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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또각 Sep 19. 2019

기막힌 연애담 2

전설의 시작, 호구의 탄생




첫사랑은 처음이라서



내 첫사랑은 열여섯에 찾아왔다. 식스틴, 그 꿈만 같아야 할 이팔청춘을 나 역시 여느 대한민국 청소년답게 학교에 쳐박힌 채로 보냈다. (지금은 부디 상황이 개선됐기를 바란다만, 아무튼 나 때는 거의 일상이 정신나간 수준이었다. 방과후엔 보충학습이 있었고 그 뒤엔 또 야간자율학습이 있었으며, 틈틈이 학원도 가야되고 주말엔 과외까지 받다보면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거지 싶은 그런 삶 말이다. 당시의 나는 '범생이'라 불리는 대열에 속하는 학생 중 하나였고 매일 같이 산더미 같은 문제집을 풀었으며 그것들을 이고 지느라 가방은 항상 밑바닥이 풀썩 꺼져 있었다. 덕분에 잠들기 전엔 닫힐랑말랑 나를 간보는 얄미운 성장판과 처절한 밀당까지 해야 했다. 근데 나한테 왜 그랬어 성장판 새끼야! )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서 찾아온 첫사랑이었으니 얼마나 더 애틋했겠는가.


상대는 같은 반 남학생이었다. 내가 먼저 첫눈에 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은 연예계에 덩치는 체육계지 얼씨구 입담은 무려 정재계네. (내 인생 최고의 기억조작남이다. 진심 하도 오래되서 그런거니 지나가세요.)


쌈빡하게 잘 놀고 적당히 잘 까진, 일진은 아닌데 그렇다고 범생이는 더더욱 아닌 부류. 그 아슬아슬하게 경계에 걸쳐있는 게 당시엔 어찌나 멋져보이던지, 딱 그 시절 유행하던 인터넷소설 남주의 아류같은 애였다. 왜 그런 애들 꼭 있지 않나. 입학 할 때부터 쟤가 1학년 땡땡땡이래 하는 식으로 전교를 한 번씩 들었다 놓는 애들.


(아 이건 사족인데. 그런 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패션도 죄다 비슷비슷하다. 일단 교복 넥타이는 항상 부재중이다. 아예 살 때부터 버린 건지 기절시켜 어디 감금이라도 해둔 건지, 여하간 타이를 매느니 차라리 목을 맬 기세다. 셔츠는 바지 밖으로 빼입는 게 정석이고 브랜드 쓰레빠 정도는 신어줘야 제맛이고. 웃긴 건 이래놓고 교복을 아예 안 입는 건 또 아니다. 그냥 뭐, 제도권에 저항하는 방법도 아주 가지가지다.)


난 골라도 하필 그런 애를 골랐다. 근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지극히 나다운 처사였구나 싶다. 서른을 넘긴 지금의 나는 조용한 관종 정도지만, 현재 내 나이의 절반 뿐이 안 됐던 그때의 나는 슈퍼 관종력을 탑재한 중이병 말기의 환자였다. 그래서 꼭 저 놈을 가져봐야 직성이 풀리겠는 거라.


그래서? 가졌다.

어떻게? 꼬셨다.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더니



나는 타고난 승부사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조건 가져야하고, 목표가 있으면 반드시 이뤄야한다. 어떻게 사람이 제 뜻대로만 하고 사냐 싶겠지만 내 인생은 정말이지 내 뜻대로였다. (내가 아홉 살 때던가. 한 번은 선생님이 여러분은 무얼 위해 사나요? 하고 물었는데 내가 '전 이길라고 살아요'라고 당당하게 지껄였단다. 실화냐구요? 당연히 구라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성질머리 고약한 어른으로 성장한 거겠지만, 뭐 최대한 좋게 표현해서 수완이 좋은 인간이라 치자. 아무렴 이런 마이더스의 손이라 할지라도 남자에 관해서는 한결같이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게 문제다. 첫사랑이라고 뭐가 달랐겠는가. 내 손으로 꿴 그 놈의 첫단추가 바로 이 유구한 호구질의 시작이었다.


