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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또각 Oct 09. 2019

기막힌 연애담 6

나를 차버린 모든 남자들에게




나의 두 번째 남자친구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 잠시 딴길로 새겠다. 지난 편 이후로 현타를 좀 맞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손가락은 벌써부터 드릉드릉 거린다만, 두 번째 남친은 세 번째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개새끼인지라 저번처럼 대충 교훈에 둘둘 말아 예쁘게 포장해 줄 수도 없다. 견적이 안 나온다. 아무튼 나는 아주 참신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놈을 온라인 처형할 예정인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내 머릿속이 예열이 덜 됐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소개팅'이다.





빠, 빠, 빨간맛.


소개팅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막말로 생판 모르는 낯선 자 둘을 앉혀놓고 2시간 내에 할 수 있는 한 젠틀한 방식으로 서로의 호구를 낱낱이 조사하라는 건데 당연히 어려운 게 맞다. 내가 무슨 셜록도 아니고 처음 보는 남자가 약속장소인 강남까지 코트깃을 세우고 왔다고 해서 음 오늘은 북서풍이 부는 날인데 저 남자가 옷을 여미고 온 걸 보니 강북에서 출발한 모양이로군 따위의 추리를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무엇보다 요새는 그럴 필요도 없다. 이름. 나이. 직장 또는 학교. 세 가지 정도만 알아도 사돈의 팔촌이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까지 알 수 있는 시대니까.


위대하고도 거룩하신 소셜 네트워크 덕분에 많은 게 쉬워지고 어려워졌다. 한 발 앞서 적당한 뒷조사? 그 정도 준비는 해가야 예의다. 현장에선 알면서도 모른 척? 그 정도 손발은 맞춰야 상도다. 그러니 결국엔 짜고 치는 고스톱이 분명한데도, 막상 실전은 또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게 소개팅이라는 말이다. 하드웨어의 풀스펙을 알면 뭐하나. 소프트웨어가 어떤지는 대화를 해 봐야 확인할 수 있는 법인데. 그러니 여지없이 내 소중한 평일 저녁 또는 주말의 일부를 투자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벌써 듣기만 해도 피곤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단 내 또래의 분들은 심히 공감하실 터인데, 3n살 정도가 되면 이제 소개팅의 시옷자만 들어도 신물이 난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내숭을 떨고 가식을 부리고 자기어필을 해가며 부산을 떠는 행위 자체가 귀찮고 지겹기 때문이다. 연락처에 쓸데없는 번호가 쌓여가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한 술 더 떠 까딱 하다가는 한 다리 건너면 지구촌 전체가 알고보니 내 소개남의 친누나, 단짝친구, 사촌 동생, 과 동기, 회사 동료 따위로 채워질 것 같아 불안한 것도 있다. (죄 짓고 살지 말자. 세상은 진짜 좁다.)


나만해도 올 한 해 동안 총 10번의 소개팅을 했는데 따지고 보면 한 달에 한 개씩은 꼬박 한 셈이다. 그렇게 진절머리 난다느니 어쩌고 저쩌고 해도 막상 당일이 되면 아침부터 붓기 뺀답시고 호박즙을 한 사발씩 꿀떡꿀떡 쳐마시는 게 (나란) 여자다. 아무튼 소개팅 날엔 무조건 예뻐야 한다. 옷주름은 구겨져도 자존심은 구겨지면 안 된다. 분명 화합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건만, 실상은 기싸움 끝에 승패가 갈리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하게 묘한 중독성 같은 게 있다. 음식으로 치면 꼭 마라탕 같달까. 막상 먹을 땐 맵고 맛있고 당최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이래저래 정신없이 후루룩 지나가는데, 지나고 나면 무슨 맛이었는지 홀랑 까먹어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맛이었더라 하며 또 다시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덕분에 소개팅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으로 길이길이 전해내려오는 걸 지도 모른다.


