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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또각 Nov 07. 2019

기막힌 연애담 9

사랑은 스릴, 쇼크, 서스펜스! 下





일주일 사이에 소개팅을 또 한 번 했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까였죠. (왜 까였냐구요? 그걸 제가 알 리가. 알았으면 이런 글을 연재할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번에 어떤 분이 댓글로 <또각님 인기 많을 것 같아요>라던데 음, 어떤 방면에선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 남자, 소개팅 하는 내내 제가 무슨 말만 하면 뒤집어지게 웃더라구요. 심지어는 피곤해 죽겠는 나를 자정 무렵까지 붙잡아 두었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선 <오늘 진짜 너무 즐거웠어요 어쩌고 저쩌고>하더니... 다음날 연락 따윈 없었습니다. 대략 저를 만담꾼 내지 코미디언 정도로 본 듯 합니다. 웃긴 건 알아가지고. 까여서 어쩌냐구요? 어쩌긴요 그냥 그런 거지. 소개팅 나가서 소재 하나 얻은 셈 치죠. 참으로 평화로운 중고나라 아닙니까.


근데 말예요. 어쨌거나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소개팅 때문에 내 소중한 금요일을 날려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제기랄. 동시대 한국을 살아가는 일개 회사원이 불금을 날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여, 지금 언어 순화 모드가 살짝 고장난 상태에요. 눈꼽만큼 남아있는 필터를 잘 돌려보도록 최선은 다해보겠습니다. 그러한들 이번편 중간중간에 격한 표현이 등장한대도 나무라지는 말아주세요. 원래 상처받았을 땐 욕이 최고거든요. 아차. 말이 헛나왔네. 저 상처 안 받았어요. 이까짓 일로 상처를 받았을 리가. 당연히 안 받았죠.


진짜라니까요?







환상 속의 그대


그와의 이별은 내 인생의 역대급 상처였다. 그 결말로 가기까지의 과정도, 그 결말이 난 후의 상황도, 모든 게 아직까지도 최악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다만,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묻는다면 사실은 알았다고 답할 것이다. 어찌보면 처음부터 끝이 보이는 게임이었다. 대부분의 사랑이 서로에 대한 판타지에서 시작되지만, 진정한 아이러니는 그 판타지를 내려놓아야만 사랑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고 어느 정도의 결핍은 있으니까. 나 역시 그렇다. 한낱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십 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그의 이상 속에 갇혀있던 나는 내가 아니었다.


우리가 못 만나는 동안 그는 나를 어떤 프레임 속에 가둔 채 환상을 눈덩이처럼 불리고 있었다. 그 환상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지금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십오년 전 모습과 흡사했다. 착해빠지고, 성실하고, 소심한 듯 대범한 구석이 있는 밝은 아이. (물론 지금은 영악하고, 여우 같아지고, 괴물 같아졌습니다. 네 글자로는 망한코인 역변사례 라고 하죠.)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는데, 그의 환상 속에서 나는 절대로 잡히지 않는, 그리고 잡혀서도 안되는 신기루 같은 사람이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쥐려하면 사라지는 신화 속 존재 같은 거 말이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내가 그에게 잡혀준 순간 그의 환상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서술해보자면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넘어와준> 내가 고맙기는커녕 흥미가 뚝 떨어졌던 것이렷다. 왜냐면 걘 비련의 주인공병에 걸린 감상주의자였으니까. 그런 타입들은 우울해야 산다. 제 모든 행복을 제끼고 굳이 아프고 슬픈 감정을 먹으며 연명하는 유형이다. 지랄도 병이라더니. 근데 나는 무슨 죄냔 말이다. 제발 그딴 비극에 나를 끼워넣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네 슬픔의 소재가 되고 싶지 않다. 마찬가지로 네 슬픔의 배경이 되고 싶지도 않다.


안타깝게도 나는 확 쥘라치면 쏙 잡혀주는 아주아주 쉬운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더없이 말이다. 그래서 그냥 한큐에 넘어가줬더니만 아주 그때부터 다큐를 찍기 시작하더라. 그니까 애초에 누가 나에 대해 혼자 소설 쓰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지멋대로 인형놀이야 쳐맞을라고.