그 애를 꼬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누히 말했듯 천성이 정복자인 내가 질 싸움에 패를 걸었을 리가. 더군다나 표적을 정한 이상 내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다. 당연히 넘어올 줄 알았고 역시나 넘어오더라. (심지어는 어릴 때가 승률은 더 높았던 것 같다. 나 역변했나. 왜죠.) 근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아직 못 가졌을 땐 그냥 안달만 하던 수준이, 가지고 나니 되려 복달을 하는 수준으로 올라친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걔를 사귀고부터 <제대로 돌아버렸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 매일같이 내 머리채를 잡고 빛의 속도로 팽팽 돌았다. 너무 설레서 체할 것 같은 기분. 너무 좋아서 토할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들이 하루에도 수 만 번씩 나를 갈겼고, 나는 꼼짝없이 붙잡힌 채 곤죽이 되도록 맞았다. 매일 아침 심장 속에선 잭팟이 터졌고 머릿 속에선 함성이 터졌다. 도파민 과다쇼에 휘말린 열여섯 소녀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겠나. 그저 속절없이 휘둘려 정신줄을 놨을 뿐.


그 애는 나를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나는 그 애 곁을 맴도는 게 내 인생 과업이라도 된다는 듯 자진해서 그 애 주위를 공전하는 인공위성이 되었다. 그 애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나는 대단하고 심각하게 일희일비했다. 그 애가 문자 답장을 보내오면 뛸 듯이 기뻤고 그 애의 답장이 늦어지면 죽을 듯이 우울했다. 그 애를 만나러 가기 전엔 떨려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가 하면, 머리를 감으면서도 혹시 연락이 올까 휴대폰 액정을 내도록 확인했다. 그때의 나는 꼭 고장난 계기판 같았다. 일초에 몇 번이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내가 미친년 널 뛰듯이 구는 동안, 내 성적표엔 유례없는 점수들이 등판하기 시작했다. 아주 혁신적이고 매우 초면인 숫자들이었으나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생각이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천상 사랑꾼이란 걸.


아. 진짜 눈물겹게 끔찍하고 순수한 그때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그 이후론 사람을 그토록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세상 떠날듯 사랑을 하고 나니 내 안의 사랑이 전부 바닥났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줄 알았죠. 전혀 아닙니다. 놀랍게도 미래의 저는 그보다도 몇 배는 더 지독하고 한참은 더 진보한 방식으로 똑같은 짓거리를 몇 번이고 다시 한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 하.)


아무튼 이것이 바로 내 기구한 연애사의 주옥 같은 시발탄 되시겠다.




그래 내가 개다. (feat. 도베르만)



이쯤이면 눈치 챘겠지만 나는 심각한 금사빠고 심지어는 엄청난 얼빠이기까지 하다.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이렇게 당당하나 싶겠지만 사실 나쁜 것도 아니라 안 당당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말이 얼빠다 뿐이지 내가 연예인 뺨 치고도 남을 다비드 조각상 같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올시다. 그저 내 타입으로 생긴 남자에 지극히 약하고 대책없이 꽂힐 뿐.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향엔 죄가 없다. 아, 그래도 하나만큼은 쿨하게 인정하기로 한다. 내 얼빠력과 금사빠력은 백프로의 상관관계를 갖는다. 난 그저 얼굴에 꽂히면 <고민보다 GO>다.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헥헥 꼬리를 흔들고, 한 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이라 생각하는 이 모양새가..... 참 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감이 좀 그렇지만 여기선 긍정적인 뜻이다. 여하간 하고 많은 견종 중에서도 날 닮은 건 도베르만이다. 한 번 물면 끝을 보는 책임감과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탑재한 충견. 나 역시 그렇다. 전투력 지구력 만렙의 이러한 성격이 일하는 데 있어선 무척이나 유리하게 작용했다. 굉장한 추진력으로 밀어부치고, 모든 기세를 쏟아부어 목표를 달성하면 되니까. 근데 연애는 달랐다. 연애까지 이 세상 텐션이 아닌 것처럼 했더니 아주 그냥 저 세상 꼴이 나더라.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의 개 같은 사랑 방식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지 않던가. 나는 그저, 한 번 물면 끝을 보는 책임감과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탑재한 여자친구였을 뿐이다. 잘못은 나의 이러한 성격을 이용하는 진짜 개새끼들에게 있다. 나의 호의를 악용하는 완전 개자식들 말이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세상은 넓고 개놈들은 차고 넘치니, 되도록 미리 알아보고 피하기로 한다. 만약 그랬는데도 잘못 걸렸다면? 그땐 물리지 말고 먼저 물어버릴 것.


아무튼 잊지 말지어다. 내가 한 수 위에 있음을.

son of a bitch도 결국엔 bitch의 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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