아무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설레는 일임에 분명하다. 때 되면 자동배식기에서 튀어나오는 사료처럼, 이번엔 좀 다르겠지 저번 같진 않겠지 하는 일말의 희망이 매번 우리를 같은 수법으로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대한다. 내가 진짜 이상형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냥 나하고 말만 잘 통했으면 좋겠다고 쉰소리를 잔뜩 늘어놓으며. (이게 제일 무서운 말인 거 아시죠. 자고로 소개팅에서 말이 잘 통한다는 건 대체로 상대의 전반적인 외모 등이 너무나 내 취향이라 딱히 무슨 말을 하건 안 하건 분위기가 아주 청산유수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신박하리만큼 '말만' 진짜 잘 통할 경우, 보통 의형제를 맺는 걸로 결론이 납니다. 참고로 저도 있답니다. 그런 의형제... 들.)






옐로카드, 옐로카드. 너 아웃!


소개팅은 도박이다. 파산하거나 잭팟이거나. 모 아니면 도 라는 부분에선 그 어떤 게임보다도 결말이 깔끔해서 좋은 건 있다. 다만 좀처럼 승률을 계산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을 뿐.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 지 밟아보기 전까지는 절대 모르는 것이다. 꽃길을 기대했는데 지뢰밭일 수도 있고, 사하라 사막일 줄 알았는데 아마존 정글일 수도 있고. 풍문으로 간혹 그런 모든 수식어를 뛰어넘을 만큼 (나쁜 의미로) 어메이징한 소개팅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올 해는 내가 제대로 당첨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내 평생 나가 본 소개팅 중에 최고로 쇼킹했던 이야기를 해보자 한다. 너무 황당해서 여러분들은 안 믿을 지도 모른다. 그럴 줄 알고 내가 그 날 얼마나 빡이 쳤는지 사과시계로 기록해둔 내 심박수 캡쳐 화면도 있다. 근데 너무 구차하니 그것까진 안 풀겠다.


때는 불볕더위가 한창이던 8월 초. 나는 38도라는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논현역 2번 출구 앞에 선 채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육두문자를 씹어뱉던 중이었다. 당시 나는 정말 애정하는 빨간색 발렌티노 원피스에 하얀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길바닥에 죄다 벗어던지고 집에 가고 싶을 정도였다.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 남자가 약속시간을 꼬박 12분씩이나 늦고 있던 중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약속시간은 그 자가 잡았다.) 평소 같았으면 평온하게 참았을 테지만 2019년 8월을 겪어 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내 편을 들어줄 것이다.


무더위에 쪄죽거나 복장 터져서 까무러치거나 둘 중에 하나겠구나 싶을 때쯤 그가 나타났다. 세상에나, 내가 처음보는 얼굴로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소개팅 주선자는 보통 페어게임을 위해 양쪽 당사자에게 서로의 사진을 하나씩은 전달해 주곤 한다. 나도 그 상관례에 따라 그의 사진을 미리 받아보았던 참이다. 사진 속의 그는 무척이나 호방하고 너그럽고 인자한 30대 벤처 기업인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는데, 현실의 그는... 아무튼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물론 그 역시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 근데 그건 최첨단 카메라 앱에 내 이십 년 묵은 셀카 짬바를 얹어놓은 결과일 뿐 나는 죄가 없다.)


그와 나의 대화는 한 곱창집에서 시작되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자는 것도 아니고 더워 뒤지겠는 날 굳이 굳이 불 앞에 앉아서 말이다. (물론 최초에 곱창을 먹자는 제안은 내가 했다. 근데 그건 폭염주의보가 내리기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메뉴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 집이 잘한다면서. 하... 나도 안다고. 나도 대학 다닐 때 맨날 이 집만 다녀서 너보다 십 년치는 더 먹었을 거라고. 아무튼 그의 뚝심은 칭찬하는 바이나 센스는 비난하는 바이다.)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잠시 대화체를 빌리겠다.


그: (사장님을 향해) 이모~ 여기 쏘주 한 병 주세요!

나: (1차 동공지진. 나는 먹는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진로2즈벡으로 가시죠. 그게 제일 낫더라고요ㅎ

나: (나 그거 안 좋아하는데...?) 아 네..

그: 사실은 제가 오늘 차를 사고 오는 길이거든요ㅋㅋ 오늘 연차내고 오전에 인천 갔다 왔어요.

나: (2차 동공지진. 너 퇴근하고 온다고 각자 직장 중간에서 만나자며 멍멍이 새끼야. 연차 냈으면 오후엔 집에서 죽 친거 아니니...? 근데 이 날씨에 굳이 날 논현까지 불러내...? 죽을래?) 아 그러셨구나~ 마음에 드는 거 사셨어요?