뭐, 솔직히 나라고 기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십수년간 날 기다려왔다고 주장하는 직진남이 십이개월도 못 버티고 변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솔직히 너무하지 않냐며. 무슨 지구력이 유아기에 멈춰있냐며. 어떻게 쌓아올린 콩깍진데 그게 하루아침에 콩가루가 되는 거냐며.


덕분에 만나는 내내 거진 혼자하는 연애였다. <따로 또 같이>가 이럴 때 쓰는 말인 건 또 처음 알았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썸타고 혼자 고백하고 혼자 사귀고. 걔도 혼자, 나도 혼자. 그러더니 그쪽에서 먼저 혼자 헤어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감정의 뺑소니를 당했다. 그리고 의식불명에 빠졌다.






당신은 바다의 왕자,

나는야 해변의 망자.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그가 바람이 나서였다. 한 술 더 떠, 바람이 났다는 걸 차마 말할 수 없어 꼬박 열흘이나 잠수를 탔기 때문이다. 두 술 더 떠, 만나는 8개월 동안 그 따위 잠수 이력이 무려 세 번이나 됐기 때문이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왜 바람은 못 면하냐고, 왜.


연재 초반에 개새끼와 싸이코패스의 차이점을 설명한 적이 있다. 거기서 말한 개새끼가 바로 얘를 두고 한 말이다. 내 인생 최고의 개새끼. (아직 기록 갱신 안 된 걸 봐서 이 새끼는 찐이다.) 그때도 말했지만 이들은 가는 여자 안 붙잡고 오는 여자 안 막는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어도 능히 빠져나가는 재능이 거의 무뼈닭발 혹은 연체동물 급이다. 어장이 아무리 미로일지라도 설계자가 본인이니 뭐 다 빠져나가지. 그래 뭐 다 좋다 이거다. 네가 오징어든 낚시왕이든 다 알겠다고. 그니까 차라리 어부가 장래희망일 것이지 잠수부가 웬 말이냐고.


이 새끼의 궁극기는 바로 <잠수>였다. 정말 당해본 사람은 뼈져리게 안다. 이게 얼마나 피말리고 끔찍한 비극의 시작인지. 나의 경우 이랬다. 처음엔 이틀. 그 담엔 사흘. 그러더니 열흘. 제곱으로 늘어나는 단위에 난 내가 어디서 사채라도 뒤집어 쓴 줄 알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선천적으로 기질이 우울한 친구였다. 그래서 뻑하면 잠수타는 게 습관이었다. 나에게서 연락을 끊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 고쳐쓸 생각일랑 말자.) 참고로 여기서 잠수라 함은 메시지 읽고 씹기, 전화 안 받고 끊어버리기, 10시간에 한 번씩 답장하기 등의 행위가 결코 아니다. 그런 놈들은 애초에 호흡이 딸려 뭍으로 고개를 내밀기라도 하지 않나.


근데 진짜 잠수꾼들은 싹수부터 다르다. 메시지? 아예 안 읽는다. 전화? 아예 안 받는다. 답장?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이들은 생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게 그냥 증발해버린다. 그러니 상상해 보시라. 남자친구가 아무런 낌새도 없이 힌트도 주지 않은 채 꼬박 48시간 사라져버린다고. 실종신고 넣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말이 잠수지 사실은 잠적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하물며 장기 채무자도 쫄린다 싶으면 '아 알았어요 금방 갚을게요 갚는다구요' 하고 맘에도 없는 대사라도 치는 마당에.


물론 반박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남자의 동굴기> 따위를 운운하면서.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연애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전설의 이론 말이다. 말 나온 김에 얘기하겠다. 남자들 동굴기? 다 이해한다. 순도 100프로 진심이다. 지금보다 어리고 여렸으면 또 몰라. 닳도록 연애해서 여기까지 온 판국에 그거 하나 이해 못하랴. 그래서 누가 동굴 들어가지 말래? 요지가 그게 아니다. 동굴 들어 갈 거면 최소한 말은 좀 하고 가라는 거다. 아니 천일동안 마늘 까먹고 인간되서 나오는 게 꿈이면 또 몰라. 것도 아니면서.


