 이야기일 뿐이다.


 누군가가 공상을 했다. 자기는 개띠니까 죽으면 분명 개로 환생할 것이라고. 그럼 분명 사람들은 피식할 것이다. 그 조소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과학이다. 개띠를 가진 인간이 죽으면 개로 태어날 것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이 예시는 상당히 터무니 없는 이야기지만, 왜 그것이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 


 과학은 인간의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항상 근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근거 없는 모든 이야기들은 모두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터무니는 없지만, 또 명확하게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던 공상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과학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처지에 놓이게 되며, 또 생각 해보아서도 안 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형이상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그런 것들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

칸트의 "자유의지"?

데카르트의 "코기토"?

하이데거의 "無"?


가변성과 우연성을 거부하는, 시간 밖의 존재가 있다는 걸 어떻게 믿어? 

그게 첫번째 원인이라고? 

그럼 그게 신이야? 

그럼 넌 그걸 믿어? 

기도드려? 

근데 왜 답변해주시지 않아?

우리가 사는 이러한 경험의 세계말고 지성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거기 그럼 갈 수 있는 곳이야? 

어떻게 가는데?  

내 존재 의 근거가 내 생각이라고? 

내 존재의 근거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결합 때문인데?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한 학문(형이상학)은 과학으로부터 근거를 요구받는다. 이것에 대하여 항거하자는 것이, "그러한 과학적 태도를 버리고 이것들을 믿자!"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잠시.. 과학의 입장, 늘 자연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근거를 묻는 패러다임을 버리고, 이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을 좀 더 진중하게 생각해보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학과 과학이 만든 현대의 패러다임이 삼켜버린 정신철학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연에 종속된 컴퓨터인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유의 존재인가?


 앞서서 과학은 근거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과학은 인간의 정신 내지 영혼, 즉 자유에 대하여도 근거를 요구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역행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의 객관적 실재성의 근거는 무엇이냐고.


 실은, 정신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정신 내지 영혼 혹은 자유 따위의 것들은 과학의 요구에 응당할 수 없다. 그것들에게 객관적 실재성이 없다. 그것은 과학의 말대로 객관적 실재성이 없는 주관적 환상이자, 가상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태제들은 그 말 뜻처럼 인간에게 어떠한 경험적 인식을 제공하지 않는 바, 객관적 실재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면 이상하지 않은가?

과학은 늘 근거를 요구하고, 그러한 근거는 경험을 바탕으로 귀납적으로 추론되는 것인데,

경험 너머에 있는 것들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라고?


 과학은 과학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과학은 인간의 경험능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한계는 인간 경험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과학의 시선에서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들을 추궁한다.    


 칸트는 진작에 자유란 "인식할 수는 없지만 생각(사고)해 볼 수는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는 인간의 경험 너머에 있기 때문에 결코 인간에게 인식될 수 없다. 즉 과학의 눈에 포착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사고 해볼 수 있다. 과학의 요구에 응당하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그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는 충분히 자유의 당위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생각(사고)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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