그: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내밀며) 제 차 보실래요?

나: 오... 뭐스탱이네요!?

그: (썩은 표정) 아..ㅎ 뭐스탱 아세요?


문제는 여기부터 시작이었다. 내가 뭘 '안다'는 것 자체가 이 남자에겐 커다란 자극이자 장애였던 모양이다. 그 뒤로 이건 아세요? 저건 아시구요? 의 향연이 이어졌는데 내가 대답하는 족족 그걸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더라. 근데 아는 걸 어쩌라고. 그럼 내가 아는 분야만 골라잡지를 말든가. 내가 모르는 척 하고 싶게 예쁘게라도 묻던가. (심지어 유세부리기도 뭐 할 정도로 너무나 별 것 아닌 것들 투성이었다. 특히 "제가 외탁이라 키가 크거든요. 근데 외탁이라는 말 아세요?" 이 대사가 제일 충격이었다.)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제가 여자 화장품을 좀 아는데요~ 오늘 바르신 거 입生로랑이죠? (미안한데 이거 맼이다..) 제가 요새 MBA 과정을 밟고 있어서 말인데요~ 대학원이 어쩌고 저쩌고 (미안한데 나도 박사다..) 제가 위스키를 좀 마셔봐서요~ 맞다 제가 소믈리에 자격증도 있거든요. 근데 술은 뭐, 좀 드시는지? (미안한데.. 할많하않.) 이런 질문을 몇 십 개 연달아 받으니 그쯤부턴 자기소개를 받는 게 아니라 집중취재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평범한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령 주말에는 뭐 하세요? 취미는 따로 있으세요? 여름휴가는 다녀오셨어요? 여행은 즐기는 편이신가요?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흐름을 바꿔보고자 내가 먼저 질문을 유도하기도 했다. 셔츠가 예쁘네요, 쇼핑은 보통 어디서 하세요? 하고 말이다. 근데 이마저도 그의 자아전시용으로 홀랑 까먹히고 말았다. (아 제가 또 쇼핑을 아무데서나 안 해서요~ 이하 후략.) 결론적으로 그는 끝까지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마치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목주름을 우산처럼 펼친 채 쉿쉿 거리는 목도리도마뱀처럼 연신 자기 자신을 풀이하고 해석할 뿐이었다. 이 개노잼 설명충아.


처음엔 그를 이겨먹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내가 골든벨을 울리러 온 게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잘난척 배틀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나이가 몇 갠데 초딩처럼 그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지, 나도 견디다 못해 돌아버린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니 그와 말도 안 되는 입씨름을 벌이고 있더라. (참고로 이 토크배틀은 이자카야에서 벌였다. 곱창집은 너무 시끄러워서 뭐라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 그냥 옮기지 말 걸.)


그: 제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좀 쳤었는데요~

나: 어머머, 저도 취미로 작곡 하는데! 꺄르르 꺄르르.

그: 저는 주로 클래식, 뭐 베토벤이나 쇼팽 같은...

나: 저는 하우스 장르요! 집에 신디사이저가 있거든요. 꺄르르르르.


그가 칼을 꺼내면 나는 창을 꺼냈고, 그가 활을 겨누면 나는 총을 겨눴다.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게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미러링을 시전했더니 그로부터 정확히 1시간 후 그가 드디어 백기를 들었다. (말했지만 나도 보통 년은 아니다.) 내 어마어마한 빙썅력으로 그를 물리치고 나니 시침이 정확히 십이시를 가리키고 있더라. 그니까 나한테 시비 걸면 어떻게 되는지 잘 봤지.


나는 쿨하게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고 그는 하얗게 질린 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택시를 잡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상, 한 여름 밤의 개 같은 소개팅이었다.

 





그린 라이트?

아니, 구린 라이트.