암튼 누군 동굴이 없어서 안 들어가는 줄 아냐. 나도 잠수타고 싶고 동굴 들어가고 싶다. 가끔씩은 세상에서 로그아웃하고 싶고 남자친구고 나발이고 현실에서 꺼져버리고 싶다. 근데 안 하는 것 뿐이지. 왜냐면 예의가 아니니까.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할 거 아니까. 그러니까 예고없이 잠수타는 것들을 두고 천하의 개새끼라고 욕하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울며 기다릴 거 뻔히 알면서.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곪아터질 거 잘 알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 주는 거 알면서. 그래서 이게 나쁜짓이란 것도, 다 알면서. (설마 진짜 모르시겠다는 아해들은... 지금 당장 양심에 손 얹고 쏘시오패스 테스트 실시하러 갑니다.)


그러니 내면의 어떤 미스테리한 불가항력에 이끌려 잠수를 꼭 타셔야겠다, 하는 새끼들은 앞으로 산소통 없이 내려가자. 수면 밑이 좀 살 만하니까 다 이 지랄들 아닌 거냐고. 숨이 턱턱 막혀봐야 꼴딱 올라오지. 지들이 뭐 심해어야 뭐야.


아무튼 다 알면서도 그러는 새끼가 제일로 양아치다.

미필적 고의여도 죄는 성립되거든요.






님아, 그 밤을 넘기지 마오

          

그래서 그 놈이 바람난 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참으로 궁금하실 터인데. 소상한 경위는 이렇다. 롱디 중이었던 나로서는 그와의 모든 연락이 먹통이 되자 진심으로 멘붕했다. 당장 집으로 쳐들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던 것도 아니고, 아무리 대학원생이어도 내가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우아하게 연구만 하는 것도 아니고.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고 하지 않나. 이거 리얼이다. 대학원생은 그냥 노비.. 아니 도비.. 아니.. 아무튼 그냥 잘못한 사람들이다.)


하여간 꼬박 열흘 동안 그가 감감무소식이자 공황장애 비슷한 게 오더라. 혹시 무슨 일 생겼나? 병원에 일 터졌나? 아님 가족 문젠가? 혹시 얘 어디서 사고난 거 아냐? 어떡하지? 누구한테 연락해서 물어봐야되지? (당시 우리는 겹치는 학창시절 친구가 너무 많아서 비밀리에 연애중이었다. 물론 부모님들도 다 모르셨다. 말 안 한 게 천만다행이지 내 인생의 수치 같은 새끼.) 잠수를 타기 바로 30분 전에도 전화해서 멀쩡한 목소리로 뭐하냐고 묻던 앤데 너무 이상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러울 수는 없는 거잖아.


아니. 있더라. 사람이 존나게 이상하고 겁나게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거더라. 결국 그가 잠수탄 지 11일째 되던 날,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KTX를 끊어 그의 집으로 향했다. (달력을 보니 마침 그 날이 그의 오프날이었다.) 집에 가까워질 수록 심장은 터져나갈 것 같았고 머리 속에선 사이렌이 왱왱 울렸다. 손바닥에 고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나는 부지런히 걸었다. 그리고 그의 집 문 앞에 당도했다. 두 번 그의 전화를 울렸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는 손은 이미 수전증 말기환자처럼 덜덜 떨렸다.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결국 차가운 문짝에 대고 최후의 통첩을 했다. 나도 이젠 몰라. 나 문 따고 들어가니까 그런 줄 알어.


삑삑삑삑. 손에 익은 네 글자 비밀번호를 누르자 달그락 도어락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익숙한 집안 냄새가 온몸을 덮쳤고, 신발 두어켤레가 두서없이 신발장을 뒹굴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엉망진창인 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현관 입구에서부터 느껴졌다. 쌓여있는 라면봉지와 맥주 캔들. 쓰레기더미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는 배달음식 전단지들. 나는 그것들을 걷어내고 거실(이래봤자 원룸이지만)로 들어섰다. 집안은 더 가관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내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밟힌 거라곤 딱 하나. 선풍기가 켜져 있었다.


당장에 그는 없었지만 멀리 나갈 거였다면 선풍기를 켜두었을 리가 없지. 나는 논리적으로만 생각했다. 논리라고는 씨알도 안 먹히는 병신한테 지나친 호의를 베푼 게다. 허나 당시에는 선풍기를 보고 한시름은 놨던 게 사실이다.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나의 행복회로가 팽팽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일이 진짜 힘들었구나. 하긴 레지던트 2년차면 가장 힘들 때잖아. 방 꼴 좀 봐. 사람 사는 거 같지가 않네.


청소. 빨래. 분리수거. 그렇게 하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장을 보았다. 냉장고를 그럴싸하게 채워놓고 설거지까지 빡빡 깨끗하게 해놓았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지났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쎄해지기 시작했다. 창밖이 어두워지자 마음도 덩달아 내려앉았다. 뭔데 이거. 뭐하자는 건데. 너 선풍기 켜놓고 나갔잖아. 근데 왜 안 들어와. 왜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봐.


더 이상은 진짜로 할 게 없었다. 마냥 앉아 기다리자니 미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는 데가 없으니 딱히 갈 데도 없었다. 복잡한 심경에 사방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냥 헛소리 잡소리를 하며 시간이라도 때울 요량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집중이 안 되더라. 결국 닥치고 앉아 인별그램을 켰다. 남의 사는 얘기를 보면 시선 분산이라도 될까 싶어서.


그런데.


그 런 데.


하다 하다 할 게 없어 사람들 활동 내역을 보는데 불과 1분 전에 그가 활동을 한 게 아닌가. 그것도 무려 내가 잘 아는 여자의 게시물에 하트를 누르는 행위를. (참고로 그는 정말로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올린 게시물에만 하트를 누르는 습관이었다. 역시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여자랑 같이 있다는 소리잖아. 그때부터 나는 그녀의 인별그램으로 들어가 모든 게시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She Pearl. (진주같이 예쁘다는 뜻입니다.) 언제야. 언제부터야 늬들.


이것은 무척이나 합리적 의심이었고, 추후에도 합리적 의심이 맞았음이 밝혀진다. 왜냐면 그 여자가. 내가 삼개월 동안 이유없이 경계했던 인물이자, 그가 대놓고 보여주던 메신저 대화목록에서도 유독 거슬렸던 이름이자, 그의 주변에 드글댔던 수많은 여자 중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빳데리가 다 됐나봐요


그랬다. 그는 바람이 난 거였다. 그것과 같이 일하던 동료 직원이랑. 막판의 막판까지 그는 아니라고 우겼으나, 나와 헤어지자마자 그녀와 사귀는 걸 들켜주셨다. (대놓고 인별그램에 사진이 올라왔다. 나 보라고 올렸냐? 잘 봤다 썅놈아.) 이 얼마나 뻔한 아침드라마 단골 소재인가. 힘들고 지치는데 옆에 있어주는 여자한테 자연히 눈이 돌아간 거다. 실제로 직장 내 불륜이 많은 이유와 상통한다. 근데 웃기는 건 말입니다. 롱디가 힘들어서 연애를 관두는 건 오케이라 치자. 롱디가 힘들다고 그걸 숏디로 대체하는 심보는 뭐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인별그램 활동내역을 보는 순간 퓨즈가 나가는 걸 느꼈다. 잘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단박에 끊어지고, 신나게 돌리고 있는 행복회로가 터지는 소릴 들었다. 이것들을 어쩌면 좋지. 진짜 다 죽여버릴까. 당장 뛰어가서 (심지어 게시물에 장소까지 태깅해 놨더라. 땡큐쏘망치다 망청이들아.) 뭐 현장 덮치고 상 한 번 엎어 봐? 너 죽고 나 죽고 이판사판으로 나가 봐? 머리채 다 뜯고 오늘 피 한 번 거하게 흘려 봐? 5분간은 딱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데 5분 딱 지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런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위풍도 잃고 기품도 잃고 한동안 제대로 미친년으로 인터넷에서 회자될 뿐, 내가 얻는 게 뭐가 있다고.