가을은 나에게 여러모로 의미있는 계절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사실 여름인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남자들은 모두 가을에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계절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머리는 늘 허공에 붕 떠 있고 가슴은 죽어라고 쿵쿵대고. 내가 가장 취약한 이 시기에 나는 또 하나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소개팅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제 아무리 내가 금사빠일지언정, 이 정도 데였으면 나도 전략이라는 걸 취하지 않았겠는가. 이번 소개팅은 출처도 확실했고 경로도 탄탄했다. 고등학교 동기의 대학 동창. 한 다리만 건너면 거미줄처럼 인맥이 사방팔방으로 얽혀있어서 차마 헛짓거리는 상상도 못 할 관계. 이 정도면 최소한 모든 신경에 정중함을 바른 채 온 몸을 사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런데 굳이 그런 상황 탓이 아니더라도 그는 전형적인 <엄친아>의 표본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가정교육 제대로 받고 자란 엘리트 회사원.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직장 좋고, 뭐 빠질 게 없는. 어릴 땐 눈빛에 양끼가 있는 애들이 좋았고, 커가면서는 낯짝에 패기가 있는 애들이 좋더라니, 더 커보니 그냥 참하고 조신한 남자가 최고더라. 워낙 내 성향 자체가 절반은 아티스트라서 시시때때로 감정이 널을 뛰는 바, 되도록 무던하고 차분한 남자를 찾게 되더라는 뜻이다. 그는 딱 그런 남자였다. 수온으로 치면 냉탕도 온탕도 아니고 적당히 미지근한데 좀처럼 변동이 없는 온도 말이다.


심지어는 얼굴마저 내 취향이었다. (곧 죽어도 못 잃는 한 가지: 쌍꺼풀 없고 눈꼬리 쳐진 눈.) 평일 퇴근 후에는 주로 운동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중국어를 배우며, 사내 독서클럽을 주도하면서, 주말에는 외곽으로 나가 스포츠를 즐기는 삶. 언뜻 들었을 때 무지하게 이상적으로 꾸려진 직장인의 삶이었다. 나의 경우 직군상 출근, 퇴근, 평일, 주말 등이 때로 경계없이 뒤엉키곤 해서 더욱이 그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정도면 거의 사기캐가 아니냐구요. 하필이면 나는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손쉽게 무장해제 되는 스타일이고, 여지없이 그 앞에서도 나를 <밀어서 잠금해제> 해 버렸다. 좋게 말하면 사교성이 좋았고 나쁘게 말하면 경계심이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고깃집에서 시작된 소개팅은 이자카야로 이어졌고, 맥주 한 잔에서 시작했던 얘기는 어느새 소주 두 병이 되었다. 소개팅이 흥했느냐 망했느냐를 가늠하는 척도는 한 개 뿐이다. 둘 중 누구도 시계를 보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한다면 거진 반은 성공했다고 보면 된다. 여하튼 그와 내가 앉았던 다다미방에는 끊임없이 웃음이 쏟아졌고 술잔이 부딪엇고 호감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주 주말에 다시 보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에게도 가을이 오고 있었다.


그 다음 번에 만났을 때는 영화를 봤고 드라이브를 했고 밥을 먹었다. 으레 데이트코스가 여기서 거기이듯, 뭐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밥을 먹고 그가 회사로 돌아갔다는 게 다소 특이한 점이긴 하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다.) 더구나 그 다음 약속을 잡지 않은 채 말이다. (이게 얼마나 적신호인 줄은 다들 알 거라 생각한다.)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안 바쁘냐고 묻는다면, 나도 토나오게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도 때로는 그의 일상이 우리 사이를 압도하는 것만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는 바쁘고 바쁘고 또 바빴다. 이쯤되면 3n살의 여자는 또 뒷통수가 쎄해지기 마련이다. 남자들은 단순하다. 그래서 마음 가는 여자에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리 바빠도 그 법칙은 바쁨마저 뚫고 나가기 마련이다. (당장 내일 새벽에 출국일지언정 목소리 듣고 싶다며 야밤에 전화를 건다거나 보고 싶다며 집앞에 찾아 온다거나.) 나는 그런 남자들의 단순함을 사무치게 좋아한다. 내가 아무리 우겨봤자 빼박 답은 정해져있고 그 답이 너무나 명확하니까. 얼마나 눈물나게 명쾌한 종족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정한 남자였다. 내가 말했던 모든 말을 기억해주고 배려해주고 응원해줬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사소한 스케줄까지도 말이다. 어쩌면 완벽하게 기계적으로 학습이 된 행동이었을 수도 있으나, 나는 적어도 그런 치밀함은 흉내낸다고 쉬이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매일 같이 채팅창 위로 달콤하고 따뜻한 말들이 날아왔고, 나는 혼자서 계절을 역행하고 있었다. 그의 섬세함 덕분에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 되어 금세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위태로운 마음가짐으로, 세 번째 약속은 아직 잡히지 않은 채, 월요일이 돌아왔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한 주를 시작하며 언제나처럼 연락은 이어지고 있었다. 화요일이 가고, 목요일이 지나고, 토요일까지도.


그런데 말입니다.


토요일 오후 3시 55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나에게 자신의 일상을 보고했다. 요지는 이제 운동하고 나왔으니 오늘은 부모님을 찾아봬러 가겠다는 얘기였다. [나는 이제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오는 걸 나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중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내 손목에 달린 사과시계로 말이다. 업무에 대한 피드백이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져야 하는 직업 상 나는 평소에도 하루종일 사과시계를 차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소개남

[나는 이제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려고~]

[저 이제 도착했어요ㅋㅋㅋㅋ]

[정문인데 어디로 가면 돼요?] 오후 3:55


그가 내게 보냈던 메시지 뒤로 두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더 왔다.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내용으로 말이다. 뭔 개소리지 이게...?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등골에 땀이 쭉 났을 것이다. 더 가관인 건 바로 이 다음이었다.


소개남

[나는 이제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려고~]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오후 3:55

[헉.. 방 헷갈렷다 미안;; 이런 적 첨이네;;] 오후 3:56


그는 내게 메시지를 잘못 보내자마자 빛의 속도로 그것들을 삭제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누군가 사과시계로 메시지를 확인할 경우, 실제로 휴대폰에서는 확인하지 않은 걸로 처리가 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나는 메시지를 봤지만 못 본 척 할 수도 있고, 상대는 내가 메시지를 이미 읽었다는 걸 아예 모르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삭제 해 봤자라는 소리다. 소름 돋지 않나요? 자 모두 사과시계의 아름다운 오류에 박수를 쳐주길 바란다.


이 이후로는 줄줄이 변명이었다. 심지어 나는 삭제된 메세지의 내용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선조들의 명언처럼, 그도 나사 풀린 태엽인형 마냥 혼자 구구절절 횡설수설 수습잔치를 시작했다. 아무튼 확실한 건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부모님네 집 정문을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이 새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둘째. 별 거 아니었으면 놔뒀을 메시지를 곧바로 삭제했다는 것만으로도 백프로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 어장치다 걸렸구나 이 새끼. 그 사실을 깨닫는 찰나, 갑자기 그간 의심스러웠던 모든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쁘다는 핑계 하에 저질러왔던 수많은 짓거리들 말이다. 운동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거나, 운동은 끝났는데 다시 회사를 들어가봐야해서 전화를 못 받는다거나, 등신아 그때가 밤 10시였는데 그 시간에 느닷없이 회사를 왜 다시 들어가며 그래 들어간다 쳐도 회사에서 누가 널 감시한다고. 아 의심은 하시겠네 경비아저씨가. 그가 여태껏 살가운 어조로 얼버무렸던 모든 <찝찝한 바쁨>들의 실체가 탄로나는 순간이었다. 뭐 바쁘긴 바빴겠다. 이 여자 저 여자 다리 걸치고 관리 하느라.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다른 의미로 사기캐가 맞았던 셈이다.


이 이야기의 킬링파트는 내가 까였다는 지점에 있다. 어느 날, 그는 24시간 하루 꼬박 잠수를 타고 나시더니 나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다. (사귄 적도 없는데 차이기는 또 처음이다.) 본인의 변덕 때문에 본인도 헷갈렸는데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아니시란다. 그 메시지를 본 나는 저 세상 텐션으로 웃으며 굴렀다. 나 정말 쓰레기 마그넷 맞구나. 어장치다 걸려놓고 뜨끔하니 손절이라.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내가 사과시계를 못 잃는 거다. 여러분 애X워치 사세요. 두 번 사세요. (광고글 아닙니다.)


아무튼 내가 기다리던 가을 따윈 없었다. 그 대신 winter is coming 이다. 그러니 혹한기에 대비해 쇼핑이나 푸지게 해야겠다. 나를 지켜줄 건 값비싼 패딩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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