결론적으론 그때 그냥 질렀어야 됐다. 삭히지 말고 터뜨렸어야 했다. 당장은 잘 모르겠는 활화산보다 무서운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겠는 휴화산이라지 않나. 우리 모두 화내야 될 땐 화내고 살자. 웃으면 복이 오지만 참으면 속만 터진다. 차라리 밖으로 터지고 말지 안으로 터지면 나밖에 모르잖아. 그건 너무 아픈 일이다.


아무튼 나는 화내지 못했다. 새벽 1시가 넘어 술에 꼴아 들어온 그를 앞에 앉혀두고 나는 물었다. 죄인처럼 여쭸다. 대체 뭐가 문제니.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거야.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그는 대답까지 없었다. 약 반 시간동안 침묵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가 감쳐문 입을 드디어 열었다. 미안해, 못하겠어. 그게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주어도 없고 목적어도 없는 말. 그 말이 꼭 잘 벼린 칼날 같아서 내 온 마음엔 사납게 잇자국이 났다.


내가 언제 조국의 미래를 논하쟸어 인류의 평화를 논하쟸어. 왜 나를 대단한 토론거리라도 쥐고 온 사람처럼 만들어. 뭐 그리 대단한 말을 듣겠다고 나는 이 집구석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렸는가. 뭐 그리 엄청난 답을 바라자고 이 먼 동네까지 기어이 찾아왔는가. 마땅한 변명도 못하는 옹졸한 쥐새끼 한 마리 조지겠다고, 나는 왜 하늘의 별 따기 하듯 인별의 바다를 뒤졌는가.


나는 억울했다. 행복하게 해준다며. 최소한 행복하게는 못해줘도 이렇게 불행하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너 의사라며. 응급실 의사가 말 한 마디로 이렇게 사람 골로 보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이럴거면 차라리 장의사가 됐었어야지. 명백히 의료사고였다. 근데도 나는 한 마디 말도 못 했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는 충격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만 머릿속에서 심정지가 일어난 까닭이다.


새벽 4시에 연고 하나 없는 동네에서 나는 문전박대 당했다. 진짜로 쫓겨났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앞으로 잘할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잡는 남자친구는 더 이상 없었다. 그냥 내가 빨리 없어져주길 바라는 살과 피와 뼈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의 덩어리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찌나 야멸찬 지 그냥 정신이 확 들더라. 이 미친놈 지금 진심인가? 나 진짜 쫓겨난 거야? 이렇게 차이고 끝인거야? 반전 같은 거 없고? 와. 반전 없는 게 제일 반전이네. 소오름.        


울며 뛰쳐나오던 걔네 집 복도의 온도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모든 세포가 그 슬픔을 기억하겠다는듯 바득바득 깨어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든 차가운 밤. 낯선 공기. 낯선 풍경. 낯선 거리. 처음엔 좋아보였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생경한 것들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대로 멱살 잡히듯 떠밀려 기차역으로 향했다. 첫 차가 무려 4시 40분부터 다닌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기차역에서부터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서울로 올라온 나는 집에서 한 시간 눈을 붙인 후 곧바로 연구실로 갔다. 그리고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다 잃었단 생각이 드니 내꺼 하나는 꼭 지켜야겠더라. 덕분에 내 밥그릇 하나는 기똥차게 채우며 산다. 근데 그 새끼한테 고맙지는 않다. 그냥 내가 잘나서 잘한 건데 뭐.

                     

이런 고로, 그는 내 인생을 통틀어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으로 남아있다. 앞일이야 어찌될 지 모르는 것이지만 살면서 다시는 그 정도로 상처받을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문득문득 그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프다. 그때 모조리 털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마음을 때리고, 그때 못다 흘린 눈물이 고개를 쳐든다. 이렇게라도 글로 쏟아내지 않으면 영영 내가 이 기억을 짐처럼 지고 살아가겠더라. 아무튼 이렇게해서 살풀이는 끝이다.


그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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